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뮤즈가 기억하는 칼 라거펠트, ‘나의’ 영원한 천재
칼 라거펠트의 ‘제2의 눈’, 샤넬의 진정한 뮤즈, 아만다 할레치(Amanda Harlech). 1996년부터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로 오랜 시간 거장과 함께 일했던 아만다 할레치의 기억. 영원한 천재 ‘칼 라거펠트’ 그리고 사적인 ‘칼’에 대하여.
시간은 때때로 강처럼 흐르고 어떤 흔적은 더 선명해진다. 칼 라거펠트와의 기억이 그렇다. 까다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다이어트 콜라 잔을 들고 있던 모습, 허공에 대고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어떤 음악이나 책에 대해 “아주 좋아요!”라고 감탄하던 어조…. 세월에 따라 모습은 저마다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변치 않는 것도 있다. 칼 라거펠트를 처음 만난 순간이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중반, 패션 위크 기간에 열린 악명 높은 파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가 관심 있게 지켜보던 떠오르는 스타들이 모두 모였다. 존 갈리아노와 그의 팀원을 비롯해 나도 그 자리에 초대받았다. 그 당시 나는 갈리아노의 스타일리스트이자 공동 작업자로 일하고 있었다. 유니베시테 51번가 ‘포조 디 보르고 호텔’, 태피스트리로 화려하게 장식된 그의 방에서 우린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다이아몬드 패널 장식 덕에 스테인드글라스 느낌이 나는 바이어스 컷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방 건너편에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칼 라거펠트였다. 그는 원형 테이블 옆 루이 15세풍 우아한 의자에 앉아 까맣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나를 꿰뚫어 보듯 시선을 고정했다.
파티 참석자들은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방이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것 같았다. 그의 부채질에 사람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했고, 촛불이 켜진 샹들리에 밑, 이끼처럼 두꺼운 오뷔송 카펫 위에서 사람들은 춤을 추었다.
그가 우리를 부른 것일까? 아니면 자석에 이끌리듯 샴페인 잔을 높이 든 채 춤추는 사람들을 헤집고 저절로 그에게 향한 것이었을까. 기억은 확실치 않다. 그는 권력의 절정에 있는 황제처럼 보였다. 마주친 모든 이의 잠재력을 꿰뚫어 보며 저릿하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얼마 후 내가 이혼과 복잡한 계약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칼은 벨벳처럼 부드럽고 정중하며 교양 있고 관대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당신을 돕고 싶어요”라고.
1996년 나는 샤넬과 계약했고, 그해 1월 1997년 봄 꾸뛰르 작업에 투입됐다. 합류 후 칼이 처음 지시한 업무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뮤즈 이름을 팩스로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칼리오페(Calliope, 서사시), 클리오(Clio, 역사), 에우테르페(Euterpe, 음악), 탈리아(Thalia, 희극과 목가시), 멜포메네(Melpomene, 비극),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 무용), 에라토(Erato, 연애시와 서정시), 폴리힘니아(Polyhymnia, 성시), 우라니아(Urania, 천문학)까지 총 아홉 명의 이름을 적어 보냈다.
뒤늦게 이것이 리츠에서 선보인 컬렉션의 ‘비밀 메시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33번, 34번, 35번 룩에 등장한 고대 도자기와 같은 검은 시퀸과 레이스, 적갈색 튤 자수로 탄생한 세 가지 뮤즈 드레스가 바로 그것이었다.
존 갈리아노, 칼 라거펠트와 일하는 것은 불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신념을 따르는 일이었다. 존은 내러티브에 기반한 감성적인 작업을 추구했고, 천을 감각적으로 탐구했다. 칼은 역사와 문화적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디자인에 변화를 추구했고, 장인의 기술에서도 혁신을 끌어냈다. 가끔 레퍼런스가 옷의 구조나 특정 도자기 꽃에 깃들어 한눈에 알아채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칼 라거펠트는 엄청난 속도로 많은 컬렉션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는 패션에 대한 지식, 즉 원단과 기술, 컬렉션에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대한 총체적 감각이 있었기에 F1 카 레이서처럼 민첩하게 결정을 내렸다. 그가 패브릭 견본이나 자수 기법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라웠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칼 라거펠트가 자주 말했듯, 그곳엔 ‘다른 선택지’란 없었다.
