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라는 배에 오른 박정민, 김종수, 고민시
해가 길어졌다. 같은 목표를 붙들고 한배에 오른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김종수, 고민시의 즐거운 한때.
장외 인간, 박정민
영화 <밀수>에서 박정민은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 어촌으로 흘러든 ‘장도리’를 연기한다. 어느 가정집 공구 통에나 하나쯤 들어 있을 법한 다용도 망치, 그 장도리다.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해운 회사에서 먹고 자는 이 순박한 청년은 마을 사람들과 해녀들에겐 꽤 쓸모 있는 물건이다. “장도리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별명 같은 거예요. 정확한 이름은 나오지 않죠.” 박정민은 자신의 산문집 <쓸 만한 인간>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긴 사설을 늘어놓았다. 이름 없는 인생이란 얼마나 외로운가. ‘쓸 만한 인간’이 아닌 ‘쓸모 있는 물건’ 장도리. 류승완 감독은 이번 영화를 준비하며 박정민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역할을 제안했다. 앞뒤 잴 것 없이 그는 바로 승낙했다. “감독님은 시나리오라도 한번 보고 결정하라고 하셨지만 전 연락을 받은 순간 마음을 먹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감독님의 팬이었거든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중학생 때 개봉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를 제외하고 그는 류승완 감독의 모든 영화를 극장에서 봤다. 자투리 필름으로 만든 단편을 묶고 여기에 내용을 더한 류승완 감독의 놀라운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영화계뿐 아니라 당시 영화를 공부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였다. “그야말로 ‘입덕’을 한 거죠. 감독님이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이라든지 어떤 부분을 멋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다음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주먹이 운다>(2005)…” 시네마 키드인 그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시간순으로 읊을 만큼 진심이다. “당시 한국 영화계에 좋은 감독님들이 대거 등장했잖아요. 류승완 감독님뿐 아니라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배우 선배님들도 그렇고요. 전 아직도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거든요. 꿈만 같죠.”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다. 2013년 박정민은 옴니버스 영화 <신촌좀비만화>의 ‘유령’ 편으로 류승완 감독과 만났다. 한때 10대 청소년의 오컬트 문화였던 인터넷 사령 카페에서 실제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에서 그는 사이버 세계에 빠진 은둔형 외톨이 비젠을 연기했다. “제 데뷔작 <파수꾼>을 인상적으로 봤다고 하시더라고요. 같은 소속사의 황정민 형님도 추천을 해주신 것 같고, 여러 가지로 연이 닿아 작품을 하게 됐죠. 그때 진짜 열심히 했어요. 예쁨 받고 싶어 되게 열심히 준비했거든요.”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영화 <동주>를 찍게 된 것도 ‘유령’ 덕분이다. <동주>의 이준익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유령’의 박정민을 언급하며 “뭔가 끌리는 게 있었고, 그 잔상이 오래갔다”고 그를 송몽규 역에 캐스팅한 이유를 밝혔다. 이후 그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 제작사 ‘외유내강’의 작품 두 편(<사바하>와 <시동>)을 더 함께했다. 10년이 흘렀고 이제 그는 독립영화계의 촉망받는 신인 배우에서 충무로의 대표 배우, 모두가 아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 사이 여러 일이 있었고 많은 것이 변했다. 달라진 건 그의 몸값뿐만이 아니다.
“예전엔 무조건 ‘닥치고 열심히’의 태도였다면 언제부턴가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생겼던 것 같아요. 게으른 천재이고 싶은 그런 마음 있잖아요?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요. 자신을 너무 믿고 타성에 젖어 해이해지려 할 때, 예민하게 반응하려고 해요. 하루하루가 내 마음을 다잡는 과정이라는 게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싶군요.” 일종의 자기 검열이다. 박수 치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건 쉽지 않다. “물론 현장에 적응하는 건 전보다 훨씬 나아졌죠. 소개하지 않아도 먼저 이름을 불러주고, 저 또한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겼고요. 그런데 반작용도 있어요. 편하다는 건 그만큼 나태해질 확률도 높은 거니까. 뒤처지지 않으려면 계속 다짐을 하고 노력해야 해요.”
