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신세계의 아티스트 4인

2023.04.25

신세계의 아티스트 4인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 민구홍, 김희천, 강이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Ayoung Kim 수트 셋업은 레하(Leha), 네크리스는 아티스트 소장품.

용감한 경계인, 김아영
포털 사이트에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을 검색하면 그가 제작한 영화(물론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목록이 상단에 뜬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부터 서울문화재단과 갤러리현대의 후원으로 완성한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3)까지 총 다섯 편의 필모그래피다. 25분짜리 단채널 비디오인 최근작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번쩍번쩍한 가상의 서울을 배경으로 배달 앱(댄스마스터)의 미로에 갇힌 채 초각성 상태로 질주하는 라이더의 삶을 비춘다. 김아영은 긱 이코노미, 플랫폼 노동, 최적화 등의 문제를 겨냥한 이 작품을 팬데믹 시기에 맞물려 구상했다.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시기에 가장 바삐 움직인 사람들이 배달 기사였잖아요. 보이지 않는 노동을 위해 세상을 활보하는 이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어요.” 그러다 작업실 팀원의 제보로 여성 라이더 팀 ‘치맛바람라이더스’의 존재를 알게 됐다. “배달 앱이 성행하기 전부터 갖가지 이유로 바이크에 올라탄 베테랑 라이더들이었죠. 한번은 망원동 ‘고릴라 크로플’에서 픽업한 크로플 세트를 한강 둔치로 함께 배달했는데 정말 초각성 상태로 오토바이를 몰더라고요. 신체가 앱에 동기화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주행하는 도로와 앱이 보여주는 가상 공간, 이 두 세계에 모두 속한 배달 라이더의 상태가 굉장히 흥미로웠죠.” 처음으로 실사 촬영을 시도한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김아영의 작품 중 가장 친근하고 실재적이다. 끊임없는 미로 속에서 우연히 또 다른 자신(엔 스톰)을 마주하는 주인공(에른스트 모)의 이야기는 끝없이 두 갈래로 분기하는 미로를 묘사한 보르헤스의 소설과 맞닿은 지점이 있고, 서사를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하이젠베르크와 페르마, 해밀턴의 고전 물리학 법칙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좀 더 손에 잡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전부터 가능 세계(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모든 세계의 집합을 의미하는 분석철학의 개념으로 마블 유니버스, 메타버스 등의 개념을 낳았다) 이론에 빠져 있었는데 배달 라이더라는 익숙한 소재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었죠.”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시각 디자인과 사진을 공부했고, 다양한 매체를 실험해온 아티스트 김아영에게 철학과 문학은 가장 꾸준한 모티브다. 몇 년 전까지는 미래의 인간상과 초자연적이고 비일상적인 세계를 깊숙이 탐구하는 사변 소설에 탐닉했다. 이란 철학자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이야기처럼. “사변 소설이 지닌 미학적이고 사회적인 힘에 매료돼 있었어요. 모든 변화는 뭔가를 상상하는 데서 시작되잖아요.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낯설게 보여주는 작업을 하고 싶었죠.” 미학적이고 사회적인 힘. 상반된 힘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때로는 작품의 메시지에 조금 더 몰두하기도 했다. 김아영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포토몽타주 연작 ‘이페메랄 이페메라’(2007~2009)는 신문이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스펙터클을 거부하고, 신문이 보도한 내용을 해체하고 가공한 작품이다. 뒤이어 탄생한 ‘PH 익스프레스’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시리즈는 석유 정치학과 제국주의, 자본과 정보의 이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더욱 방대한 자료를 끌어들였다. “19세기 문헌과 타블로이드 신문, 외교 문서를 징그러울 정도로 들여다봤어요. 결과적으로 리서치 기반의 작업이었던 거죠. 문득 아티스트로서 그런 방식을 굳이 더 이어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료 조사에만 몰두하는 건 결국 진정성 싸움밖에는 되지 않잖아요. 예술에는 미학적 성취도 분명 필요하죠.” 그 후 선보인 작업은 한결 ‘아름다워졌다’. 영상, 텍스트, 디지털 프린트,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을 실험한 끝에 영상으로 회귀한 그는 몽골에서 받은 초지구적 인상을 비주얼로 구현한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과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2019), ‘페트로제너시스, 페트라 제너트릭스’(2019)를 줄줄이 탄생시켰다. 온갖 수중 생물로 가득한 바닷속 세계를 형상화한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2020)와 형광빛 야경이 아시아 퓨처리즘의 분위기를 풍기는 ‘딜리버리 댄서의 구’ 장면은 그 안에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물고 싶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아름답고 유의미한 공감각적 세계. 김아영은 오랫동안 이 목표를 위해 가상과 현실을 봉합해온 것이었다.