‘레디 투 웨어’ 작업을 시작한 1997 가을, 샤넬 스튜디오에서 보낸 첫날은 꽤 힘들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말 농장에서 재단사들을 위해 머리띠를 만드는 마담 푸지외(Madame Pouzieux)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소녀는 단추를, 또 누군가는 동백꽃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빅투아르 드 카스텔란(Victoire de Castellane)은 칼 라거펠트와 주얼리를 디자인했고, 질 뒤푸르(Gilles Dufour)는 스튜디오의 총책임자였다.
모든 것이 하나의 의식처럼 우아했고, 엄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본능적으로 존 갈리아노와 일할 때 했을 법한 것들을 했다. 1920년대에 제작된 웨딩드레스를 칼에게 보내거나 영감을 줄 수 있는 이미지 스크랩북을 만들어주는 식이었다. 칼은 나에게 그만하라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점차 그의 머릿속에 모든 아이디어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쇼가 열리기 몇 주 전까지 컬렉션을 자세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표현했듯 내 역할은 컬렉션의 역동성, 균형, 비율이 잘 어우러지는지를 체크하는 ‘외부의 눈’이 되는 것이었다.
칼이 품은 무언의 기대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존과 일할 때의 나는 스케치와 여러 이미지, 원단의 견본, 은방울꽃을 꼬아 만든 화환이 놓인 그의 작업실 테이블에 서로 기대앉아 이야기하곤 했다. 겉모습보다 내면을 더 중시하는 분위기였고, 자존심은 아이디어 교환에 방해꾼으로 여겼다.
샤넬에서도 재킷의 다양한 연출법을 보여주기 위해 재킷을 몸에 걸치거나 거꾸로 뒤집어 입는 등 일어서서 온갖 종류의 선을 넘나들었다. 그때 공포스러운 프리미에르(주 재봉사)의 얼굴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피팅 모델을 대상으로 작업 중인 옷은 주 재봉사나 부 재봉사 외에 누구도 만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지점이 바로 칼 라거펠트가 나를 선택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인 가능성을 열고 싶어 했다.
샤넬 N°5 향이 방 안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숨 막힐 듯한 어느 날이었다. 긴 테이블에 샤넬 재단사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뒤에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이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마드모아젤’이라고 적힌 문밖으로 걸어 나가며 나에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방에 들어가서 이 컬렉션 제작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당장 나가라고 말해줘요. 아니면 내가 나가겠어요.”
그가 쇳소리를 내며 말했고,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마주했다. 꼭 처형대 위의 사람들 같았다. 내가 어떻게, 누구에게 나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신참이었고,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어설픈 프랑스어로 최선을 다해 그가 시키는 대로 말했고, 놀랍게도 방은 비워졌다.
이는 칼 라거펠트가 샤넬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는 샤넬을 다시 조율하고 새롭게 정의하고자 했다. 기존에 거둔 성공에 얽매이지 않고, 곡선형 숄더부터 더블 재킷, 드레스 겸용 재킷에 이르기까지 재킷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젠(Zen) 컬렉션을 통해 헴라인을 발목 높이까지 떨어뜨린 후 플랫 샌들과 매치하기도 했고, 예술가 이부 푸알란(Ibu Poilâne)과 새로운 샤넬 체인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런웨이를 컬렉션 디자인을 위한 하나의 트리거로 활용하고자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칼의 상상 속 거대한 체인, 상징적인 사자와 정원, 안개로 뒤덮인 에펠탑, 우주 로켓 모두 그랑 팔레의 무대로 옮겨져 잊지 못할 순간을 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은 수많은 컬렉션을 마주하는 편집자와 저널리스트에게 즉각적이고도 영원히 뇌리에 남을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를 통해 크루즈 컬렉션을 비롯해 샤넬 정통 아틀리에의 미학을 보여주는 공방 컬렉션(Métiers d’Art)을 선보이겠다는 칼의 아이디어에도 힘이 실렸다.