작품마다 감독들은 유독 그에게 큰 숙제를 맡긴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는 서번트 증후군을 지닌 천부적 재능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어야 했고, 무명 래퍼 역을 맡은 <변산>에서는 랩은 물론 랩 가사까지 직접 썼다. 극의 서스펜스를 주도한 <사바하>의 사천왕, 성별을 초월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트랜스젠더 여성 ‘유이’는 또 어떤가. 카메라 앞에서 박정민은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그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가 된다. 완벽한 각선미까지 연기의 일부다. “아, 그건 그냥 평상시 제 몸인데 사람들이 ‘와, 작품을 위해서 몸매를 저렇게 만들었구나’ 오해를 하시더라고요.” 반전 캐릭터로 극의 재미를 선사한 인물 유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박정민은 쑥스러운 듯 웃음을 보였다. <밀수>에선 뱃사람의 몸을 만들면 좋겠다는 감독의 주문이 있었다. “운동을 하긴 했지만 특별히 대단할 건 없었어요. 누구나 다 하는 거죠. 아, 잠수 훈련도 했어요!” 해녀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내세운 이번 영화는 수중 범죄 활극을 표방하는 만큼 거의 모든 배우들이 잠수 훈련을 받았다. “지금도 전 수영을 아예 못해요. 그런데 제가 잠수를 정말 잘하더라고요. 감독님, 지도 선생님은 물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카메라가 멈춰 있을 때도 계속 연습을 하니까 너무 뽐내지 말라고, 그런다고 <밀수 2>에 출연하는 거 아니라며 농담을 하시더군요.” 오직 다이버의 숨소리만 들리는 물속 적막에 대한 반응은 공포와 안도, 두 가지로 나뉜다. 박정민은 후자다. “그게 되게 좋더라고요. 제가 숨으로 부력을 조절하는 일도 재미있고. 나중에 다이빙으로 유명한 지역에 가게 되면 다시 경험해봐도 좋겠다 싶은데, 제가 워낙 어디 멀리 나가는 걸 안 좋아해요.”
여러 필자의 먹고사는 이야기를 모은 책 <요즘 사는 맛>에서 박정민이 직접 기술한 자신의 일상 한 토막은 다음과 같다. “밥 먹고 누워 있다가 만화책 봤다가 ㅇ튜브 봤다가 또 밥 먹고 누워 있다가 그 상태로 영화 한 편 때리고 잠깐 졸았다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또 ㅇ튜브 봤다가…” 이런 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하찮아서 행복하다’는 그는 소위 인생의 낭비라고 일컬어지는 하잘것없는 것들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아무도 없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요하고 안전하고 조금은 쓸쓸한 시간. 혼자 밥을 먹는 이 고독한 남자의 유일한 친구는 만화가 이말년의 유튜브 채널 ‘침착맨’이다. 침착맨의 팬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책 홍보를 위해 유튜브 방송에 나갔다가 게임 스트리머 크루 ‘배도라지’의 일원이 되었고, 침착맨이 운영하는 공식 팬 커뮤니티 사이트 ‘침하하’ 한쪽에 ‘구쭈왕국’이라는 자치령, 즉 전용 게시판까지 부여받았다. 주펄(만화가 주호민), 김풍, 주우재, 곽튜브 등의 이름이 깃발처럼 꽂힌 이 게시판에서 배우는 그가 유일하다.
“처음엔 2~3시간 방송만 하고 그냥 왔어요. 전화번호 교환도 안 했고요. 물론 제 아이디는 알려드렸죠. 그 후 방송할 때 채팅 창에 제가 글을 남기면 읽어주시고, 그러다가 같이 배도라지 MT를 가게 된 거예요. 다 제가 좋아하던 분들이라 ‘재밌겠다’ 싶어 따라간 건데 어떻게 하다 보니 계속 이렇게… 흐흐. 원래 혼자서 영화관에 못 갔는데 그 안에서 영화 동호회 활동도 하게 되고 게임을 비롯해 여러 가지 취미가 많이 생겼어요. 저를 자꾸 밖으로 나오게 만들어요.” 박정민은 구쭈왕국의 통치자답게 침하하 내 쇼핑몰 ‘얼렁뚱땅 상점’에서 판매하는 굿즈 다수를 애용한다. <보그> 인터뷰가 진행되는 이날도 그는 이말년 작가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반팔 티를 입고 나왔다. SNS는 하지 않지만 그는 다른 방식으로 팬들과 소통한다. 몇 개월 전엔 배도라지의 또 다른 멤버 김단군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무려 6시간짜리 라이브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일터 밖에서 저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렇게 마음을 연 게 처음인 것 같아요. 그분들은 저를 배우라 생각하고 대하지 않아요. 진심으로 저랑 같이 놀고 싶어 하죠. 그러다 보니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행복해요.”
