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ing Soulfulness
미래로 가는 열차가 도착했다. 지루하고 삭막한 도시를 아름답고 유쾌한 삶의 공간으로 바꾸는 토머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 지금 문화역서울284에서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그의 작업을 총망라한 <헤더윅 스튜디오: 감성을 빚다> 전시가 6월 29일부터 9월 6일까지 열린다.
뛰어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아티스트로서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우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2010년 토머스 헤더윅이 상하이 엑스포 영국관의 총괄 디자인을 맡았을 때, <타임>지는 6만6,000개의 씨앗을 담은 6.7m 높이의 광학 막대로 이뤄진 ‘씨앗의 성전(Seed Cathedral)’을 그해 최고의 발명품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 거대한 민들레 홀씨 모양의 구조물은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빛의 굴절을 받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16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없는 이상적 장소라면 토머스 헤더윅이 우리의 일상에 건설한 이 유토피아는 누구나 방문 가능하다. 뉴욕 허드슨강 위에 떠 있는 인공 섬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 벌집 모양의 개방형 건물 베슬(Vessel), 용의 비늘을 닮은 구글 신사옥 ‘베이뷰(Bay View) 같은 큰 건물은 물론 2012년 런던 올림픽 성화대, 팽이처럼 빙글빙글 도는 스펀 체어(Spun Chair) 같은 작은 물건까지 그는 마법처럼 우리 주변에 전혀 새로운 풍경을 펼쳐 보인다.
전시는 도쿄에서 시작되어 옛 서울역(문화역서울284)에서 두 달 정도 정차한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공공성과 좋은 건축물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헤더윅 스튜디오의 진지한 고민과 색다른 아이디어를 만나는 유토피아 스테이션이다. 전시를 기획한 현대미술 기획 사무소 ‘숨(SUUM) 프로젝트’의 이지윤 대표는 토머스 헤더윅과 함께 서울 곳곳을 다니며 전시 장소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DDP 개관 당시 <자하 하디드 360°> 전시를 기획한 그는 1998년 영국 대영박물관 한국관 설립을 시작으로 지난 25년간 유럽과 아시아 미술을 연계해온 글로벌 아트 디렉터이자 큐레이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운영부장으로(2014~2016), 유수의 국내외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로, 오랜 시간 한국 문화 예술의 교량 역할을 해온 그는 K-팝과 드라마, 한국 미술이 전 세계적 관심을 받는 지금이야말로 한국 사회와 공동체의 미래를 내다보는 논의가 필요한 때라 말한다. ‘인간적인 건축’을 강조하는 헤더윅 스튜디오의 전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수많은 영감이 오가는 유토피아 스테이션. <헤더윅 스튜디오: 감성을 빚다>가 공개되기까지, 그 긴 여정에 대해 전시 기획자로서 이지윤 대표가 직접 답했다.
토머스 헤더윅과는 오랜 친구이기도 해요. 언제부터 전시를 계획한 건가요?
1990년대 말 토머스가 하비 니콜스 백화점의 외벽에 인스톨레이션 작업을 했을 때 저 역시 해로즈 백화점의 쇼윈도에서 미디어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어요. 백남준 선생님을 비롯해 빌 비올라, 캐서린 야스 등이 참여한 실험적인 전시였죠. 그때 본 토머스의 작업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전통적인 영국 건축물에 그런 설치미술을 한 사람은 여태껏 없었죠.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됐고, 우리가 실제로 처음 만난 건 2012년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릴 때였어요. 창조적인 발상이 몹시 놀라워서 ‘대체 이 사람의 정체가 뭘까’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건축을 전공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더 참신하게 다가왔고요. 대형 건축물의 커미션 작업은 아직 없었지만 굉장히 새로운 것들을 선보였죠. ‘롤링 브리지(The Rolling Bridge, 2004)’라든지 티켓 하나조차 뱅뱅 돌려가며 뽑는 독특한 방식이었어요. 21세기 산업혁명을 만드는 크리에이터, 토머스 헤더윅!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관심 있게 지켜봤죠.
토머스 헤더윅은 여러 전설적인 건축물을 남겼다. 하비 니콜스 백화점 윈도 디스플레이도 그중 하나다. 토머스 헤더윅은 맨체스터 폴리테크닉에서 3D 디자인을 공부한 뒤 왕립예술대학(RCA)에서 디자인으로 학위를 받았다. 더콘란샵의 설립자이기도 한 영국 디자이너 테렌스 콘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졸업 작품으로 콘란의 런던 저택에 정원용 정자 ‘가제보’를 설치한 그는 1994년 헤더윅 스튜디오를 설립한 후 더콘란샵의 디스플레이를 맡았다. 이를 본 하비 니콜스 백화점 측에서 1997년 윈도 디스플레이를 의뢰한 일이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1층 쇼윈도의 안팎을 구불구불 연결하는 역동적인 형태의 구조물이 백화점 전체를 감싸는 이 파격적인 디자인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롤링 브리지도 빼놓을 수 없다. 헤더윅 스튜디오는 런던 패딩턴 지역의 보행자용 다리 ‘롤링 브리지’를 설계, 선박이 지나갈 때면 공룡 꼬리처럼 팔각형으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펼쳐지는 12m 길이의 다리로 2005년 영국 철조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헤더윅 스튜디오의 성장 과정을 거의 지켜본 셈이군요. 함께 일한 적은 없었나요?