일련의 쇼는 패브릭과 액세서리에 다양한 레퍼런스를 엮어, 과거와 미래의 문화적 충돌을 콜라주하는 방식으로 하우스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든버러(Paris-Edinburgh) 쇼’를 잊을 순 없을 것이다. 비운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Mary)가 태어난 린리스고 궁전(Linlithgow Palace)의 회랑을 모델들이 워킹하는 가운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그날, 남성적인 트위드의 보이시한 매력과 애절한 로맨스가 어우러지던 쇼를 말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칼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녹여낸 ‘파리-함부르크(Paris-Hamburg) 쇼’도 결코.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을 쇼는? ‘페이퍼 컬렉션’이라고도 알려진, 금융 위기 이후 열린 2009년 봄 꾸뛰르 컬렉션이다. 여러 럭셔리 하우스가 재정 상황을 염려하며 쇼의 규모를 축소했지만, 샤넬 패션 부문 회장 브루노 파블로브스키(Bruno Pavlovsky)의 전폭적인 신뢰를 업은 칼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거대한 종이꽃, 장미와 까멜리아 장식으로 가득 찬 흰 공간에서 칼의 그녀들은 종이 티아라를 쓰고 계단을 내려왔다. “이 모든 것은 새하얀 종이 한 장에서 시작됐습니다”라고 말한 칼은 자신의 스케치에 대해 ‘무척 단순하지만, 창의적인 하나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비용은 전혀 들지 않지만, 그 가치는 매길 수 없다는 말을 덧붙여서. 화려한 디테일과 숙련된 솜씨가 엿보이는 동시에, 겨울이 끝난 뒤 피어나는 봄의 새싹처럼 신선한 감각을 보여준 칼은 컬렉션을 통해 그 어떤 어려움도 능력과 혁신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5월 5일부터 16일까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릴 <칼 라거펠트: 라인 오브 뷰티> 전시는 그가 샤넬, 펜디, 끌로에, 발망, 파투 그리고 동명의 브랜드 칼 라거펠트에 재직하며 선보인 디자인을 살펴보고 기념하기 위한 자리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디자인한 세트 위에서, 큐레이터 앤드류 볼튼(Andrew Bolton)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garth)가 발표한 “구불구불한 곡선은 삶을 상징하고, 직선은 정체를 상징한다”는 미학 이론인 ‘미에 대한 분석(A Line of Beauty)’에 근거해 칼의 디자인을 살피게 될 것이다. 앤드류 볼튼은 칼의 창조적 정신 세계를 해부해 그의 무수한 감정적, 창조적 흐름이 에너지로 고동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때론 획일적이고, 모던하고, 남성적이고, 로맨틱하고, 역사적이고, 장식적인 에너지 말이다. 칼의 천재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그가 컬렉션의 구심점으로 삼은 스케치. 앤드류 볼튼은 샤넬, 펜디, 끌로에, 칼 라거펠트에서 칼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던 주 재봉사들을 촬영한 영상을 통해 그들이 칼의 정교한 스케치를 어떻게 세세하고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었는지 공개할 예정이다.
칼 라거펠트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칼의 오른팔이었고, 지금은 샤넬을 이끄는 버지니 비아르는 모델이 피팅을 위해 칼의 앞에 설 때마다 각 스케치를 원단 샘플, 칼이 직접 남긴 메모와 함께 놓아두곤 했다. 칼은 거의 일어서는 법이 없었다. 모델들은 그가 모든 디테일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우면서도 전체적인 비율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서 있었고, 주 재봉사들은 칼의 눈이 스케치에서 옷으로 옮겨갈 때마다 숨을 죽여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스케치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은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는 해당 피스를 총괄한 주 재봉사에게 “정말 죄송하지만…”이란 말과 함께 비율이 어긋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포켓의 위치가 1mm 어긋났어요”라고 말하고는 포켓을 뜯어 제대로 된 위치에 고정한 뒤 “보셨죠? 죄송하지만, 내 말이 맞아요. 단 1mm 차이로 모든 게 어긋날 수 있거든요”라고 덧붙였다. 칼은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스케치를 현실로 구현할 때는 항상 완벽을 추구했다.