박정민이 한동안 책방을 운영한 건 알려진 사실이다. 몇 권의 책을 쓰고 책방 주인이 되고 게임을 하고 사이버 밥 동무들과 낄낄대며 채팅을 하는 이 희한한 배우는 영화에 출연할 뿐 아니라 연출도 한다. 이제훈, 손석구, 최희서 등 동년배 배우들이 각각 감독이 되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쇼트 필름 프로젝트 ‘언프레임드’에서 박정민은 어른의 세계만큼 치열한 초등학생들의 반장 선거 풍경을 담은 단편 <반장선거>를 선보였다. 류승완 감독 역시 그의 작품을 재밌게 봤다. “감독님은 ‘한번 해봐, 잘할 것 같다’고 용기를 주시는데 저는 아직 연출을 할 생각이 없어요. 지금 당장은 배우로서의 쓰임을 좀 더 받고 싶어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재학 시절 연출 전공에서 연기로 전과한 그는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친구로 늘 조현철을 언급한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대학교 동창이다. <D.P.>의 조석봉 일병으로 이름을 알린 조현철은 자신이 연출한 첫 장편영화 <너와 나>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혁오 밴드의 오혁이 음악 감독을 맡은 이 영화에서 박정민은 코믹한 빌런으로 깜짝 등장한다. “그 친구는 굉장히 내성적이고 조용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건 강단 있게 밀고 나가 결과물을 만들어내죠. 만약 제가 언젠가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현철이한테 먼저 물어볼 것 같아요. 어린 시절 함께 영화를 공부했고 또 오랜 시간을 나눈 친구니까. 저한테는 아주 큰 영향을 준 친구예요.” 그의 주변에는 뛰어난 괴짜들이 많다. 혹시 박정민의 친구가 되기 위해선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 건 아닐까? “하하.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전혀 없습니다. 그냥 제 마음 편하게 해주면 다 친구죠.”
인터뷰 말미에 그에게 <밀수>의 장도리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는지 물었다. 과연 장도리가 책을 읽기는 할까? “안 읽겠죠. 책을 권한다기보다는 갑자기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어떤 책 제목이 떠오르는군요. 마이클 로보텀의 <미안하다고 말해>. 왠지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그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것이다. 이제 그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다음 영화를 촬영하고 틈틈이 <밀수> 홍보 일정을 소화한다. 그는 <밀수>를 통해 관객이 배우 박정민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성공을 좇는 숱한 사람들 틈에서 밀고 부딪히며 구르는 누군가의 모습은 우리 주변 혹은 나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공의 기준이 다 달라서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타자가 볼 땐 저도 성공한 사람일 수 있겠죠. 금전적인 여유나 명예도 있어야겠지만, 글쎄요. 요즘 저는 마음의 혼란과 부채감, 죄의식이 현저히 적은 삶을 사는 게 어쩌면 궁극적인 성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스스로를 ‘평범한 옆집 남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종종 멍한 표정과 느슨한 자세로 어물쩍 경계를 넘나든다. 모든 곳에 속해 있으나 실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장외 인간. 박정민은 지금 자기만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달과 별이 뜨는 곳. 홀로 새로운 세계에서 사는 자는 고독하나 자유롭다. 매번 흔들리고 늘 자책하지만 그 고민의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그의 산문집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어차피 끝내는, 다 잘될 거다.” 이미혜 칼럼니스트
판도를 바꾸는 고민시
뭐라도 할 것 같은 눈빛. 고민시가 등장하는 순간 극의 판도가 바뀐다. 영화 <마녀>(2018)에서 앞머리에 핑크색 헤어롤을 말고 툴툴거리며 등장했을 때 음울한 극의 분위기는 180도 반전됐다. 오디션을 5차까지 치르는 동안 실은 주인공 역할로 캐스팅된 줄 알고 설레던 고민시는 험한 입담으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오히려 대중의 궁금증을 키웠다. 지금보다 앳된 모습으로 화내고, 떼쓰고, 울고, 온갖 감정을 힘껏 분출하는 고민시는 잠깐의 등장만으로도 충분히 관객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다음 활약은 넷플릭스 시리즈 <좋아하면 울리는>.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성격 파탄자이자 로맨스 훼방꾼인 ‘박굴미’로 현실감 높은 짜증 연기를 선보이며 대중에게 이상한 희열을 선사하기도 했다. 잔잔한 로맨스도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장르가 달라졌다. 고민시는 이야기의 템포를 쥐고 흔드는 불안 불안한 인물을 자주 맡으며 존재감을 알렸다.
