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YKYK: 타쿤 파니치걸
패션 캘린더는 시시각각 바뀝니다. 그래서 세대별로 패션을 기억하는 방식도 제각각이죠. ‘타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디자이너가 떠오르나요? 그렇다면 2010년대부터 꽤 오랫동안 패션에 관심을 가져온 오디언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옴므 걸즈(Homme Girls)>라는 이름은 젠지 세대부터 다양한 세대까지 알 만한 패션 피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이 <옴므 걸즈>가 바로 과거를 풍미한 뉴욕의 디자이너 타쿤 파니치걸(Thakoon Panichgul)이 만든 잡지이자 브랜드입니다.
2019년 첫선을 보인 <옴므 걸즈>는 시작부터 ‘때깔’이 달랐습니다. 커버를 장식한 것은 유명 포토그래퍼 카스 버드(Cass Bird)가 찍은 모델 오틸리아 시몬(Othilia Simon)이었죠. 화이트 탱크 톱에 데님, 쿨한 흑백사진은 화려한 조명으로 점철된 패션 잡지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습니다. 조용한 럭셔리, 미니멀한 놈코어 무드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었죠. 너무 과하게 러블리하지도 않고, 알쏭달쏭한 하이패션 포즈도 아니고, 섹시함을 부자연스럽게 드러내지도 않는, 세련된 톰보이의 감성. 이름처럼 <옴므 걸즈>에 잘 어울리는 이미지였습니다.
잡지에 대한 편집장 타쿤의 애정은 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4년경 자신의 브랜드를 시작하기 전 그는 미국 <하퍼스 바자>의 패션 에디터였죠. 그는 <옴므 걸즈>를 창간하던 당시 미국 <보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디자이너 활동을 쉬면서 제가 어떤 패션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브라나 울프(그의 전 바자 동료)나 그레이스 코딩턴 같은 쿨하고 스타일리시한 여성들이 떠올랐죠. 그리고 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심플한 옷을 입는다는 것이었어요.”
<옴므 걸즈>가 창간된 직후부터 인기를 끈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이선스 잡지처럼 전 세계적 유통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독립 서점을 통해 알음알음 팔려나갔죠. 양질의 기사와 세련된 화보가 인상적인 <젠틀 우먼>이 풍미했던 2010년대 초반도 아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 잡지에 열정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옴므 걸즈>는 팬이 필요했습니다. 옴므 걸즈라는 브랜드를 소비할 수 있는 젊은 팬이 말이죠.
옴므 걸즈 첫 패션 상품은 남성의 언더웨어에서 착안한 로고 박서 쇼츠였습니다. 무심하게 걸친 헐렁한 쇼츠와 양말의 조합은 순식간에 인스타그램을 점령했죠. 언더웨어가 살짝 보이도록 입는 트렌드에도 부합하며 많은 이들이 옴므 걸즈의 잡지를 구매하진 않아도 옷은 구매하며 새로운 신드롬을 낳았습니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죠. 많은 인플루언서가 옴므 걸즈의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특별판 굿즈를 출시했는데, 어느새 메인이 된 격이랄까요. 뉴욕 패션 위크를 호령했던 타쿤은 트렁크의 인기에 힘입어 자신의 장기를 살려서 아예 재킷, 코트, 팬츠, 데님을 아우르는 풀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최근에는 제이크루와의 협업 컬렉션도 공개하며 제대로 된 패션 브랜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지도가 높아지자 잡지 콘텐츠도 풍부해졌습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젠 브릴(Jen Brill)이 합류하며 옴므 걸즈는 ‘인더스트리 레벨(Industry Level)’이 되었습니다. 나이키, 슈프림, 리한나 등과 일하는 그녀의 안목은 탁월했고 전에 없던 비주얼을 만들어냈습니다. 샤넬과 협업해 아예 전체 이슈를 샤넬 특별판으로 꾸리는가 하면, 커버 모델은 이리나 샤크, 릴리-로즈 뎁, 미즈하라 키코, 팔로마 엘세서,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 카일리 제너를 아우르죠(쿨한 ‘걸’들의 잡지에 굳이 억만장자 카일리 제너를 등장시켜야 했냐는 질타도 받았습니다).
프린트 매거진의 부활 혹은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는 옴므 걸즈의 존재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뭐든지 빠르게 변하는 틱톡커의 시대에 공들여 만든 비주얼에 대한 탐구가 무엇인지 보여주었고, 클래식은 변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이 존재해야 한다는 걸요. 2023년 6월 현재, 옴므 걸즈 로고 트렁크 유행에 편승할지 고민이신가요? 타쿤이 앞서 말했듯 옴므 걸즈가 추구하는 여성상은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옴므 걸즈의 신드롬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구매하셔도 좋습니다!
‘If You Know You Know’는 많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패션계에서 유의미한 영향력을 끼치는, ‘알 사람은 아는’ 인물에 대해 탐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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