그리고 다양한 화법을 실험하며 김아영은 과감하게 세계관을 확장해갔다. 기후변화와 자원 고갈 사태 이후 거대한 바이오매스 타운이 형성된 가상의 부산을 배경으로 삼은 ‘수리솔 수중 연구소에서’를 통해 연구원 소하일라에게 자신을 대입하던 관객은 그 후 제작된 VR 경험 ‘수리솔: POVCR’(2021)에서는 작품 속을 직접 탐방했다. 지난해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STRP 페스티벌에서 김아영은 아예 수리솔 연구소의 가이드로 변신해 관객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VR챗 렉처 퍼포먼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아요.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각각의 영상, 설치 작품, VR 경험, VR챗 퍼포먼스는 더 큰 세계가 존재하도록 돕는 소중한 일부죠.” 학문적 관심과 자료 조사를 기반으로 가상 세계를 더욱 단단하고 정교하게 구성하는 일과 몰입감 높은 비주얼을 구현해내는 작업 사이에서 김아영은 결국 완벽한 균형점을 찾아냈다. “시대정신을 얼마나 탁월한 방식으로 담아내는가, 형식과 내용이 얼마나 긴밀하게 조응하는가. 현대미술의 가치는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김아영과의 대화는 문학, 철학, 과학, 기술, 예술을 아우르며 역동적으로 범람하기 일쑤였다. 가능 세계, 사변적 픽션, 토착 미래주의 등의 철학적 담론부터 웹툰과 웹소설, 시리어스 게임과 NFT, 챗GPT에 이르는 신기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까지. 그러나 그는 결코 기술의 힘을 맹신하지 않는다. “새로운 경험이 선사하는 황홀경에서 비롯된 쾌감은 오래가지 않아요. 미디어 아트 역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죠. 관객에게 유의미한 잔상을 남기려면 정말 깊이 사고함으로써 심연에 있는 걸 건드려야 해요.”


최근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와 유럽에서 가장 큰 다큐멘터리 영화제 CPH:DOX, 트랜스미디알레와 샤르자 비엔날레 등에 초대받은 김아영은 현재 영화계와 미술계의 경계에 서 있다. “늘 경계에 있는 사람 같아요. 거기에 있는 불순물을 즐겁게 실험하며 조금씩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거죠.” 김아영은 점점 더 많은 것이 혼재되는 세상에 꼭 필요한 관찰자가 아닐까. 그는 결국 본질을 찾아낼 테니까. 두 눈을 반짝이며 미래를 상상하는 김아영은 넘치는 호기심으로 여정을 지속하는 게임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은데요? 유닛도 모으고, 레벨 업도 열심히 하고. 미디어 아티스트라는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정말 높거든요. 흥미로운 세상을 오래오래 자유롭게 탐방하고 싶어요.”