켄 리빙스턴 시장 시절, 토머스가 런던 워털루 브리지 옆에 나란히 가는 가든 브리지를 디자인한 적 있어요. 그 브리지에 코리아 가든을 만들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죠. 결국 현실화되진 못했지만 함께 펀드 레이싱을 뛰며 우정을 쌓았어요. 그리고 제가 국립현대미술관을 떠나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을 때 삼성전자가 ‘콜 드롭스 야드(Coal Drops Yard)’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면서 미디어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또 그를 만났죠. 1800년대 석탄 저장고를 개조한 문화 예술 공간인데 토마스는 그곳의 상징물 ‘키싱 루프(Kissing Roof)’를 만들었습니다. 남아 있던 긴 건물의 지붕 두 개를 연결한 굉장히 특이한 구조의 공간이죠.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어요.
이번 전시는 지난봄 롯폰기 힐스 모리 타워의 도쿄 시티 뷰에서 먼저 공개됐어요.
처음엔 전혀 새로운 전시를 만들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모리 미술관에서 이미 기획 중인 전시가 있더군요. 헤더윅 스튜디오의 주요 작업과 그 모형이 포함된 전시라 제가 계획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았어요. 마침 코로나로 2년째 전시를 열지 못한 상태라 협업할 수 있었죠. 도쿄 전시를 기획한 모리 미술관의 가타오카 마미 관장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현대미술 큐레이터이기도 하고요. 순회전 형식이지만 한국에서는 또 다른 기획으로 전시를 만나게 됩니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전시가 이어지죠.
숨 프로젝트가 기획한 서울 전시는 모리 미술관이 주최한 도쿄 전시와 어떤 차별점이 있을까요?
도쿄 전시는 모리 건설사(Mori Building Co. Ltd)가 개발하고 헤더윅 스튜디오가 일부를 설계한 대형 복합 시설 ‘아자부다이 힐스’의 설립을 축하하는 자리였어요. 반면에 서울 전시는 ‘재생’에 초점을 맞춥니다. ‘콜 드롭스 야드’의 사례와 같이 전통 건축물이나 역사 공간을 창의적인 발상으로 새롭게 만드는 재생 프로젝트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시 장소도 옛 서울역을 택했습니다. 화이트 큐브보다는 옛 서울역 같은 재생 공간이 토머스의 철학을 잘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감성을 빚습니다. 조각 작품처럼요.
그는 이 기묘한 전시 장소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함께 서울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어디에서 전시를 하면 좋을지 의논을 많이 했어요. 1896년에 세워진 스위스 루체른 역을 모델로 한 옛 서울역은 아주 중요한 한국의 근현대 건축 문화유산이죠. 이곳 광장은 늘 여행객으로 북적이고 시위하는 사람과 노숙자도 많지만 헤더윅은 “그것도 우리 삶의 일부”라고 말했어요. 바쁘고 무질서한 풍경 그대로 우리가 안고 가야 한다고요. 서울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에서 재생 철학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헤더윅 스튜디오가 서울시에 제안한 한강 노들섬 재개발 프로젝트 모델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고요.
숨 프로젝트와 컨소시엄으로 같이 하는 일 중 하나죠. ‘노들 예술섬 디자인’은 지명 공모 방식으로 헤더윅 스튜디오를 비롯해 국내외 건축가 7팀이 선정되어 아이디어를 냈어요. 우리는 ‘소리 풍경(Soundscape)’이라는 이름으로 제안서를 발표했는데 그 일 때문에 토머스가 서울에 자주 올 수밖에 없었죠. 동해 쪽에 작은 뮤지엄을 만드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입니다.
노들섬을 자연과 예술, 색다른 경험이 가득한 예술섬으로 바꾸기 위한 헤더윅 스튜디오의 디자인 ‘소리 풍경’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노들섬 위에 떠다니는 음악적 파노라마를 건축적으로 제안한다. 도시를 둘러싼 한국의 산을 형상화한 다양한 곡선 구조물의 상부는 산책로를 만들고, 하부에는 쉼터와 공연장, 액티비티 공간 등을 배치했다.
전시 기간 동안 ‘휴머나이즈(Humanise)’ 캠페인이 열립니다. 이 새로운 건축 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지난 TED 강연에서 토머스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야 할지 얘기했어요. 모더니즘의 유행을 따라 20세기에 쏟아진 수많은 콘크리트 건물은 효율적이지만 너무 지루하죠. 다 부수고 새로 짓는 대신 100년 더 지속될 수 있는 더 장식적이고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 수는 없을까? ‘휴머나이즈’ 캠페인은 지속 가능성과 사람들의 감성을 담아내는 도시 공간을 생각합니다. 미래의 삶과 인간적인 건축에 대한 얘기죠. 서울 전시가 끝나는 올 하반기에는 토머스 헤더윅의 신간 <휴머나이즈>가 출간되면서 다음 챕터가 이어질 겁니다.
