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명의 슈퍼모델과 10명의 디자이너 그리고 우리에게 칼 라거펠트가 남긴 것
파리 그랑 팔레에서 만난, 칼 라거펠트가 가장 사랑했던 10명의 모델과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칼 라거펠트의 유산을 미래로 이어가는 10명의 디자이너.
피에르파올로 피촐리, 발렌티노
칼 라거펠트와 저는 1990년대 초, 펜디에서 만났어요. 스타가 사무실에 찾아온 듯한 기분이었죠. 그는 우리에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새로운 뷰티 브랜드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등 자신만의 의견을 곁들여서요. 그리고 그의 모든 의견은 매우 날카로웠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죠. 그런 칼을 통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방법을 배웠어요. 또 세상 모든 것이 작업의 재료이자 창작물이 될 수 있다는 것도요.
특히 모던함에 대한 칼 라거펠트의 탐구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절대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지 않았어요. 항상 동시대적인 것을 묘사하고 담아내는, ‘모던함’에 집중했죠. 제 디자인은 칼 라거펠트의 말, 모던함, 특유의 샤프함을 모두 녹여낸 결과물입니다.
톰 브라운
칼 라거펠트는 (파리의 아이코닉한 부티크인) 콜레트(Colette)를 좋아했어요. 제 의상이 판매되는 곳이기도 했죠. 칼은 회색 수트에 크리스털 서류 가방, 담요, 셔츠, 넥타이를 산 뒤 이를 착용한 자신의 모습을 찍어 보내주었어요. 그 사진은 제 사무실에 두었습니다. 제겐 아주 특별한 물건이에요.
시간이 흘러 칼은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만들어낸 작품 덕분이었죠. 칼의 작품은 아름다운 디자인과 장인 정신의 완벽한 ‘결합물’이었어요. 컨셉만큼 품질도 완벽했고요. 그는 자신의 디자인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의 천재성도 거기에서 시작됐죠. 특히 저는 그가 셰이프를 활용하는 방식이 좋았어요. 입체적인 숄더 라인, 독창적인 비율 등 많은 이에게 생소한, 아방가르드한 셰이프 말이에요. 바로 이 지점이 제가 샤넬의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가지고 실험해보고 싶었던 이유고요.
도나텔라 베르사체
칼 라거펠트는 지아니 베르사체의 아주 좋은 친구였습니다. 둘은 서로를 좋아하고 존중했죠. 지아니 베르사체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칼 라거펠트 역시 그랬지만, 둘은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지아니 베르사체에게 “제발 칼 라거펠트를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계속 졸랐어요. 어느 날 밤 그는 드디어 저를 칼 라거펠트의 집에 데려갔고, 저는 그날 칼에게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칼 라거펠트는 오늘날의 디자이너들, 특히 제게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반항적인 정신을 좋아해요. 그는 말도 안 되는 것을 한데 모아 말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냈죠. 천재들이 으레 그렇듯 지나치게 진지한 편도 아니었습니다. 칼이 하는 모든 쇼는 그의 첫 번째 쇼를 보는 것처럼 매번 새로웠죠. 특히 칼에게 여성의 존재는 아주 중요했어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여성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늘 궁금해했거든요. 항상 주변에 여성을 두고 그들로부터 의견과 에너지를 얻곤 했죠.
다카하시 준, 언더커버
칼 라거펠트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에요. 그는 수년간 룩에 조금씩 변화를 주며 샤넬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어요. 각 시대의 분위기를 포착해 이를 샤넬의 디자인에 녹여낸 겁니다.
저는 칼 라거펠트가 샤넬을 맡았을 무렵 했던 일을 재해석해보려 했습니다. 칼과 코코 샤넬이 했던 일을 제가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어요. 전형적인 수트지만, 샤넬에는 정확히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거든요. 서정적이면서도 펑키한 악센트, 조각조각 잘린 디테일까지 모두요.
크리스토퍼 존 로저스
칼 라거펠트가 펜디에서 한 작업을 보았어요. 방대한 양이었지만 기술적인 디테일이 하나하나 살아 있었죠. 자연스럽게 하우스의 쿠튀르 작품에 관련된 모든 비하인드 스토리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작업은 ‘노동 집약적’이었죠. 250개가 넘는 오간자 조각, 실크 파유, 속치마, 보닝 코르셋 등을 가지고 작업했거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칼 라거펠트의 컬렉션은 샤넬의 2006년 가을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에요. 허벅지까지 오는 데님 소재의 사이하이 부츠를 보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저게 뭐지?” 하며 낯설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칼을 높이 평가하게 됐습니다. 그의 디자인은 늘 고객과 자신을 위한 것이었거든요. 설령 모두를 만족시키진 못했더라도요. 칼은 연륜, 진정성, 장인 정신,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잃지 않는 패션에 대한 유머 감각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낸 사람이고요.