Guhong Min 화이트 셔츠는 로로 피아나(Loro Piana), 타이는 폴 스미스(Paul Smith), 팬츠와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진지한 말장난, 민구홍
민구홍의 작품은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를 연상시킨다. 인형 안에 숨겨진 더 작은 인형과 그 안에 숨겨진 훨씬 더 작은 인형을 발견하는 것처럼 그의 작품 속을 탐방하다 보면 헤어 나오기가 결코 쉽지 않으니까. 그에 대해 가장 빠르게 갈피를 잡는 방법은 민구홍의 2015년 작품이자 웹사이트 ‘참고로 민구홍은…(FYI, Min Guhong is…, minguhong.fyi)’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 요약하자면 그는 대학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전공했고, 디자인 전문 출판사 안그라픽스를 거쳐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실용적 조언서 ‘실용 총서’ 시리즈를 기획했다. 패션에도 관심 많은 민구홍은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메리칸 캐주얼의 바이블로 꼽히는 책 <헤비듀티>와 <아메토라>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민구홍의 본진은 1인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이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조금은 미스터리하고 심각하다가 어느 순간 ‘피식’ 웃음이 터지는 작업물을 선보여온 기묘한 회사다. 작가가 자신의 포트폴리오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하게 생각하는 시청각 문서 ‘회사 소개’(2015)는 기묘한 리스트로 빼곡한 회사 운영 방침을 표방한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문서철 정리용 비둘기를 사육하지 않습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비트코인으로 후원금을 모금하지 않습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초등학생 대상 회사 홍보 영상에 모자이크를 삽입하지 않습니다” 등등. 매뉴팩처링(Manufacturing)은 원재료를 가공해 제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을 뜻하는 단어다. 민구홍은 자신의 활동을 제조업에 빗대어 설명하며 “자신의 관심사를 원재료 삼아 회사에서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지, 나아가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궁리하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갤러리 프라이머리 프랙티스에서 최근 열린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개인전 <흥미를 느낄지 모를 누군가에게(To Whom It May Concern)>는 그의 실체가 조금 선명하게 느껴진 계기였다. 민구홍이 얘기했다. “이 전시는 제목처럼 흥미를 느낄지 모르는 누군가를 향한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공지 사항입니다. 어떤 대상을 강조하고 널리 알려 다른 대상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전시를 만드는 일은 책을 만드는 일과 비슷합니다. 이때 편집자는 큐레이터일 테고요. 큐레이터는 작가를 콘텐츠 삼아 이리저리 제어합니다. 제가 편집자로도 일한 만큼 제게는 큐레이터만의 질서가 중요합니다.” 부암동 갤러리에 펼쳐지던 민구홍의 세계관은 그의 웹사이트에 업로드한 텍스트와 영상이 입체적으로 구현된 흥미로운 읽을거리로 가득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세 개의 고정된 액자를 연결한 설치 작품 ‘자주 하는 질문’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지금까지 받은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에 포함된 진부한 문장을 무작위로 뒤섞어 낯선 텍스트를 창조해내고 있었다. 민구홍은 이를 “정해진 판형 없이 스크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열람하게 되는 웹사이트가 판형이 고정된 액자에 둘러싸이면 어떤 모습일지 고민해본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에게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은 꽤 소중한 듯 보였다. 예술 기법으로서 편집을 즐기는 이유를 묻자 그가 답했다. “편집은 넓은 의미에서 어떤 대상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문장을 다듬는 일일 뿐 아니라 아예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기까지 하죠. 지난해 2월 22일부터 안그라픽스의 정체불명 독립 사업부인 안그라픽스 랩(AG 랩)에서 디렉터로 일하고 있어요. AG 랩에서 현재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며 콘텐츠를 디렉팅하는 일에 깊이 관여하지만, 디렉터보다는 편집자라는 직함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많은 역할을 포괄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자신의 예술적 소신에 대해 말하며 그는 직접 번역한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 밥 길의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의 글을 인용했다. “흥미로운 말에는 시시한 그래픽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시한 말에는 흥미로운 그래픽이 필요하다.”


민구홍이 익명의 세상에서 정보를 파편화하는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진 ‘너드’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는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여러 기관과 기업, 브랜드, 특정 개인과 끈끈한 협업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를 통해 흥미로운 방식으로 재탄생한 작품 ‘한국 코카-콜라 귀중’ 역시 그중 하나다. 차곡차곡 쌓인 펩시콜라 캔 더미 위에 얹은 아이패드 화면에는 한국 코카-콜라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메시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국 코카-콜라 관계자들도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협업을 꿈꾸는 다음 대상으로 방탄소년단의 RM을 꼽았다. “작업을 통해 존경과 사랑을 전하고픈 대상은 무궁무진하죠. 하지만 요즘은 ‘RM 귀하’라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랩 몬스터’가 ‘RM’으로 탈바꿈한 까닭과 예술을 향한 ‘몬스터 같은’ 열정의 근원을 묻고, 그의 신념을 ‘리스펙’하는 메시지를 담아내는 거죠.”


