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품은 런웨이, 루이 비통 2023 프리폴 컬렉션
2023년 프리폴 컬렉션을 위해 루이 비통이 닻을 내린 곳은 서울. 끊임없이 변주를 거듭하는 한강의 물결과 생명력 넘치는 잠수교 위에서 펼쳐진 패션 파노라마.
4월 마지막 주 토요일 늦은 오후, 1,600명의 관람객이 하나둘씩 반포 한강 둔치를 통과해 루이 비통 쇼장으로 모여들었다. 서울 강남 한복판 잠수교가 루이 비통 런웨이라니! 전후좌우로 뻥 뚫린 런웨이 밖 풍경은 한강과 도심. 우리에겐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하늘에 먹구름까지 더해지니 더없이 미래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오전까지 내린 비 때문에 초겨울을 방불케 할 만큼 날은 추웠고(루이 비통 하우스 관계자들은 날씨마저 ‘루이 비통 드라마’의 일부였다고 회상하지만), 강풍까지 매섭게 몰아쳤다. 지난달 잠수교에서 개최된 프리폴 쇼는 루이 비통이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인 패션쇼다. 2019년 인천공항 격납고에서 쇼를 연 적은 있지만 ‘2020 크루즈 컬렉션의 스핀오프 쇼’였다. 쇼장이 가까워질수록 평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을 자주 언급해온 니콜라 제스키에르에게 잠수교는 더할 나위 없는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잠수교는 비통 쇼를 위해 딱 24시간만 허락됐다. 시민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지만 초대형 쇼를 준비하는 데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2층 교량인 반포대교는 홍수가 났을 때 일부러 물에 잠기도록 1층을 잠수교로 설계했다. 1·2층 다리를 각각 1976년 7월, 1982년 6월에 완공한 이곳엔 2009년 4월 ‘달빛무지개분수’라는 1,140m의 세계 최장 교량 분수가 설치됐다(이번 쇼에도 빛을 발한 이 분수는 밤에는 음악 분수 역할도 겸해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루이 비통 런웨이는 상상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기다란 런웨이와 바로 옆을 채운 계단식 관람석. 길이 795m, 너비 25m의 잠수교 절반은 런웨이와 관람석, 절반의 도로는 4인승 버기가 이동하며 게스트의 입장을 돕고 있었다. 잠수교 북단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SF 영화 세트 같은 터널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4m 높이의 천장에서 새어 나오는 붉고 푸른 조명이 흐르는 물처럼 깜빡이는 빛의 프로젝션을 연출했다.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미래적인 활주로 같은 느낌을 연출하며 한강과 도심을 액티브하게 품은 런웨이는 그야말로 환상의 분위기!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고래 소리인 듯 괴물 소리 같은 효과음이 긴장감을 고조시킬 무렵 한국 프레스와 VIP들에겐 익숙한 산울림의 ‘아니 벌써’가 흘러나왔고, 저 멀리 터널에서 정호연이 걸어 나왔다. 뒤이어 펄 시스터즈의 ‘첫사랑’을 배경으로 제스키에르의 비전이 담긴 2023 프리폴 컬렉션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트렁크 제작에서 출발한 메종의 시작점을 따라 ‘여행’을 브랜드 철학으로 정립한 루이 비통. 세계 각지 전통의 도시와 자연의 융합은 컬렉션을 위한 메종의 출발점이다. 그 결과 루이 비통의 컬렉션은 언제나 현재와 고귀한 고대 문명 사이, 미래주의와 시 사이, 거대하고 활기찬 도시와 고즈넉한 시골 풍경 사이를 오갔다. “늘 한국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패션쇼를 하겠다는 생각이 갑작스럽진 않았습니다. 한국의 분위기가 저와 잘 맞다고 생각합니다.”
