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같은 신기루, 2023 코첼라 페스티벌 관람기
땀과 웃음, 알록달록한 옷자락과 지금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는 음악! 2023 코첼라 페스티벌이 사막 한가운데 펼쳐놓은 마법 같은 신기루.
“코첼라 가는군요?” 퉁퉁한 체형의 LA 국제공항 출입국 심사관이 팜스프링스에서 내가 5일 동안 묵을 호텔의 예약 확인서를 보더니 되물었다. 공항 셔틀버스 안에서는 부스스한 헤어스타일에 데저트 부츠를 신고 액세서리를 줄줄이 두른 영국인 커플이 올해 코첼라 페스티벌의 라인업에 대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공연장 주변 호텔과 클럽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행사의 초대장으로 내 메일함은 계속 반짝거렸고, 코첼라 공식 SNS 계정의 업데이트 속도는 빨라졌다. 축제가 열리는 캘리포니아주 인디오까지 차로 2시간 거리인 LA에서도 북미 최대 페스티벌에 대한 열기는 이미 잔뜩 지펴지고 있었다(LA 시내로 이동할 때 탑승한 우버 기사는 코첼라 페스티벌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후덥지근한 기운이 순식간에 몸을 감싸며 치열하던 서울에서의 삶이 아득해져 갔다.
인디오에 도착한 것은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동네는 축제 분위기였다. 암벽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가파른 산등성이와 키 큰 야자수 사이를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화려한 차림의 사람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이따금씩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들었다. 스포티파이에서 ‘2023 코첼라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들으며 슬그머니 밤거리를 누비다 보니 전 세계의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어쩌다 이 건조한 사막 도시로 한꺼번에 몰려든 건지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1999년 첫 회가 개최된 이래 코첼라 페스티벌은 벌써 25년째 팜데저트를 들썩이게 만들고 있다. 공연계와 거대 티켓 판매 대행사의 악질적인 마케팅을 비난하며 인디오의 엠파이어 폴로 클럽에서 직접 공연을 펼친 록 밴드 펄 잼(Pearl Jam)의 저항 정신에 매료된 폴 톨렛(Paul Tollett)이 같은 장소에서 트렌디하고 음악성 있는 축제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 코첼라의 시작이다. 아티스트와 리스너. 톨렛은 순수하게 음악을 향유하는 이들을 제외한 음악 산업의 수많은 포식자를 제거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음악 축제를 만들고 싶어 했다. 코첼라와 함께 리스너들의 페스티벌 버킷 리스트로 꼽히는 벨기에의 투모로우랜드 뮤직 페스티벌과 전 세계로 뻗어간 마이애미의 울트라 뮤직 페스티벌(UMF)이 EDM 장르를 편애하는 것과 달리 코첼라는 EDM, 힙합, 록, 인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동시대인이 원하는 다양한 아티스트를 초대했다. ‘더 많은 남자, 더 많은 백인, 더 많은 전설(More male, more white, more legacy)’을 끌어들이다 보니 매년 라인업이 비슷비슷해지는 다른 페스티벌과 달리 코첼라의 라인업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를 열광시키거나 혹은 실망시키며 격한 반응을 이끌어낼 줄 알았다.
그리고 2023 코첼라의 중심에는 블랙핑크가 있었다. 오아시스, 콜드플레이, 마돈나, AC/DC, 비욘세, 아리아나 그란데, 해리 스타일스, 빌리 아일리시에 이어 블랙핑크가 과연 코첼라 메인 스테이지를 채울 만한 퍼포먼스 역량을 충분히 갖추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무색하게 코첼라 2일 차는 핑크빛 물결로 가득했다. 블랙과 핑크는 올해 코첼라 패션의 명백한 키워드였고, 사람들은 2023 코첼라를 ‘PINKCHELLA’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다른 페스티벌에 비해 한참 느슨한 공연장의 밀도가 놀라울 만큼 빼곡해진 것도 블랙핑크의 퍼포먼스가 임박할 때였다.
4년 전, 메인 스테이지 반대편 끝에 자리한 사하라(Sahara) 스테이지에서 펼쳐진 블랙핑크의 첫 코첼라 퍼포먼스 영상을 나는 수없이 봤다. 평소보다 힘 있는 퍼포먼스와 조금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현장감이 느껴지는 네 멤버가 선보인 무대는 환상적이었다. 아티스트도, 관객도, 마지막처럼 노래하고 춤췄다. 블랙핑크 멤버들이 인생 최고의 무대로 왜 코첼라 페스티벌을 꼽는지 수긍할 수밖에 없는 폭발적인 시간이었다. 그리고 4년 뒤, 2023 코첼라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등장한 블랙핑크는 1시간 남짓의 공연을 더 뜨겁고, 프로답게 채웠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부르는 현장에서 느낀 뜨거운 감동 이후 돌체앤가바나, 뮈글러, 그레이스 엘우드, 알레산드라 리치, 파코 라반 등 수많은 패션 브랜드가 오로지 이 무대만을 위해 디자인한 의상과 기와지붕, 꽃창살문, 부채춤이 연이어 등장하는 무대 연출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새롭게 연장된 즐거움이었다. 에픽하이, 밴드 혁오와 빅뱅, 에스파 등 꾸준히 K-팝 아티스트를 인디오 사막으로 불러들인 코첼라는 마침내 블랙핑크를 올해의 헤드라이너로 소개하며 K-팝을 주류로 선언했다. 그리고 블랙핑크를 보기 위해 메인 스테이지로 몰린 12만5,000명의 관객들과 유튜브에서 이들의 공연을 실시간으로 감상한 2억5,000만 명의 사람들은 코첼라의 선택에 열정적으로 화답했다.