몇 년 전, 고민시를 만났을 때 그녀는 뻔하지 않은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일상을 살아가며 자기답지 않은 리액션이 나오거나 현장이나 작품에서 다른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를 맞닥뜨렸을 때 잘 기억해두기 위해 노력한다고. <72초 TV>와 <완전무결, 그놈> 등 웹드라마에 출연하며 갈고닦은 현실감 높은 연기를 주 무기로 고민시는 순간을 붙잡는 힘을 지닌 배우가 되어갔다. 그리고 똑똑한 생존 전략은 통했다. “어떤 대사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한다”며 이응복 감독은 그녀에게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의 찰진 욕쟁이 소녀, ‘이은유’를 맡겼다. 한국 드라마 최초로 미국 넷플릭스 톱 10에 진입했으며, 글로벌 순위 3위까지 오르며 세계적으로 뜨겁게 사랑받은 시리즈에서 독보적인 캐릭터로 눈도장을 찍은 고민시의 무대는 더욱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운명적 사랑의 주인공을 연기한 드라마 <오월의 청춘>(2021)과 이응복 감독과 또다시 조우한 드라마 <지리산>(2021)이 차례차례 그녀에게 왔다. 그러나 들뜨지 않았다. 그저 ‘너무 올라가지도, 너무 내려가지도 말고 항상 평평하게 나아가라’는 이름 뜻을 되새길 뿐이었다. “여전히 되뇌어요. 기대감이 휘몰아치거나 어떤 감정에 휩쓸리려 할 때 그 마음을 누르고, 다시 중심을 잡으려 하죠. 안 그럼 미끄러질 테니까요.” 다짐대로였다. 고민시는 자기만의 페이스를 지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류승완 감독에게서 영화 <밀수>의 캐스팅 제의를 받았을 때 그녀는 당연히 오디션을 볼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한다. 결국 오디션 없이 ‘고옥분’이라는 역할을 따냈지만 감사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밀수>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김종수, 그다음에 제 이름이 있는데 믿기지 않았어요. 위대한 이름들 다음으로 제 이름 석 자가 더해졌다는 것만으로 너무 영광이었죠. 책임감이 생겼어요. 기분 좋은 부담감. 그 표현이 정확한 것 같아요.”
영화 <밀수>에서 고민시가 연기하는 고옥분은 밀수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다방 마담이다. 밀수에 가담한 해녀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로 그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군천 바닥의 정보를 수집하며 춘자와 진숙을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양장과 한복을 오가며 화려하게 스타일링하고 푸른색 아이섀도와 새빨간 립스틱 등 레트로 무드로 한껏 치장한 고민시는 존재만으로 현장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정말 촌스럽게 나오거든요(웃음). 스태프들이 제 얼굴만 보면 웃더라고요.” 성이 같아 처음부터 친근하게 느껴졌다는 고옥분은 오랜만에 그녀에게 맡겨진 감초 역할이다. <마녀>와 <좋아하면 울리는>에서 그녀가 보여준 사랑스럽고 통통 튀는 연기를 좋아한 사람에겐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저도 그때가 생각나 재미있게 연기했어요. 연기적으로 돋보이기 위해 너무 애쓰기보다 주어진 역할을 매력적으로 살리자고 마음먹었죠. 아주 천연덕스럽게요.”