칼은 주위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모두 빨아들이는 스펀지 같은 존재였다. 그가 1년에 10개가 넘는 컬렉션을 선보이고, 캠페인 이미지를 직접 촬영하고, 건축 프로젝트와 영화 제작을 담당하고 각종 전시회를 종횡무진하는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항상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팀원들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 책에서 저 책으로, 펜디와 샤넬, 칼 라거펠트 사이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파리 생제르맹에 있는 한 카페에서 그가 나에게 프랑크푸르터 소시지를 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던 순간이 떠오른다. 먹어본 적 없다고 하자, 그는 프랑크푸르터 소시지 하나를 주문했다. 내가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자마자, 그는 갑작스럽게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릴케의 시는 왜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특히 어려울까요?“, “가장 좋아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뭐죠?”라고 말이다. 그의 머릿속은 광활한 우주와 같았다.
펜디 자매들은 칼의 새로운 것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새로운 것’을 본인만의 반문화적, 역사적 시선을 갖고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점 또한. 그는 종종 로마에서 피팅을 마치거나 밀라노에서 쇼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자신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창의적인 상상을 어떻게 완벽하게 분리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여러 브랜드를 이끌던 칼은 그 어떤 하우스에서도 자기 복제를 하지 않았다. 그가 로마에서는 도시의 고대 유적과 드넓은 하늘을 느끼고, 파리에서는 우아하고 정제된 비율과 색감의 그레이와 차콜을 느낀 것처럼, 그는 하우스마다 각기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었다. 펜디 자매들은 독보적인 장인의 솜씨가 그대로 느껴지는 작업물을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곤 했다. 모피로 바뀐 모헤어, 새틴처럼 느껴지는 질감의 가죽 같은 것들이다. 펜디에서의 피팅 세션은 활기 넘치며 웃음소리로 가득한 ‘날것’이었고, 칼이 펜디에서 선보인 컬렉션은 반항적이고 숨 막힐 듯 근사했다. 칼은 본능적이고 관능적인 방식으로 로마를 사랑했다. 그가 로마에서 가장 사랑하던 레스토랑 ‘달 볼로녜세(Dal Bolognese)에서 토마토를 한 입 베어 물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토마토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지금까지 먹어본 토마토 중 가장 달콤하다”고 선언하듯 외쳤다.
주변을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넘치는 에너지를 지녔던 칼은 단 한 가지, 지루함만은 견디지 못했다. 그는 100m 떨어진 누군가가 지루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우리가 생트로페에서 보낸 어느 여름밤, 칼은 나를 포함한 그의 모델 친구 몇 명과 함께 나이트클럽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자정 직전에 오픈카 벤틀리를 타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으며 생트로페를 질주했다. 하얀 청바지와 다이아몬드로 치장하고 생트로페의 항구를 걷는 칼은 프랑스를 대표하던 사교계 인사이자 그의 뮤즈이기도 했던 ‘자크 드 바셰르(Jacques de Bascher)’, 그의 친구였던 일러스트레이터 ‘안토니오 로페스(Antonio Lopez)’와 함께 보낸 시간을 그리워하는 듯했다. 나이트클럽은 시끄러웠고, 우리는 모두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모델들은 모두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칼은 테이블 맨 끝에서 모델 밥티스트 지아비코니(Baptiste Giabiconi)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귀가 떨어질 듯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를 배경 삼아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칼의 별장에 머물던 나는 다음 날 아침, 방문 밑에 칼이 놓고 간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안에는 그가 전날 클럽에서 찍은 내 사진이 들어 있었고, 사진에는 “지루해 보이는군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후 나는 다시는 칼 앞에서 지루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벽한 여름의 태양을 가리는 구름’이 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함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진 소나무 숲에서 보낸 자신의 유년 시절이 떠올라서일까? 칼은 내가 슈롭셔(Shropshire)의 외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맘에 들어 했다. 그는 18세기 여성 작가에 관한 책, 마담 드 스탈(Madame de Staël), 베스 오브 하드윅(Bess of Hardwick), ‘겨울 여왕’이라고도 불리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Elizabeth Stuart)의 전기는 물론 마네, 모네, 피카소, 놀데,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에 관한 근사한 책을 몇 박스씩 보내주곤 했다. 칼은 그가 ‘나만의 작은 농장’이라고 부르던 <폭풍의 언덕>으로 가득 찬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1년에 한 번쯤, 꼭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곤 했다. 그가 “전용기가 착륙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공항은 어디죠? 보디가드 세바스티앙과 함께 가려고요”라고 전화하면,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열심히 집을 청소했다. 칼은 친구들의 집에 대한 독설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을 전부 불러 모아 함께 흰 앞치마를 두르고, ‘스태프’로 변신해 집을 꾸미고 그를 위해 화려한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예컨대 마당에 놓인 티타임용 테이블을 내 말이 뛰어넘는 그런 퍼포먼스 말이다. 아쉽게도 칼은 한 번도 나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샹파뉴에 새로 매입한 대저택의 사진과 파리 외곽에 자리한 빌라 루브시엔(그가 가장 사랑했던 저택이지만, 그는 여기서도 단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의 사진을 보냈고, 나는 답례로 블룸즈버리의 혼잡함을 담은 사진을 찍어 그에게 보냈을 뿐이다.
