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파서
목이 메어서 안간힘을 써봐도, 가슴을 해방할 수 없네.
구찌 2023 F/W 컬렉션에 ‘GG’ 로고로 유두만 가린 정도 크기의 브라가 등장했다. 구찌뿐 아니라 여러 브랜드가 일명 마이크로 브라를 선보였다. 유두만 겨우 가렸다기보다는 유두를 크리스털과 꽃, 실크로 장식했다는 표현이 맞다. 패션계가 가슴에 헌사하는 액세서리랄까. 이전에도 있었다. 샤넬 1996 S/S 컬렉션에서 유두 자리에 로고를 수놓은 마이크로 브라, 샤넬 1997 F/W에서 케이트 모스가 브라운 재킷 안에 입은 황금색 꽃 장식의 마이크로 브라가 기억난다. 이 앙증맞은 브라 역시 1990년대로 귀환하는 움직임의 하나인 셈이다. 언더붑 이후 네티즌 설전을 불러올 만한데 국내 스타들이 시도하지 않아서인지 조용한 편이다. 화사의 노브라 티셔츠와 제니의 언더붑에 쏟아진 과도한 참견을 생각하면 이해한다. 당시 댓글은 성희롱부터 아이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간섭까지 호들갑 풍년이었다. 2005년, 미국 정치 운동 단체 ‘브레스츠 낫 봄스(Breasts
Not Bombs, 가슴은 폭탄이 아니다)’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토플리스 시위를 벌였다. 캘리포니아주가 그들을 체포한 명분은 “어린이를 보호해야 해서, 교통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어서”였다.
배우 플로렌스 퓨는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성토했다. “대체 왜 그렇게 가슴에 겁먹은 거야?” 때는 발렌티노 2022 F/W 오뜨 꾸뛰르 컬렉션. 그녀가 입은 시스루 드레스는 가슴(퓨의 표현으로는 귀여운 유두)을 드러냈다. 이내 “가슴이 작네, 예쁘지도 않은데 왜 굳이 드러내?” 같은 폭탄 평가가 터졌다. 퓨는 인간을, 여성을, 몸을 존중하라는 말과 함께 해시태그를 단다. #fuckingfreethefuckingnipple 이는 ‘가슴을 허하라’는 뜻의 여성 운동 프리더니플(#Freethenipple)에 퓨의 ‘F’ 분노가 가미된 형태다. 프리더니플은 2012년 리나 에스코(Lina Esco) 감독이 촬영했지만 상영관 확보가 힘들어 2014년 미국에서 개봉한 동명의 다큐멘터리에서 기인했다. 이 작품은 뉴욕 여성들이 가슴에 들이대는 성적인 잣대에 저항하는 과정을 게릴라처럼 촬영했다. 리한나, 레나 던햄, 윌로우 스미스, 카라 델레바인 등이 #freethenipple을 공유했다. 이 운동에는 몇 가지 문제점도 제기됐다. 시스젠더(생물학적 성과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 백인 여성 위주이며, 예쁜 가슴만 드러낼 수 있다는 이미지를 확산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가슴은 검열 대상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는 여성의 유두가 보이는 사진을 삭제한다. 마리오 소렌티가 촬영한 리한나의 누드 이미지가 인스타그램에서 삭제되자 그녀는 계정을 탈퇴했고, 배우 스카우트 윌리스는 누드 사진이 그려진 재킷을 입고 찍은 사진을 검열하자 토플리스로 뉴욕 거리를 활보했다. 그리고 트위터에 이렇게 올렸다. “인스타그램은 유두 사진, 유방암 환자의 가슴 사진, 모유 수유 사진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 몸과 나의 편안함을 다른 사람이 결정해선 안 된다.” 2015년 예술가 미콜 헤브론(Micol Hebron)은 여성의 유두 사진에 남성 유두를 포토샵해서 덮어씌워 SNS에 올렸다. SNS 검열 시스템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이렇게 하면 검열하지 않았다. 그녀는 유두 검열 시스템이 결국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를 통제하고 억압한다고 말했다. 최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모회사인 메타 초청으로 일명 ‘유두 회의’에 합류한 헤브론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 회의에 트랜스젠더는 참석하지 않았고, 심지어 성 중립적인 화장실도 없었다.”