올해 계획을 묻는 뻔한 질문에도 그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건네왔다(민구홍은 지극히 단순한 문장으로부터 창의적인 사고를 능숙하게 뻗어내는 예술가였다). “2019년에 어느 호주 생물학자 집단이 DNA를 분석해 발표한 이론에 따르면, 자연적 인간의 평균수명은 본디 38년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인 3월 5일 서른여덟 살 생일을 맞이한 저는 이제 예상 수명에 다다른 셈이에요. 제게 2023년 3월 5일 이후의 시간은 ‘생물학적인’ 덤 혹은 보너스 스테이지처럼 느껴집니다.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도 크게 아쉬움이 없을 만큼요. 이런 마당에 지금까지 그래왔듯 특정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그저 우연과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욕망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Heecheon Kim 메시 톱과 팬츠는 아티스트 소장품.

가장 사적인 의문, 김희천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의 최종 수상자. 눈길 가는 타이틀을 거머쥔 김희천은 반짝 스타라기보다는 2015년부터 지금까지 성실하게 일해온 작업자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후 첫 개인전 <랠리>를 시작으로 다섯 번의 개인전을 선보인 그는 온갖 단체전과 스크리닝,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비엔날레를 위해 바쁘게 세상을 오갔다. 그러다 마주친 팬데믹은 많은 예술가에게 그러했듯 그에게도 변화를 위한 최적의 타이밍이 되었다.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동료 작가 송민정의 말에 깊이 공감했죠. 상상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느낀 무력감에 대한 이야기로 기억해요. 저 역시 쉼 없이 작업하며 두려울 때가 있었어요. 창작에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 세상을 낱낱이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는데 그걸 자각할 때 무척 당혹스럽거든요. 앞만 보고 달리던 저에겐 꼭 필요한 시기였죠.”


지극히 개인적인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티스트이기에 작업하며 축적되는 그의 피로도는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표작인 21분 22초짜리 단채널 비디오 ‘바벨’(2015)에서 김희천이 시도한 것은 GPS 시계의 데이터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이었다. 몽촌토성,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등 데이터로 살아생전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하며 그는 아버지와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이처럼 김희천은 영상, 설치 작업, 페이스 스왑(얼굴 바꾸기) 모바일 앱이나 VR, 구글 어스 등의 디지털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적 경험을 직시한다. 보편화된 디지털 세계가 어느새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였기 때문에 가능해진 작업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Soulseek/Pegging/Air-twerking’(2015), ‘랠리’(2015), ‘썰매’(2016), ‘멈블’(2017), ‘홈’(2017) 등에서 그가 포착한 데이터는 전부 특정 감정을 자극하는 용도로 쓰인다. 카메라가 인식한 얼굴과 거울에 비친 얼굴 간의 차이에서 가중되는 혼란을 다룬 싱글 채널 비디오 ‘탱크’(2019)와 ‘다섯 명의 저택 관리인’이라는 가상 소설을 쓰는 과정을 타임 랩스 영상으로 기록하는 브이로그 형식의 ‘다섯명의 저택관리인 쓰기’(2020)를 김희천의 대표작으로 꼽은 에르메스 재단은 그의 작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희천의 작업은 일상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디지털이 지배하는 이 시대의 가장 도전적이고 시급한 질문, 즉 인간의 육체, 감정, 기억, 상상, 결국에는 자아 인식을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현실과 가상, 희망과 불확실성, 쾌락과 위험 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우리의 존재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기념전은 2024년 펼쳐진다. 그보다 먼저 5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단체 전시 <게임사회>를 통해 김희천의 최신작을 만날 수 있다. “오늘날 게임의 문법과 미학이 동시대 예술과 시각 문화,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을 짚는 전시예요. ‘유니티’라는 게임 엔진을 사용해 영상을 만들고 있어요. 유니티는 게임을 만드는 일종의 엔진인데, 관객이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는 작업을 만들고 있어요.”