칼은 잠을 자지 않고 밤새워 일하며 시간을 ‘뛰어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칼 역시 시간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그는 보디가드 세바스티앙을 제외하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결국 우리 모두 그가 아프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지만, 누구도 그에게 어디가 안 좋은지 물을 수 없었다. 나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칼의 모습이 가슴 아플 정도로 용감해 보였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칼 역시 아무런 ‘힌트’를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 흰 조약돌을 흘리며 지나간 길의 흔적을 남기듯, 그 역시 종종 힌트를 흘리곤 했다.
마지막 꾸뛰르 컬렉션이 된 2019년 봄 컬렉션을 위해 칼은 빌라 루브시엔이나 비센모어의 고향 집에 있을 법한 곡선형 계단이 있는 이탈리아풍 빌라를 배경으로, 수영장이 딸린 완벽한 여름 정원 속에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한곳에 모았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Madame de Pompadour)이 사랑했던 도자기에 꽂힌 꽃, 끌로에 시절 그의 천재성을 처음으로 널리 알린 실크 시폰 드레스, 동명의 브랜드를 널리 알린 정교한 테일러링, 펜디의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깃털 장식까지, 이 컬렉션은 꾸뛰르와 럭셔리에 대한 찬가 그 자체였다.
쇼 전날 아주 늦은 밤, 모델들의 룩을 정하고 난 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어떤 음악이 떠오르는지 물었다. 나는 그가 이번 컬렉션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묻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고, 나는 첫 남자 친구와 유럽을 돌아다니며 비잔틴 양식의 성당을 관광할 때의 가장 로맨틱한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의 우리는 베로나에 있었고, 건물 옥상에서는 이름 모를 바이올리니스트가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칼에게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가 생각나요”라고 말했다.
그는 “아니, 차이콥스키는 너무 뻔하고 로맨틱해요. 나는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가 떠오르는군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곡이었다. 같이 스튜디오를 떠나며, 나는 칼이 많이 지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털썩 주저앉아 그의 시그니처와도 같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는 먼 바닷가에 홀로 서 있는 듯 나를 바라봤다. 다음 날, 칼은 그랑 팔레에서 열린 쇼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눈이 와서 못 간다고 말했다. 그의 커리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난 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와 율리우스 파차크(Julius Patzak)가 함께 부른 ‘대지의 노래’를 들었다. 말러는 딸이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선천적으로 심각한 심장 질환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은 뒤 이 곡을 작곡했다. 말러는 지상의 아름다움과 초월에 대한 통찰이 담긴 중국의 한 고시에서 큰 감명을 받고, 이를 그대로 가져와 가사로 활용했다. 칼은 마지막 꾸뛰르 컬렉션을 통해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영혼 역시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대지와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
내 마음은 고요히 때를 기다리네
사랑하는 대지는 어디에나 있고
봄에는 꽃을 피우고 푸르러지네
저 멀리 지평선도 푸르게 빛나네
영원히, 영원히…
- 사진
- Rafael Pavarotti
- 글
- Amanda Harlech
- 스타일링
- Amanda Harlech
- 헤어
- Eugene Souleiman
- 메이크업
- Ana Takahashi
- 프로덕션
- PRODn
- 세트 디자인
- Ibby Nj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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