토머스 헤더윅의 작업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의 ‘자이츠 아프리카 현대미술관’이에요. 아직 가보지는 못했지만 옥수수 사일로(Silo, 굴뚝처럼 긴 원통형의 곡물이나 시멘트 저장고)를 활용한 아이디어가 무척 기발하죠. 콘크리트 기둥 40여 개로 이어진 옛 곡물 저장고를 아이스크림을 떠내듯 한 스쿱 둥그렇게 떠냈어요. 잘린 단면에선 자연스럽게 벌집 같은 레이어가 드러나고, 그 사이로 예쁘고 멋진 공간이 탄생했죠. 엘리베이터도 세우고 호텔도 넣고 전시실도 만들었어요. 이걸 보기 위해 반드시 케이프타운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어요. 이번 전시에서 그 모형뿐 아니라 사진과 스케치 등 전 과정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낡고 오래된 산업 유산을 현대적인 건축물로 재탄생시킨 ‘자이츠 아프리카 현대미술관’. 아프리카 최초의 현대미술관으로 1921년 케이프타운 항구에 지어진 길고 높다란 원통형 옥수수 사일로의 일부를 곡식의 낱알 형태로 잘라내 미술관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색적인 아트리움을 완성했다.
건축 전시는 이해가 어렵고 눈에 띄는 볼거리가 적다는 불만도 있어요.
제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초기 운영 위원으로 참여할 때 제기되던 문제도 ‘건축 전시는 재미없다’는 거였죠.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건축에선 드로잉만큼 모형이 중요하죠. 건축가조차 모형을 통해 공간감과 부피감을 시각화할 수 있거든요. 여기서 만드는 어떤 모형 하나는 몇 억 원대예요. 그렇게 고가의 모형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이번 전시에선 예술품 조각과도 같은 섬세하고 정교한 모형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리고 사진과 영상 등의 멀티미디어를 통해 공간을 만든 과정뿐 아니라 실제 이 공간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고자 합니다. 관객이 그 공간을 느끼고 경험하는 몰입감 높은 관람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어요.
이번 전시는 한영 수교 140주년 기념 전시로 선정되었습니다. 올해는 숨 프로젝트가 런던에 설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요. 의미가 남다를 듯합니다.
아시겠지만 토머스 헤더윅은 런던의 상징인 빨간색 이층 버스가 등장한 지 50여 년 만에 ‘루트마스터(Routemaster)의 디자인을 처음으로 바꾼 인물이고, 저 역시 오랜 시간 영국에서 활동해왔죠. 큐레이팅 사무소라는 게 예나 지금이나 흔치 않은 개념입니다. ‘숨’이 무슨 뜻이냐고 종종 물어보시는데, 유럽 미술과 아시아 미술이 숨 쉴 수 있는 그런 전시 기획을 하고 싶었어요. 20년 전에는 한국 작가들이 해외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죠. 아마 2005년 코펜하겐의 샤를로텐보르에서 열린 <Seoul: Until Now!>에서 우리가 한국 작가 25명을 소개한 게 가장 큰 규모의 해외 전시였을 겁니다. 그리고 2006년 런던 아시아 하우스의 첫 한국 현대미술전 <거울 나라의 앨리스>, 2007년 버밍엄 울버햄프턴 미술관에 열린 최정화 작가의 해외 첫 개인전 <Welcome!>, 2008년 리버풀 비엔날레의 <Fantasy Studio>, 2010년 사치 갤러리 <Fantastic Ordinary>… 어떻게 보면 한 시대에 한국 작가의 유럽 전시 일대기를 열심히 쓴 것 같아요.
이제 숨 프로젝트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게 될까요?
헤더윅 스튜디오 전시가 종료되기 전, 9월 4일부터 DDP에서 미디어아트 전시가 열립니다. 2021년 런던 ‘180 스튜디오’에서 열린 <럭스(LUX): 새로운 현대미술의 물결>전이 빛을 주제로 동시대 예술가의 새로운 시각언어를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디지털 네이처’를 부제로 테크놀로지 기반의 작가들이 어떻게 자연을 다루고 표현하는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히토 슈타이얼, 랜덤 인터내셔널을 비롯, 코엑스 아티움의 대형 파도로 화제가 된 에이스트릭트까지 쟁쟁한 작가들이 참여한 전시였죠.
일부는 런던 전시와 이어지지만 새로운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전시 역시 새 공간에 맞춰 진화할 겁니다. 숨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하던 때와 달리 문화 예술 교류가 활발해진 요즘은 우리 삶에서 숨 쉬는 예술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됩니다. 공공 미술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겠죠. 더불어 지방 미술관 시대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한국 지방 미술관의 자문과 컬렉션을 만들어가는 일에 집중하고자 해요.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글
- 이미혜
- 사진
- 이우정, 숨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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