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책상 한쪽에 버젓이 책들이 있다. 눈을 끔벅이며 책들이 묻는 듯하다. “너 또 무슨 짓 하려는 거야?” 아, 내 소중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잘 펼쳐두고 충분히 숨 쉬게끔 해줘야 마땅하겠으나 그럴 리가. 무심하게 툭툭 쌓아둔 책들이 여기저기 작은 탑 무덤을 이룬 지 오래다. 완독한 책, 일부분만 읽은 책, 곧 읽을 책, 언제 읽을지 막막한 책이 두서없이 뒤섞여 있다. 가용 범위를 넘어선 책장에 자리 하나 얻지 못한 채 책상과 바닥과 가방을 오가며 임시 기거 중인 나의 책책책. 모른 척했다. 아, 무심했다. 그러다 괜히 책 얘기를 쓴다는 핑계로 미안한 척이다. 그래도 손 내밀면 금세 닿을 거리에 있지 않느냐고 조금 뻔뻔하게 군다. 뭐, 솔직히 책도 하나의 물건이고 사물인데 너무 ‘우쭈쭈’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또 책을 마구잡이로 쥐고 이리저리 굴려 더럽히는 꼴은 절대 못 본다. 책에 밑줄 긋기를 하는데 괜히 상처 내는 것 같아 손이 좀 떨리고 소심해진다. 자기모순이다. 책에 대한 마음은 훨씬 복잡하다. 하나하나 풀어내려면 이 지면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판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심히 불안한 때가 있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전혀 불안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후자의 그 시기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이러나저러나 불안은 내 기본값이기에 책을 읽는 나날은 조금, 아니 훨씬 괜찮을 것이다.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2023, 출판공동체 편않)을 만지고 읽다 보니 책에 관한 사적 경험과 내 안의 질문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온다. 만약 ‘책에 대한 책’에 관한 원고를 청탁받는다면, 나는 어떤 책에 대해 쓸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건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2016, 문학동네)이다. 다시 돌아와,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은 책과 함께 살아가고 책에 둘러싸여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나는 그들이 쓴 서문과 여덟 편의 글을 경유해 ‘나의 책’, ‘책과 나’, ‘책’ 그리고 ‘나’를 생각한다.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은 ‘출판공동체 편않’이 세계 책의 날인 4월 23일에 초판 1쇄를 발행해 세상에 내놓은 또 하나의 독립적인 책이다. 기존 출판의 권위적, 퇴행적 관행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장을 열어보자는 의도로 출발한 편않은 출판 노동자, 저자, 번역가, 독자 등 출판계의 다양한 구성원이 각자 경계를 넘나들며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출판 문화를 생산하는 공간으로 ‘결과로서의 좋은 책’을 넘어 ‘과정으로서의 좋은 출판’을 지향하는 공동체다(참고 https://editorsdontedit.com).
서평가 금정연, 서점 마케터 김보령, 신문기자 김지원, 번역가 노지양, 출판 편집자 서성진, 자칭 유사 서평가이자 뉴스레터 발행인 서해인, 책과 글자 디자이너 심우진, 출판 노동자 양선화가 필자로 참여했다. 이들은 저마다의 노동과 삶에서 경험하고 생각해온 책, 탐색하고 탐닉하는 책, 만들고 읽고 쓰는 책에 관해 진솔하게 묻고 진지하게 답한다.
관행을 재고하는 이 책의 기획자와 참여자답게 기존 책에서 볼 수 있는 실린 순서상의 차례뿐만 아니라 ‘차례 다시’가 있다. 그에 따르면 그들이 쓴 글은 ‘책이 만든 세계’, ‘어느 책 ○○○의 기록’,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읽을 때 우리가 보는 것들’로 묶일 만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언급한 책들이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의 목록으로 덧붙여져 있다.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을 다 읽고 보니 여기저기 밑줄이다. 언급한 책도, 책을 둘러싼 입장도, 글의 성격과 형식도 모두 세상에 나와 있는 무수한 책만큼이나 제각각이지만, 결국 책을 향한 사랑 고백임을 알겠다. 책으로 불안을 달래고 읽고 쓰는 일로 먹고사는 나로서도 책 곁에 있는 사람들 얘기라 흥미롭고 자극된다. 밑줄 친 것 중 몇 가지만 짧게 옮겨본다.
부디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이 또 한 권의 책에 대한 책이 되어, 한 권의 책마다 가지고 있는 단단한 세계를 유연하고 흥미롭게 건너는 경험을 전할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 김윤우, 서문 ‘이상하고 아름다운’, p.8
개념적으로 어떤 서평을 읽는다는 것은 대개 반나절 또는 사나흘에 걸쳐 이 책을 먼저 읽은 사람의 수고에 빚을 지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유사-서평가의 수고가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읽어달라고 맡겨놓은 적은 없으니까. 유사-서평가는 먼저 읽었다는 이유로 언제나 가장 먼저 외로워지는 사람이다. – 서해인, ‘어느 유사-서평가의 일일’, p.120
책도 살아간다. 누군가가 몸소 익히고 생각했던 파편들이 머릿속을 떠돌다 글이 되고, 누군가의 편집과 조판을 거쳐 책이 되었다가, 다시 누군가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유전자처럼 책과 책을 옮겨 다니며 생을 위해 몸부림친다…. 책보다 책 같은 삶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글을 좋아하는 분이 많다. 글자를 좋아하는 분도 많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도 많다. 말과 글은 본래 하나를 지향한다. 결국 대화이다. – 심우진, ‘디자이너가 중얼거린 책대책대책’, p.144~145)
이렇게 세 구절을 모아두고 다시 보니, 책을 말하고, 책에 관해 쓰고, 책을 만드는 누군가가 홀로 외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이어지는 것 같다. 책 덕후들의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 앞에서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주저주저했지만, 결국 썼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이 책을 오독하고 외롭게 만드는 거라 여기면서. 책 앞에서 책을 통해 더 많이 대화하고 더 자주 기뻐하면 좋겠다. <책에 대한 책에 대한 책>의 당신들과 미지의 당신들과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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