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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디자이너를 자른 발리와 앤 드멀미스터

2023.05.23

1년 만에 디자이너를 자른 발리와 앤 드멀미스터

지난주, 두 명의 디자이너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발리를 이끌던 루이지 빌라세뇨르와 앤 드멀미스터를 이끌던 루도빅 드 생 세르냉이 각자 하우스에 이별을 고한 것.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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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패션에 이끌렸다고 밝힌 루이지 빌라세뇨르. 정식으로 패션을 공부하지 않은 그는 2015년, 자신의 브랜드 ‘루드(Rhude)’를 창립하는데요. ‘럭셔리 스트리트웨어’를 표방하며 젊고 미국적인 디자인을 선보인 루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지, 켄드릭 라마, 위켄드 등 셀럽들의 마음은 물론 Z세대의 마음마저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젊음과 창의성은 느껴지지 않던 브랜드, 발리를 재건하는 중책이 맡겨지죠.

2022년 1월, 발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된 루이지 빌라세뇨르는 고루했던 발리에 젊음과 글래머라는 코드를 삽입하는 데 주력합니다. 젊은 소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그가 발리 디렉터로 선임되자, <보그>를 포함한 패션 매거진들 역시 발리의 컬렉션을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고요. 비록 상세한 매출액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발리는 올해 초 전년도와 비교했을 때 매출이 20%가량 증가했다는 통계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20%라는 숫자가 부족하다고 느꼈을까요? 발리와 루이지의 동행은 14개월 만에 끝났습니다. 단 두 번의 컬렉션만 선보였죠.

앤 드멀미스터는 ‘앤트워프 식스’의 일원이자 브랜드의 창립자 앤 드멀미스터가 2013년 패션계를 떠난 이후 브랜드 운영에 난항을 겪어왔는데요. 이후 크리에이티브 디텍터로 선임된 세바스티앙 뮤니에르(Sébastien Meunier)가 그녀의 유산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았지만, ‘앤 드멀미스터 여사’를 열렬히 추종하던 컬트적 팬덤은 여전히 앤의 디자인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줄 적임자로 루도빅 드 생 세르냉이 낙점되죠.

1991년생인 루도빅 드 생 세르냉은 2018 F/W 컬렉션을 발표하며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했는데요. 섹슈얼한 젠더리스 스타일을 선보이던 그의 디자인은 머지않아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바이럴하게 퍼졌고, 루도빅은 파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디자이너로 거듭납니다.

그는 브랜드의 아카이브를 통해 앤 드멀미스터 특유의 ‘시적인 우아함’과 자신이 추구하는 ‘센슈얼함’ 사이의 타협점을 찾아 나섭니다. 그 결과물인 2023 F/W 컬렉션은 루도빅이 앤 드멀미스터에서 선보인 처음이자 마지막 컬렉션으로 남았죠. 6개월 만에 끝난 루도빅과 앤 드멀미스터의 동행이 브랜드의 매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루도빅이 디자인한 피스들이 판매되기도 전, 그가 브랜드를 떠나게 됐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가 하나의 컬렉션만 남기고 떠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2023 F/W 컬렉션이 판매로 이어질지에 대한 공식 발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패션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헤리티지를 지닌 두 브랜드, 발리와 앤 드멀미스터 모두 쇄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으나,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이들의 도전은 왜 실패로 돌아갔을까요?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실패 사유’는 루이지와 루도빅이 각자 발리, 그리고 앤 드멀미스터가 추구하는 미학과는 결이 다른 디자인을 선보여온 디자이너라는 점. 루이지 빌라세뇨르는 항상 ‘캘리포니아 해안가를 즐기는 젊고 자유로운 남성’에게 어울릴 법한 디자인을 선보였기에, ‘중후한 멋’을 추구하는 발리의 주 고객층의 입맛에 완벽히 들어맞는 컬렉션을 탄생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었죠. 루이지가 발리에서 선보인 파이톤 프린팅 블레이저와 슈즈는 그 자체로는 분명 인상적이었지만, 기존 발리의 제품을 소비하던 이들이 빈티지한 워싱의 ‘파이톤 프린팅 반스’를 신고 있는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루도빅 드 생 세르냉과 앤 드멀미스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젠더리스한 디자인을 추구한다’ 정도에 그치죠. 루도빅 드 생 세르냉은 항상 외설과 센슈얼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지만, 앤 드멀미스터의 디자인은 외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애초부터 그는 앤 드멀미스터라는,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옷을 입게 된 것이죠.

사실 ‘하우스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를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브리오니는 2016년 4월, 디자이너 저스틴 오셰이(Justin O’shea)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한 뒤 6개월 만에 그와 작별합니다. 올해 4월에는 로샤스 역시 샤를 드 빌모랭(Charles de Vilmorin)과 2년 만에 이별을 고하기도 했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범한 실수인 ‘마구잡이식 선임’이 브랜드뿐 아니라 디자이너에게도 악영향만 끼친다는 점입니다. 커리어 내내 ‘모 브랜드에서 실패한 디자이너’라는 인식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죠. 향후 자신이 전개하는 브랜드를 바라보는 비평가들과 대중의 시선 역시 전과는 같지 않을 테고요.

브랜드가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확장해나갈 적임자를 선임할 때의 시너지 효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구찌에서 13년간 자신을 갈고닦으며 ‘구찌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그랬고, 피비 파일로와 라프 시몬스 밑에서 경력을 쌓은 마티유 블라지는 보테가 베네타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죠. 최근 성사된 피터 도와 헬무트 랭의 만남 역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선임이 이루어질 때, 패션계는 활기를 띠게 마련이니까요.

사진
Courtesy Photos,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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