작업과 별개로 인공지능, 챗GPT 같은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대해 물었을 때 김희천은 그보다는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DALL·E 2’를 언급했다. “여기에 시도한 기술은 물론이고 DALL·E의 존재가 눈 깜짝할 새 화제가 된 현상도 좀 신기해요. 특정 사회상을 비추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흥미롭게도 그가 가장 즐겨 보는 콘텐츠는 유튜브 채널 ‘윤숙희 YunSuki 혼술하는여자’라고 했다. “틀어놓고 멍하니 보는 유튜브 채널인데, 무슨 재미로 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어요(웃음). 아주 군침 도는 ‘먹방’도 아니고, 유명 맛집 정보가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볼 때는 그저 그랬던 제육볶음이 느닷없이 먹고 싶어지기도 하죠.” 김희천의 영감은 언제나 지극히 편안한 일상으로부터 비롯된다. 타인과 나누는 대화 역시 그에겐 흥미로운 영감이다. “이게 무슨 조합인가 싶은 사람들과 만나는 걸 좋아해요. 최근에는 갑자기 주변 소설가와 화가들을 한데 모아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에 의외의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죠. 밤늦게까지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갔어요.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평소 어떤 행위를 즐길까, 항상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요.” 아직 공개할 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그는 평소 좋아하던 배우와도 뭔가를 함께 만들고 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남주혁 씨의 선배 기자로 등장한 이찬종이라는 배우의 눈빛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인맥이 닿은 지인이 있어 소개를 받았죠. 현실적인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인데 그와 함께 선보일 작업이 정말 기대가 됩니다.”


영상은 김희천의 주특기지만 그는 여기에 필요 이상으로 의존하는 것은 경계한다. 심지어 그는 한동안 일부러 영상을 멀리하기도 했다.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에서 그는 의자를 만들었고, 백남준 탄생 9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열린 2인전 <필드 기억>에서는 이옥경 작가와 함께 만든 사운드 작업을 선보였다. “늘 해오던 것 말고, 새로운 방식으로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미디어 아티스트의 정체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자양분을 공급하는 김희천의 세상은 여전히 싱그러운 녹색이다.

Yiyun Kang 화이트 재킷은 토즈(Tod’s), 슈즈는 세르지오 로시(Sergio Rossi), 셔츠와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키고 싶은 세상, 강이연
강이연의 시간은 언제나 여섯 가지 버전으로 설정되어 있다. 런던, 제네바,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리야드 그리고 서울.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객원교수 생활을 마무리 짓고, 지난해 12월부터 카이스트에서 산업디자인학과 조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의 시간은 현재 대전에 머물고 있다. 세계적인 브랜드의 커미션 작업과 국경을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지속해온 그가 생각보다 길게 고국에 머물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제 주특기는 프로젝션 매핑(영상을 빛으로 투사해 현실의 사물이 다른 성격을 띠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술)이에요. 사실 그렇게 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예술은 아니죠. 새로운 영감이 필요했어요. 필드에 있는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요즘 무엇에 몰두하고, 어떤 새로운 기술과 예술이 각광받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제 역할은 그것들을 연구하고 해석해 예술적으로 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누군가에게는 이미 고리타분한 개념인 ‘융복합’을 근사하게 실천하는 것이죠.”

강이연의 굵직한 포트폴리오를 ‘최신순’으로 정렬했을 때 가장 상단에 떠오를 작업은 다쏘시스템이 기획한 ‘오직 사람이 만들어 나간다(The Only Progress is Human)’ 캠페인의 일환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꾸며 작업한 3D 비디오 매핑 영상일 것이다. 방탄소년단, 막스마라, BMW와의 협업에 이어 DDP를 통해 선보인 강이연의 네 번째 프로젝트다. “다쏘시스템은 건축, 디자인, 미술계에서 자주 눈에 띄는 프랑스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이에요. 세계적인 건축물을 다쏘시스템의 3D 제작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죠. 자하 하디드와 프랭크 게리의 유려한 곡선 디자인이 돋보이는 건축물처럼요. 아티스트는 기본적으로 상상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의 근사한 아이디어가 실현되려면 그걸 구현할 수 있는 기술도 함께 개발되어야 해요.”