많은 분량을 이끌진 않았지만 선배들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으로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던 소중한 현장이었다.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김혜수, 염정아 선배님은 연기하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정말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혜수 선배님의 눈빛, 평소에는 너무 재미있고 친근하지만 촬영을 시작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정아 선배님의 반전 매력, 유쾌한 이야기꾼이신 (김)종수 선배님과 친근하고 배려심 많은 (조)인성 오빠,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슛’ 하는 순간 발산되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한 (박)정민 오빠까지, 눈이 굉장히 바쁜 현장이었죠. 연기에 대해 정말 많은 걸 느끼고 배웠어요.” 하지만 다른 배우들이 고민시로부터 받은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염정아는 개인 인터뷰에서 고민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아유~’라는 감탄사부터 내뱉었다. “어쩜 그리 귀여운지. 선배들한테도 너무 잘하는데 억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스스럼없이 너무 잘하는 막내죠.” 고민시는 촬영하는 동안 언니들과 밥 같이 먹고, 맛있는 것 나눠 먹고, 이리저리 많이 걸어 다닌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류승완 감독과의 만남도 행복했다. “감독님 특유의 오케이 사인이 있는데 그걸 들었을 때의 희열이 엄청나요. 감독님을 필두로 이렇게 끈끈한 팀과 6개월을 함께할 수 있어 운이 좋았죠.” 화보 촬영이 시작되기 전, 김종수 배우의 대기실로 쪼르르 달려가 한동안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던 고민시에게 고옥분으로 살았던 몇 해 전 여름을 떠올리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새로운 가족과 함께 보낸 밀도 높은 여름은 너무나도 행복했으니까.
고민시는 꾸준히 바쁘다. <오월의 청춘>과 <지리산> 이후 곧바로 <밀수>와 <스위트홈> 시즌 2와 3를 촬영했고, 또 하나의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작품에서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제가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쉬지 않고 달리고 있습니다.” 갈피가 잡히지 않을 땐 강력한 멘탈의 소유자인 그녀도 지치지만, 스토리텔러로서 좋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갈망이 고민시를 계속 전진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첫 정통 멜로 주연작이었던 <오월의 청춘>은 무척 의미 있는 작품이다. 고민시는 과거 <보그>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고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지만, 역사 한가운데로 이들을 데려오자 벌어지는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이런 드라마는 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배우의 매력은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작품을 남기는 것이죠. 이런 작품은 길이 남을 가치가 있었고, 그 일부가 된다니 자랑스러웠어요.” 스물한 살 때 상경해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연기 학원을 다니며 연극영화과 입학시험을 준비했지만 떨어지자 그녀는 아예 영화를(<평행소설>과 <Cut!>) 만들고 스스로 주연이 됐다. 디테일한 연기를 선보이는 것만큼 매력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희열은 고민시에겐 무척 소중하다. 삶과 죽음에 대해 꽤 자주 생각하는 그녀는 최근 영화 <슬픔의 삼각형>을 재미있게 봤다. 밀려오는 감정에 고요히 침잠하는 순간을 숭고하게 여기는 고민시는 그래서 영화와 이야기를 사랑하고, 스토리텔러의 자부심을 안고 배우로서 살아간다. 배우가 되는 것만큼이나 관객이 되는 것도 즐기는 그녀는 <밀수>를 꼭 극장에서 봐달라고 간청했다. “아이맥스로도 개봉하니까 꼭 넓은 스크린에서 실제로 물에 흠뻑 젖듯 몰입하며 보셨으면 좋겠어요. 거기에 장기하 음악 감독이 작업한 1970년대 대중음악으로 빼곡히 채운 영화 OST에 몰입하다 보면 가슴이 아주 웅장해질 거예요.”