존 갈리아노, 메종 마르지엘라
샤넬 쇼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모험적인 동시에 짓궂었어요. 모든 시대와 세기의 패션에 대한 지식이 담긴 한 권의 백과사전을 보는 듯했고요. 칼 라거펠트는 한마디로 떡갈나무(지혜의 상징)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지혜를 지닌 사람이었죠. 칼이 말끝마다 “아닌가요?”라는 문장을 덧붙이는 것이 좋았어요. 상대방의 생각을 확인하고 대화하기 위한 질문이었거든요. 저 역시 언제나 “아닌가요?”에 대비해야 했지만요.
칼은 파투(Patou)에 있을 당시 라인에 집착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집중한 부분이기도 하죠. 물방울 무늬는 타원형으로 컷아웃했습니다. 프로젝터를 통해 물방울 무늬를 드레스에 비춘 뒤 무늬가 투영되는 드레스 표면을 잘라내는 작업을 거쳐 탄생했죠. 시퀸 소재는 새로운 방식의 자수였어요. 무늬를 잘라낸 다음 뜨거운 물에 담가 유연하게 만든 뒤 다시 얼음물에 넣어 형태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재미있는 작업이었지만 쿠튀르만의 엄격함도 깃들어 있죠.
올리비에 루스테잉, 발망
칼 라거펠트를 처음 만난 건 2011년이었어요. 칼은 제게 “당신이 발망의 새 디자이너인가요?”라고 물었죠. 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예전에 발망에서 일했어요. 패션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해요”라며 반겨주었죠. 그로부터 몇 달 후, 함께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을 때였습니다.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저는 칼에게 “샤넬 밖에서의 삶은 어때요?”라고 물었죠. 그는 “일은 제 삶이자 사랑이에요. 그러니 그런 질문은 하지 마세요”라고 답했어요.
그는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감이었습니다. 칼은 유행을 따르는 대신 유행을 창조했으며, 대중문화와 패션을 연결 지었어요. 우리가 오늘날 시도하는 모든 것의 선구자였고요. 삶에 대한 호기심을 멈추지 않았죠. 저는 잘록한 허리, 강조된 어깨 라인, 단추 디테일 등 칼이 발망에서 했던 작업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제 디자인은 그에 대한 헌정입니다.
아베 치토세, 사카이
칼 라거펠트는 “패션은 예술이 아닌 비즈니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사카이를 운영하면서 늘 그 말을 떠올렸어요. 오늘날 디자이너는 단순히 옷만 디자인해서는 안 됩니다. 칼은 이미 그 사실을 깨달았던 거죠. 그는 처음부터 훌륭한 디자이너였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스타일링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칼을 떠올리면 흰색 셔츠에 넥타이와 강렬한 디자인의 주얼리를 착용한 그의 스타일이 가장 먼저 그려져요. 바로 그 부분을 담고자 했어요. 물론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카이 스타일과 버무려 우아한 드레스로 재탄생시켰죠.
구찌
“저의 첫 샤넬 쇼는 여성복이었어요.” 진주, 제트, 크리스털로 장식된 구찌의 트위드 재킷과 칼의 화이트 칼라, 블랙 글러브를 착용한 지지 하디드가 말했다. “그랑 팔레에 재현된 파리의 거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런 규모와 광경은 평생 본 적이 없었거든요. 2017년 F/W 컬렉션에 등장했던 거대한 로켓과 2019 리조트 컬렉션에 올랐던 크루즈 모형도 정말 좋아했어요. 관객들은 크루즈의 외관만 볼 수 있었지만, 내부 전체는 파티를 위해 세팅되어 있었죠.
이처럼 세상과 소통하며 이를 생생하게 표현하는 칼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어요. 칼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 관심 있는 것에 천재적인 집중력을 발휘했기에 지금처럼 상징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죠. 칼의 유니폼도 그 의도의 연장선이었어요.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로 분하는 방식이자 그의 갑옷이었죠. 3m 밖에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을 정도니까요. 정말 멋졌죠.”
시몬 로샤
칼 라거펠트는 H&M과 협업한 최초의 디자이너입니다. 당시 10대였던 저에게는 정말 아이코닉한 사건이었어요. 럭셔리 브랜드가 하이 스트리트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한다는 건 패션계에서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늘 당당했습니다. 아주 드문 일이었죠. 칼은 자신이 내린 모든 결정에 확고했고, 그 결정이 옳은지 아닌지 불안해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칼의 끌로에 시절을 살펴봤습니다. 끌로에는 부드럽고 가볍고, 무엇보다 여성 친화적인 브랜드로 유명했기에 관심이 아주 많았죠. 아카이브에서 몇 가지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중 하나는 라인이 유려하게 흐르는 레이스 실크 드레스였어요. 이 레이스를 제 디자인에 어떻게 결합할지 고민했죠. 하네스처럼 질감이 단단한 요소를 살짝 가져와서 배치했어요. 물론 오늘날에 맞게 약간의 변주를 주어서요. 하네스 역시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요소 중 하나니까요.
- 글
- Alex Harrington
- 사진
- Annie Leibovitz
- 헤어
- Jawara
- 메이크업
- Fara Homidi
- 세트 디자인
- Mary Howard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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