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주의 예술가, 제니 홀저가 공개한 브루클린 스튜디오와 삶
제니 홀저와 함께 뉴욕 거리와 베일에 싸인 브루클린 스튜디오를 배회하며 보낸 시간.
지난 40년간 개념주의 예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작품은 뉴욕 스트리트의 광고, 전광판, 건물 파사드에 끊임없이 재사용되면서 뉴욕 경관의 일부를 이뤄왔다. ‘남자는 엄마가 되는 것이 어떤 건지 알 수 없다’ ‘자유는 사치일 뿐 필수가 아니다’ 같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300여 개 문장을 배열한 작업인 ‘경구들(Truisms)’로 유명해진 홀저는 흔히 그를 설명하는 표현으로 쓰이는 텍스트 애호가라든지 정치적 메신저 그 이상이다. 전문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은 셀러브리티이자 자신을 ‘뷰티 하운드(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로 설명하는 홀저는 화가이자 판화가이며, 건축과 기술에도 강박적 관심을 지닌 광범위한 예술가다. 물론 홀저 자신은 여러 닉네임을 거부하지만. 사적 공간과 공공장소, 텍스트와 이미지를 넘나들며 예술계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홀저는 감각을 자극하는 현대의 모든 사건에 시시때때로 개입하며 가뿐하게 독보적 지위를 획득했다.
미국 문화 평론가 캐서린 리우(Catherine Liu)는 홀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심오한 이야기를 했다. “홀저의 예술은 눈 주위 어딘가에 또 하나의 감각중추를 형성하는 듯합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를 손쉽게 전멸시키는 거센 문화적 흐름 속에서 내면성을 사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하게 하죠.” (홀저의 예술이 새로운 세상을 관측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일 새로운 감각기관이고, 앞으로 우린 이를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는 뜻일까.) 어쨌거나 홀저를 이해하려면 그의 발이 최근 가닿은 곳까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가 손수 자신의 지난 행보를 전복하려 들지도 모르니까. 홀저의 최근 활동은 지난해 10월 하우저 앤 워스에서 열린 전시 <정신 나간 말들(Demented Words)>에 머물러 있다. 대중은 이 전시를 통해 전근대적 남성주의 시대에 ‘B급 표현’으로 조롱받던 친근하고 아름다운 언어와 홀저의 자유분방한 미디어 활용 능력이 부각되었다고 이야기했다.
홀저가 뛰어난 ‘언어술사’라는 사실을 아는 관객은 때로 그의 언어에만 집중하지만 홀저가 창조한 텍스트와 이를 담아내는 상자인 미디어는 생각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인 설치 예술 작품 ‘블루 룸(The Blue Room)’(1975)을 보라. 스튜디오 전체를 화이트 페인트로 칠한 뒤 블루 워시로 덮은 것은 순수함에 대한 판타지를 창조하기 위함이었다. ‘대중에게 전하는 메시지들(Messages to the Public)’(1982)은 맨 처음 뉴욕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에 등장한 후 전 세계 랜드마크 파사드를 순차적으로 점령하며 이목을 끈 프로젝트다. 한눈에 담기 어려운 고층 건물과 울퉁불퉁한 랜드마크 건물 표면에 수놓인 텍스트는 온전한 독해를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빛과 그림자, 표면의 부드럽고 단단한 부분, 지엽적이고 포괄적인 인지 활동이 혼합되어 탄생하는 복합 경험이 텍스트 자체보다 중요한 경우였다. 하우저 앤 워스 전시를 통해 감상할 수 있었던 홀저의 추상화 역시 마찬가지다. 다채로운 질감 속에 어렴풋한 글귀를 숨긴 입체적인 추상화 작품은 자명한 진실과 비밀이 이리저리 얽힌 세상을 반영한다.
홀저가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예술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가 폭력성과 그로테스크한 요소를 아예 배제해온 것도 아니다. 9·11 테러가 발생한 후부터 미국 정부의 기밀 문건과 주요 기록, 성 정체성과 총기 규제처럼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와 관련된 당사자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까지, 홀저는 쉽게 잊혀서는 안 되는 기록을 소중히 모아 작품 소재로 활용한다. 텍스트 일부만 발췌하거나 극단적으로 편집된 형태로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홀저는 무관해 보이는 단어의 연결 속에 의미심장한 슬로건을 숨겨놓은 비주얼 아트워크와 지나치게 어두운 공간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텍스트를 보여주는 LED 작업을 선보였다.
도널드 트럼프와 극우 단체 ‘큐어넌(QAnon)’이 소셜 미디어에 포스팅한 메시지를 구리판에 새긴 작품 ‘그 사람은 정말 별로야!(He Sucked!)’(2022) 역시 암울한 시나리오를 다룬 작품 중 하나였다(홀저는 이를 그리스·로마 시대의 저주 목록이 기록된 실제 유물인 ‘저주 서판(Curse Tablets)’으로 불렀다). 그리고 부식된 명판 위에 설치된 미래적인 LED 디스플레이는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을 연속적으로 흘려보낸다. ‘당신은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를 그리워하고 있다(You are missing the connections)’ ‘MAP 구축을 지속하시오(Continue to build the MAP)’ ‘MAP이 핵심 열쇠를 제공한다(MAP provides the KEY)’ ‘열쇠가 진실을 퍼트린다(KEY spreads the TRUTH)’ ‘진실은 자연적인 힘이다(TRUTH IS A FORCE OF NATURE!)’… 메시아의 계시처럼 보이기도 하는 ‘지혜의 말’은 홀저의 대표작 ‘경구들’을 상기시키지만 어디까지나 포퓰리즘 정치가의 민중 선동용으로 사용되는 공허한 단어의 나열일 뿐이다. 형형색색의 3D 아트로 현란하게 움직이는 트럼프 시대 격언이 디지털 시대의 그로테스크한 미래를 겨냥한 작품은 홀저가 동시대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모두 관심을 기울이는 아티스트라는 방증이다.
<정신 나간 말들> 개막식 즈음에 홀저의 딸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가 릴리 코비엘스키(Lili Kobielski)가 이 기사를 위해 하루 동안 집과 스튜디오, 거리와 전시장을 오가는 제니 홀저를 밀착 촬영했다. 작품의 익명성을 사수하기 위해 긴 시간 노력해온 홀저의 브루클린 스튜디오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와 남다른 친밀함을 공유한 릴리 덕분이었다. 앞서 홀저의 예술에서 텍스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총체적 감상이라고 했다. 릴리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 글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던 제니 홀저의 남은 삶을 적극적으로 추적해보자. VL
- 포토그래퍼
- Lili Kobielski
- 글
- Erik Mo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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