현재를 충분히 즐기며 똑똑하고 당돌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가는 배우. 일에 몰두하며 잔뜩 긴장한 몸과 마음은 여전히 운동으로 누그러뜨리곤 한다. “발레와 등산에 이어 최근에는 수영과 헬스에 재미를 붙였어요. 덕분에 근육이 많이 생겼죠. 몸도 더 탄탄해졌고요. 바쁠 때도 운동은 꼭 해요.” 2년 전과 비교할 때 달라진 건 짧아진 머리카락 정도다. 액션 신이 부쩍 늘어난 <스위트홈> 새 시즌을 위해 그녀는 머리카락을 칼단발로 잘랐다. 헤어스타일이 미니멀하고 모던해지자 스타일링은 조금 더 과감해졌다. “예전에는 편안한 스포츠웨어만 고집했다면 요즘은 박시하거나 아방가르드한 실루엣의 옷도 고민 없이 입어요. 지금 입은 미우미우 재킷처럼요. 재미있는 실루엣을 지닌 과감한 드레스도 자주 찾고요. 스타일링에 재미가 붙었어요.” 데뷔 이후 지금까지 인스타그램 속 그녀의 패션은 날로 다채로워졌다. 매거진 패션 화보에도 자주 모습을 비친다. 컨셉은 제각각이지만 고민시는 언제나 새로운 스타일도 자기 것처럼 자유분방하게 소화해낸다. 중심이 단단한 사람은 환경에 쉬이 휩쓸리지 않는 법이다. 의외의 상황과 환경에 처하더라도 유연하게 방향키를 틀 줄 안다. “잘할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어떤 상황에도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죠.” 높은 파도가 밀려올 때 고민시는 파도에 삼켜질 게 아니라 몸을 맡기고 파도를 탈 생각을 한다. 그리고 파도와 한 몸이 되면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어진다. 고민시는 1995년생이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나이다. 일찍부터 배우라는 꿈에 확신을 가졌으며, 주연 배우가 됐고, 연차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시간은 여전히 뜨겁고 이르지 못한 땅도 많다. 그러나 조급하지 않다. 고민시가 생각하는 성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에 이름을 올리고 싶은 욕망. 그게 제일 크죠. 그리고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 마지막으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거 먹으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 그걸 성공이라 여길 줄 아는 삶이 성공한 삶 아닐까요?” <밀수> 팀에서 오랜만에 막내를 맡은 고민시는 충분히 행복한 여름을 보냈다. “막내 좋아요. 사랑 많이 받잖아요. 언니 오빠들 예쁨 받으니 너무 좋더라고요. 행복했습니다.” 그걸로 충분하다.
아는 남자, 김종수
김종수는 왠지 낯이 익다. 동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얼굴. 그의 영화 이력은 한결 더 친숙하다. “오, 아메리칸 스타일~!”이라는 명대사를 남긴 <극한직업>의 치킨집 사장, <시동>의 중국집 사장, <히트>의 문방구 주인, <밀양>의 부동산 중개인… 드라마<미생>에서는 오상식(이성민)의 직속 상사 김부련 부장으로 영업 본부를 진두지휘했고 최근 영화 <드림>에서는 잘나가던 사장에서 노숙자가 된 김환동 역을 맡아 홈리스 축구 팀의 에이스로 뛰었다. 그뿐인가. 요즘 그는 1987년으로 타임 슬립해 한 지방 소도시의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매주 시청자와 만난다(KBS2 <어쩌다 마주친, 그대>).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가 연기해온 평범한 소시민처럼 실제 그의 일상도 별다를 바 없다. 연기 활동을 위해 약 10년 전 울산에서 서울로 이사 왔다는 그는 성북구의 선량한 소시민으로서 이웃 주민들과 담소를 나누고 성북천 산책을 즐긴다. 그의 SNS에는 자신이 참여한 영화의 홍보 관련 포스팅과 함께 ‘비 오는 삼선교’ 같은 동네 풍경이 종종 업로드된다. 올해 나이 5학년 9반, 현장에선 마음씨 좋은 형님, 일상에선 낭만적인 아저씨, 보통 사람을 연기하는 보통의 얼굴. 하지만 그의 연기 내공은 보통이 아니다.