루이 비통이 서울에서 공개한 컬렉션은 요즘 패션계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K-컬처’와 그 중심이 되는 서울! “특히 한국 영화 특유의 미감에 매료되었는데, 그중 가장 특별하게 좋아하는 작품이 봉준호 감독의 <괴물>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배두나와 친분이 두텁기도 한 제스키에르는 이렇게 서울에서 쇼를 개최한 취지를 밝혔다. “잠수교는 서울의 남쪽과 북쪽을 잇는 교량입니다. 산책로는 강에 근접해 장마철 한강이 빗물로 차오르면 다리가 물에 잠기죠. 이 도시 공학의 업적이라고 부를 만한 다리는 사라지고 드러나는 것들이 환영을 펼쳐내고, 거대한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물줄기를 더해 물 무지개를 만들기도 합니다. 패션쇼를 진행하기에 이보다 더 영감을 주는 장소는 없을 거예요.” 루이 비통 관계자는 서울시, 관광공사와 전략적 업무 협약을 맺고, 앞으로도 서울을 알리는 다양한 전시와 쇼는 물론 여러 콘텐츠로 한강의 다채로운 면모를 세상에 알리겠다고 덧붙였다. “지금 서울이 그만큼 기념비적 도시로 여겨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이번 컬렉션은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 무대 연출에 참여, 거대한 분수에 화면을 띄워 계절을 지나며 변화하는 물의 순환을 표현했고, 1970년대 한국 록과 국악이 섞인 완성도 높은 쇼 음악을 구성하고, 미래적인 터널을 만들었다.
이렇게 마련된 런웨이에서 제스키에르는 자신이 지난 10년간 발전시켜온 이 패션 하우스만의 코드를 계속 이어갔다. 기성복 컬렉션과 달리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웨어러블한 옷이 소개되고, 가방 역시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충실히 반영하되 ‘여행’이라는 메종의 메인 테마에 맞게 한층 다양해졌다. 특히 이번 컬렉션에서는 메종의 가죽 헤리티지를 재발굴, 고스란히 의상에 구현했다고 <보그> 팀에 전했다. “우리가 10년간 해온 이 작업을 통해 루이 비통의 강력한 시그니처를 구축해보았고, 지난 컬렉션과 연결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잠수교의 상징을 빼닮은 이 컬렉션에는 반복되는 리듬, 교차하는 길, 혼재된 순간이 담겨 있어요.” 후드 점퍼와 딱 달라붙는 보디수트는 공기 역학적 특성을 지녔다. 그리고 이런 스포츠 요소는 제스키에르가 메종에 합류하던 초창기를 떠올리는 심플하면서 강렬한 컬러나 실루엣과 잘 어울렸다. 제스키에르는 그 외에도 DNA 변형과 진화, 스포츠, 프랑스 고전주의, 이동의 기능성, 다이내믹한 실루엣 등의 키워드를 떠올렸다고 전했다. “서울에서 처음 소개하는 이 쇼는 우리의 장인 정신을 선보이는 장이기도 하고, 외교적 여정이기도 합니다.”
‘콰이어트 럭셔리’ 아이템에 대한 최근의 높아진 관심을 반영하듯 이번 쇼에서는 핀스트라이프와 퀼팅 가죽 수트, 모즈 스타일 램스킨 코트, 체커보드 프린트 팬츠를 장식한 전혀 튀지 않는 마이크로 모노그램 LV 로고, 홀스빗 벨트와 함께 착용한 크레이프 울 보디수트 같은 웨어러블한 아이템이 많았다. 소재에 대한 실험 역시 빠트리지 않았다. “디자인 과정에서 테크닉의 한계를 시험하고 소재를 변형하는 것을 즐깁니다.” 쇼에는 변형 니트, 크랙 비닐, 크레이프 울, 트위드, 스트레치 트윌, 인조 모피, 자수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했다. “그리고 매우 상징적인 다리처럼 앞뒤로 교차하는 통로, 혼합된 순간이 쇼에 있습니다.” 덕분에 여름에도 어울리는 가볍고 하늘거리는 옷과 강렬한 프로포션이 압도적이었고, 노골적이지 않을 만큼 곳곳에 스민 여행이라는 요소는 스타일을 더할 뿐 아니라 흥미로운 컬렉션을 완성했다.
“일종의 외교 순방처럼, 대한민국 역사의 다양한 챕터를 다시 얘기하기 위해 루이 비통 사절단이 한국을 찾은 거죠.” 2016년 <보그 코리아> 인터뷰에서 제스키에르는 충분한 시간과 기술(Craft), 혁신적 디자인, 이 모든 것을 합한다면 럭셔리를 능가하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나에게 말한 적 있다. 그의 비전은 글로벌 럭셔리 마켓의 주전으로 부상하며, 대형 패션 하우스가 영역 다툼을 벌이는 서울에서 구체화되고 현실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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