첫 회 입장료가 50달러였던 코첼라 페스티벌의 현재 티켓 가격은 549달러부터 시작한다. 음악 산업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을 갖춘 음악 저널리스트 타티아나 치리사노(Tatiana Cirisano)는 음악 플랫폼 트래피털(Trapital)과 나눈 대화에서 “코첼라 티켓을 산다는 건 음악뿐 아니라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소비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나 역시 단순히 음악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패션과 미술, 날씨와 풍경 등 많은 것을 만끽하며 이 축제를 여행처럼 즐겼다. (특유의 낙천적인 분위기 속에서 20달러가 넘는 레모네이드와 냉동 피자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올해부터 모든 스테이지의 공연이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됐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이곳에 직접 방문하기를 택했다. 주최 측은 페스티벌 기간 동안 공연장 근처에 텐트를 치고 머물며 공연을 즐기려는 사람들을 위해 광활한 부지를 제공하고, H&M과 포에버 21 같은 발 빠른 패션 브랜드에서는 그해 뮤직 페스티벌 시즌의 위대한 서막을 여는 코첼라 페스티벌 개최에 맞춰 저마다 페스티벌 컬렉션을 선보인다. 코첼라 특수를 겨냥한 팜스프링스 일대의 호텔 숙박비가 치솟으면 LA의 관광 물가도 덩달아 오른다. 치리사노는 이렇듯 코첼라가 산업 전반에 창출하는 부가 수익에 비하면 100억을 웃돌 것으로 추정되는 헤드라이너들의 출연료는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이번 축제 기간에 통행금지 시간을 어겼다는 이유로 코첼라가 물게 된 11만7,000달러, 1억5,467만원에 이르는 벌금 역시 가소로운 수준일 것이다.)
특히 예술은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상징적인 무지갯빛 전망대 외에도 올해 코첼라는 LA 아티스트 귀벤치 외젤(Güvenç Özel)과 매기 웨스트(Maggie West), 프랑스 아티스트 뱅상 르루아(Vincent Leroy) 등이 디자인한 알록달록한 설치 작품으로 잔디밭 곳곳에 그늘 겸 포토존을 완성했다. 블랙핑크 공연 직전에는 500대의 드론이 코첼라 대관람차와 우주인, 나비 모양을 밤하늘에 수놓았다. 예술 속을 누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끊임없이 피어났다. 나 역시 일 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저물녘 품질 좋은 천연 잔디밭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나와 동행한 오클랜드 출신의 사진가 김정호에게 올해 라인업 중 한 명인 라브린스(Labrinth)의 노래를 몇 곡 추천했고, 그는 틱톡에서 바이럴된 LA 출신의 4인조 소녀 밴드 더 린다 린다스(The Linda Lindas)를 소개해주었다. 우리의 대화는 음악을 넘어 정치와 경제, 마약 문제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시간은 많았다. 우리를 재촉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잔디밭에 둥글게 둘러앉은 또 다른 무리들은 같은 순간 어떤 주제로 삶을 나누고 있을지 궁금해하며 나는 코첼라가 신기루처럼 드리운 때 이른 여름 풍경을 차곡차곡 눈에 담았다.
다른 축제에 비해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유난히 많은 셀러브리티가 포착되는 까닭은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역시 저스틴·헤일리 비버 부부를 비롯해 카일리·켄달 제너 자매, 카밀라 카베요, 숀 멘데스, 위켄드, 아미 송 등 수많은 셀러브리티가 관객 신분으로 페스티벌을 찾았다. 이 외에도 동료 아티스트와 진심으로 음악을 즐기는 팬에 대한 애정으로 빌리 아일리시, 포스트 말론, 시애라, 배우 젠데이아 등이 무대에 깜짝 등장해 꿈같은 순간을 이뤘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의 존재감이 더욱 빛을 발하는 사막에서 순수하게 ‘나’와 ‘너’로 존재한 마법 같은 시간. 그렇게 매년 20만 명이 넘는 청춘이 코첼라 페스티벌이라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게 됐다. 새벽 1시가 넘어 호텔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나는 잔나비의 노랫말을 떠올렸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더라도 그중 일부는 가슴속에 남겨둬야 한다. 그 기억이 메마른 곳에서도 우리를 살아가게 할 테니까. (VK)
- 포토그래퍼
- 김정호
-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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