1985년 울산대학교 재학 시절, 연극 <에쿠우스>로 데뷔한 그는 울산 연극계에서 오랜 시간 활동해온 베테랑 연극배우다. 울산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각종 연극제에서 크고 작은 상도 꽤 받았다. 영화계로 시선을 돌린 건 2007년 영화 <밀양>이 계기가 되었다. ‘진짜 동네 사람 같은 연기자’를 찾던 연출 팀이 울산배우협회를 통해 배우를 모집하면서 그와 동료 배우들이 오디션에 도전해 캐스팅된 것. “이창동 감독님 작품이니까, ‘야, 이거 캐스팅되면 크레딧에 이름도 박히고 참 재밌겠다’ 그런 생각이었죠. 촬영이 끝나니 감독님이 그러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영화 하나 찍었다고 들떠서 괜한 기대나 실망을 할까 걱정되셨던 거겠죠.” 그가 맡은 역할은 밀양에서 부동산을 하는 신 사장으로 송강호의 카센터를 들락거리던 동네 친구. 당시 대구와 서울의 극단에서 활동하던 이성민 역시 그 친구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미생>에서 재회했다. “지방은 무대가 한정적이에요. 나이 든 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죠. 연극을 계속하려면 행정이나 연출을 해야 하는데 전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작은 역할이었지만 현장에서의 경험은 그의 마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밀양>을 찍을 때 송강호 배우한테 질문한 적이 있어요. 영화 <괴물>이 천만을 넘어가고 있을 때였는데, 극 중 한강 매점 안에서 변희봉 선생이 말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잠든 강두(송강호) 옆에서 다른 가족들에게 “깰까 봐. 그래도 강두가…” 하면서 속삭이듯 대사를 하는데 그게 너무 귀에 쏙 들어오는 거예요. 연극에서는 그런 표현을 쓸 수가 없어요. 전달이 안 되니까. 저로선 이렇게 작은 말소리도 녹음이 잘 들어가는지 궁금했던 거죠. 그랬더니 “형님, 영화는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요. 다 돼요”라는 거예요. 그때 제 느낌이 어땠는 줄 아세요? 제가 만약 칼 세 자루를 갖고 있었다면 한 백 자루가 쫙 생긴 것 같달까. 바늘부터 엑스칼리버까지 다 휘두를 수 있다니! 무대는 소극장, 중극장, 대극장이 전부예요. 물론 소극장은 관객을 보면서 연기하는 맛이 있고, 대극장은 액션이 크고 공간을 채우는 맛이 있죠. 그런데 영화는 진짜 땀구멍까지 다 전달되는 거잖아요. 전율을 느꼈어요. 이거 해보고 싶다. 꼭 해보면 좋겠다.” 기회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당시 한예종 교수였던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본 학생들이 그에게 연락을 해오며 단편영화나 독립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필름메이커스 같은 영화인 구인 커뮤니티를 찾고 프로필이 담긴 메일도 직접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는 매일 백 자루의 칼을 갈았다.
“첫 드라마는 곽경택 감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친구, 우리들의 전설>(2009)이었어요. 장례식장을 하는 현빈 씨의 아빠로 출연했죠. 그 전까진 ‘나도 쓰임새가 있나 보다’ 정도의 마음가짐이었다면 그 무렵부턴 욕심이 좀 생겼어요. 어느 분야든 최고로 손꼽히는 전문가들이 있잖아요. 나도 그런 ‘신박한 열정파’와 작업해보고 싶더군요. 그러려면 일단 내 나이대 배우들 중에 리스트업 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섰죠. 그래서 대본이 괜찮고 감독님의 의도가 좋은 작품이면 저예산이든 역할 크기든 따지지 않고 다 해왔던 것 같아요.” 부지런히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린 그는 대한민국 골목 상권의 어지간한 자영업자 역할은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인간미’! 그 푸근한 온기는 사투리 섞인 서울말처럼 숨길 수 없는 배우 고유의 것이어서 포마드 바른 머리의 단정한 수트 차림에서도 배어 나온다. “이병헌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저에 대해 그런 말을 했더군요. 사장 역할을 해도 사장 같고 노숙자 역할을 해도 노숙자 같다고.” 영화 <드림>, <극한직업>, <스물>, 웹드라마 <긍정이 체질>까지 김종수는 이병헌 감독 작품의 단골 출연 배우다.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배우는 어느 단계에서든 그때만 남길 수 있는 흔적이 있다고 봐요. 무명일 때만 맡을 수 있는 롤도 있는 거니까. 인물에 대한 선입견이 없으니 더 진짜 같죠. 알려지지 않았을 땐 또 그런대로 재미있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그는 어느새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올해 개봉을 앞둔 영화만 해도 예닐곱 편. <밀수>도 그중 하나다. <밀수>에서 김종수는 세관 계장 이장춘을 연기한다. 이 분야에선 나름 경력직이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도 그는 1980년대 비리 세관 공무원으로 출연했다. 