방대한 크기의 3D 작업을 자주 선보이는 강이연은 많을 때는 현장에서 30~40명의 팀원과 함께 움직인다. 기술, 사운드, 조명 등 각자의 영역에서 지혜와 심미안을 장착한 작업자들끼리 물 흐르듯 소통이 원활할 때, 가장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고 믿는다. 믿음직한 동료들과 함께 강이연은 그동안 영국 V&A와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를 통해 작업을 선보였으며, 2020년에는 국적, 장르, 세대가 전부 다른 현대미술 작가 22인이 방탄소년단과 협업한 글로벌 현대미술 프로젝트 <Connect, BTS>에 국내 아티스트로는 유일하게 참여했다. 방탄소년단의 안무를 모티브로 제작한 프로젝션 매핑 작업 ‘비욘드 더 신(Beyond the Scene)’은 아이돌의 페르소나와 정체성, 아이돌과 팬덤의 관계를 조명했다. 2021년 PKM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앤트로포즈(Anthropause)>는 그에겐 무척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점점 증가해온 탄소 배출량에 따라 영상이 움직이는 ‘무한’이란 작품과 제한적인 자원이 고갈되어가는 역사를 영상, 사운드 작업으로 선보인 ‘유한’을 병치해 보여주며, 그는 팬데믹이 촉발한 ‘생산적 멈춤’ 시기가 인류의 또 다른 시작점이 되길 바라는 염원을 그려냈다. “아무리 거대한 작품이라도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단어에서 시작됩니다. 그 후 리서치를 거듭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로 저만의 마인드맵을 그리고, 그렇게 세계관이 완성되죠. 아티스트가 어떤 이야기를 꽤 진지하고 일관되게 해나가려면 자기만의 논리와 세계관이 확고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난해 강이연은 미디어 전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하여>를 통해 지금 이 순간, 또 한 번의 대멸종이 진행 중이라고 상정하고, 자신이 지키고 싶은 세상을 가로 81m, 세로 20m 크기의 삼성동 무역센터 벽면에 수놓았다. 그간 자연물을 주요 소재로 활용하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것이었다. “요즘은 지구의 ‘물’ 데이터에 관심이 많아요. 구글과 함께 이를 모티브로 만드는 작업도 있죠. 지난해 한국인들이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 1위가 무엇인지 아세요? 기후변화예요. 아이슬란드 환경 운동가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의 <시간과 물에 대하여>는 2020년, 팬데믹 시기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었어요. 자신의 할아버지와 손자에 이르기까지 몇 대를 거치는 동안 가족의 삶의 터전인 아이슬란드에서 얼마나 많은 양의 얼음이 녹았고, 그러면서 가족의 삶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보여주는 책이죠. 저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예술로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단지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데이터와 지식, 과학기술적 근거를 바탕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 마그나손과 다른 지점이죠.” 디지털로 창조할 수 있는 세계는 언뜻 제한이 없어 보인다. 그가 만들고 싶은 또 다른 세상에 대해 묻자 그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그 견고한 건축물이 어쩌다 붕괴됐는지, 그 후 인간의 언어와 지성이 소멸되었는데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요. 그런 공간이 현대에 복원된다면 어떤 형태일지 궁금해요.” 강이연의 상상 중 많은 것이 빠르게 현실이 되어간다. 그는 어린이날 세종시에 개관하는 최초의 국립어린이박물관과 시카고에 건립될 아이코닉한 건물을 위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예거 르쿨트르의 ‘올해의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사람’ 중 한 명으로도 선정된 강이연은 스위스 본사를 오가며 시간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게 된다.

그가 가장 여유로워지는 시간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유튜브 채널 ‘안될과학’을 들여다볼 때다. 그러다가 가끔 강아지 유튜브 영상에서 한참을 머물곤 한다.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건 별게 아니거든요. 신기술과 신세계를 열심히 탐구하는 예술가 역시 그런 즐거움을 간과해서는 안 돼요. 예술도 결국은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하니까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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