메타는 억지로라도 변화해야 할 것이다. 지난 1월 콘텐츠 조정 기구인 감독위원회(Oversight Board)는 메타가 삭제한 ‘가슴’ 게시물의 복원을 결정했다. 사건의 발단은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미국인 커플의 항의. 두 사람은 상의를 벗은 채 젖꼭지를 가린 사진에 트랜스젠더의 건강과 가슴 수술을 위한 기금 마련 링크를 달아 업로드했는데 시스템이 이 사진을 매춘을 유도하는 게시물로 감지해 삭제했던 것이다. ‘안전 필터’가 LGBTQ 작품까지 검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텀블러 역시 지난해 유두는 물론 나체 사진을 허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불꽃페미액션이 페이스북 코리아 앞에서 상의 탈의 시위를 했다. 저항의 의미로 가슴을 드러낸 ‘찌찌해방 퍼포먼스’ 사진이 페이스북에서 삭제됐기 때문이다. 경찰관들은 시위자들의 몸을 이불로 가리느라 바빴다. 그들의 저항은 옴니버스 <불꽃페미액션 몸의 해방>에 담겨 2021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영화에서 여성들이 상의를 벗고 가슴을 출렁이며 농구 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시원했다. 나도 가슴을 드러내고 농구 할 수 있을까? 지난여름 니스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일광욕하던 여성이 생각난다. 나도 바닷물에 젖은 비키니를 벗고 가슴을 햇빛에 말리고 싶었다. ‘언젠가는’이라고 다짐했을 뿐.
엄마가 사준 주니어 A컵 이후 30대가 되어서야 난 옷 속의 브라를 벗는 ‘노브라’에 합류했다. 편해서 다시 입기 싫었다. 초기엔 긴 머리를 가슴 쪽으로 내려 가렸지만 지금은 그냥 다닌다. 고향 갈 때나 어르신 뵐 때는 브라를 입는다.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아서다. 그런 내가 유두를 드러내고 해변에 누울 수 있을까. 올해 베를린의 어느 수영장에서 여성이 비키니 팬티만 입고 수영하다 체포됐다. 그녀는 “여성에게 남성과 다른 옷차림을 요구하는 건 차별”이라며 시 산하의 평등 사무소에 항의했다. 이제 그 수영장에선 남녀 모두 상의를 벗을 수 있다. 90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뉴저지주에서 윗옷을 벗고 수영한 남성 42명이 벌금을 물었다. 남자들은 ‘노 셔츠 운동’을 펼쳤고 권리를 획득했다. 여성은 2023년 베를린의 수영장에서나 겨우 허락됐다.
여성은 자기 가슴을 두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세상에 희생됐고 싸워왔다. 우리의 선구자는 오는 9월까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여는 故 정강자 작가다. 그녀는 1968년 한국 최초의 누드 퍼포먼스를 펼쳤다. 정강자의 벗은 상반신에 관객이 투명 풍선을 붙인 후 터트리는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작품이었다. 예술과 일상(몸)의 경계를 허물자는 이 퍼포먼스의 의도가 매도됐음은 뻔하다. 자넷 잭슨이 슈퍼볼에서 가슴이 노출되면서 벌금은 물론 활동까지 어려워진 사건도 생생하다. 하지만 여성들은 원래 자기 것을 찾으려 쉬지 않는다. 앞서 말한 우리나라의 불꽃페미액션, 해변과 마라톤 대회에서 윗옷을 벗어서 감옥에 간 토플리스 운동의 큰언니 피닉스 필리(Phoenix Feeley), 세계 전역의 가슴 해방 운동 단체들.
지난 3월에는 뉴욕에서 ‘누드 식사’가 열렸다. ‘더 푸드 익스피리언스(The Füde Experience)’라는 이름으로 88달러의 식사비를 내고 나체로 명상과 체조를 한 뒤 채식 코스를 즐기는 행사였다. 이를 주최한 아티스트 찰리 앤 맥스(Charlie Ann Max)는 “순수한 우리를 축하하는 자유로운 공간”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참석한 여성의 말이 인상적이다. “내 몸과 다시 연결되고 싶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 가슴을 되찾고 싶다. 겁 많은 세상이 가져가게 둘 수 없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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