최익현(최민식)과 최형배(하정우)를 이어주는 장 주임 역으로 별도의 오디션 없이 캐스팅된 첫 작품이었다. “해운대의 한 커피숍에서 윤종빈 감독을 만났는데 그저 얘기 몇 마디 나누고는 ‘됐다’고 한 기억이 나요.” 류승완 감독과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다. “류승완 감독님의 현장은 아주 액티브해요. 수중 액션을 비롯해 쉽지 않은 장면이 많았는데 완벽할 때까지 밀어붙이는 힘이 상당하더군요.” 이번 작품은 그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영화 <밀양>이 새로운 꿈을 틔우고 드라마 <미생>이 그의 존재를 알렸다면, 이번 작품은 배우로서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조연이지만 비중도 꽤 있다. 비중이 있다는 건 서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가 맡은 역할뿐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워낙 매력적이에요. 캐릭터들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마을 사람 무리가 있는데 나중엔 걔들 얼굴만 봐도 웃겨. 조합이 너무 좋아요.”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어촌 마을은 그에게 옛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1964년생인 그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중학교 때 전포동으로 이사 갔는데 그 전엔 남천동에 살았어요. 방파제 앞 좌판에선 해녀들이 해산물을 팔고 노천 시장의 생선 장수들은 즉석에서 붕장어 회를 떠줬죠. 온통 흙바닥에 가게가 즐비하던 짠 내 나는 항구 마을. <밀수> 촬영지가 동해였는데 딱 그 시절의 풍경을 재현해놔 깜짝 놀랐어요.”
장도리 역의 박정민과는 전작 <시동>에서 중국집 사장님과 가출 청소년으로 호흡을 맞췄다. 후배들에게 그는 격의 없는 선배이자 정 많은 형이다. <밀수>를 찍으면서 그는 촬영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조연 배우들을 따로 불러 맥주를 사주며 격려했다. “늦게 온 형도 있다.” 물고기 비늘만큼 숱한 경험으로 단단하게 빛나는 내공을 쌓은 그는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 연기라는 일을 즐기고 열심히 하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걸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다. “어떻게 보면 밀알 같은 인연 하나로 여기까지 온 건데, 기적 같은 일이죠. 너무 감사하고요.” 요즘 그는 행복하다. 그를 찾는 현장이 있고 그를 기다리는 대본도 있다. “예전에 혁권(박혁권)이네 집에 가보면 대본이 수북이 놓여 있는데 그게 참 부러웠어요. 독립영화를 함께 찍은 인연으로 가까워져서 서울을 오갈 때마다 신세를 많이 졌거든요. 괜한 여관비 쓰지 말라고 아예 집 열쇠를 주고 가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새 우리 집에도 대본이 쌓여가요. ‘성공했네’ 싶죠.” 그가 생각하는 성공한 인생이란 ‘나답게 사는 것’. 그는 진정성 있는 연기에서 그 답을 찾는다. 물론 후배들에게 언제든 술과 밥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영화 일을 시작하며 바란 작은 소망들이 하나둘 이뤄지고 있다.
“김의성 배우가 그런 얘길 해요. ‘형, 우리 나이에 상승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아.’ 맞는 말이죠. 제가 마흔셋에 첫 영화를 했어요. 역할에 한계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늦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영화라는 건 말을 거는 거니까. 재미있는 이야기엔 나이가 따로 없잖아요?” 류승완 감독은 <밀수> 후반 작업이 한창이던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목표가 ‘너무 재밌어서 앉은자리에서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가 되는 거라 말했다. 김종수는 분명 기대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날 거라 자신한다. 열심히 만들었다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다. “우리 동네 커피숍 사장님도 매일 열심히 장사하고, 끝나면 청소하고 또 준비해요. 자기 시간을 갖기 힘들 만큼 열심히 살죠. 극장에 오는 대부분의 관객이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런 분들이 모처럼 영화라는 세계에 풍덩 빠져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배우들은 이야기의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새롭고 흥미로운 사건을 일으킨다. 이 노련한 배우는 드디어 물을 만났다. 온종일 파도를 타도 지치지 않는다. 삶의 속도에 관한 흔한 비유 중에 인생 시계라는 게 있다. 100세 시대인 요즘은 100년의 시간을 하루 24시로 나눈다. 김종수의 시계는 이제 막 오후 2시를 지났다. 밖은 훤한 대낮이다. 물놀이는 아직 한창 즐겁다. 이미혜 칼럼니스트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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