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 #3_노멀한 것이 좋아
욕망의 지점에 정확히 착지한 불꽃. 5인의 성감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노멀한 것이 좋아
샐리 루니의 소설 <노멀 피플>의 주인공 메리앤이 한동안 내 마음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메리앤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정서적 차별과 신체적 학대 속에 상처와 결핍을 떠안고 어른이 된 인물이다. 그 때문인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에게 끌린다. 존중받는 것보다 차라리 물건 취급을 받을 때, 그녀의 성적 만족감은 커진다. 성 전문가들은 메리앤의 성향을 ‘서브미시브’라 칭하기도 했다. 메리앤은 피학적 섹스를 통해서만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으니까.
책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다. 언젠가 내게 캥거루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다. 그녀 말에 따르면 캥거루는 때때로 짝짓기 직전에 서로를 죽일 기세로 때리고 할퀸다고 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냐고 묻자 그녀가 답했다. “싸우고 난 뒤에 하는 섹스가 기분 좋잖아. 그게 너무 좋아서 나중에는 의식적으로 싸우게 되는 거야. 상처가 남아 있는 기간이야말로 애틋해지거든.”
캥거루가 정말로 그런 식으로 섹스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당황했다. 나 같은 경우는 연인과 다투고 화해한 후 최소한 일주일 동안은 절대로 섹스를 하지 않았다. 함께 여행을 가서 싸우게 되면 돌아오는 날까지 관계를 갖지 않았다. 나만의 원칙이랄까. 물론 작은 일에 꽁하고 토라져서 섹스까지 안 하려는 쪼다라고 비난받기도 했지만 감정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섹스로 봉합하는 일은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그만큼 성적 취향도 제각각이다. 파트너를 통제하는 게 좋은 ‘사디스트’도 있고 복종할 대상을 찾는 ‘마조히스트’도 있다. 그뿐 아니라 상대방을 찰싹 때리는 행위에 흥분하는 ‘스팽커’라거나 귓가에 더러운 욕설과 음란한 말을 쏟아내는 ‘디그레이더’도 있다. 나에게 캥거루 섹스 이야기를 들려준 그녀는 ‘프레이’라는 성향이었다. ‘프레이’는 피학적인 것을 선호하지만 단순히 복종하는 게 아니라 거칠게 반항하는 자신을 상대방이 제압해주기를 바란다.
그녀가 성향을 완전히 밝히고 난 후부터 나는 최대한 취향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정신이 사나워서 조금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싫다는 것은 좋다는 의미였고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해달라는 뜻이었는데 나로서는 이런 반어법과 설정 같은 게 흥분되기보다는 청기 백기 게임을 하듯 긴장되고 헷갈리기만 했다. ‘안전어’를 설정해서 특정한 단어가 나오기 전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새로운 방식에 내가 영 적응하지 못하는 듯하자 그녀는 되레 나의 성향을 궁금해했다. BDSM 테스트를 통해 내가 어떤 성적 지향점을 가졌는지 확인하니 결과는 ‘바닐라’였다. ‘바닐라’는 무성향자라고도 불리며 상대를 지배하거나 복종하는 것에 자극을 느끼지 못하고 보통의 섹스를 즐기는 걸 의미한다. 결과가 나왔을 때 나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생각해보면 딱히 가학이든 피학이든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일반적으로 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바닐라’는 성향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성향을 찾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부끄러워서 거짓으로 테스트에 응했거나 아니면 경험이 적어서 아직 진짜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단정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매번 잠자리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강행했다.
첫 번째는 SM 플레이였다. 만약 누군가 내 머리에 총을 들이대면서 때리는 쪽과 맞는 쪽 중에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맞는 쪽을 고를 것이다. 때리는 건 강약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합의가 되었다고 해도 나중에 정색하면서 고소할까 봐 두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맞는 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팠다. 아픈 게 쾌락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데 너무 아파서 느끼기는커녕 서럽기만 했다.
두 번째는 카섹스였다. BDSM 계열이 아니라면 야외 섹스 같은 것에 흥분하는 성향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었다. 나도 카섹스에는 어느 정도 호기심이 동했는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그냥 좁고 불편했다. 물론 내 차가 너무 작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손 짚을 곳도 마땅치 않고 자세를 바꾸려고 하면 만원 버스 안에서 내리려고 애쓰듯 이리저리 치이는 게 곤혹스럽기만 했다. 차라리 캠핑카라면 좋았을 텐데. 캠핑카에는 씻을 수 있는 화장실도 있고 침대도 있으니까.
세 번째는 역할극이었다. 도전해본 것 중에 그나마 적당한 수준이라면 어느 정도 즐길 수 있었다. 주인과 노예라든지, 선생과 제자 같은 역할을 부여해서 일종의 메소드 연기를 펼치는 건데 그런 건 굳이 BDSM 성향자가 아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플레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요구하는 역할은 내 기준에서 선을 한참 넘는 것이었다. 그런 역할은 도저히 몰입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중범죄자를 흉내 낼 수는 없었고, 게다가 심한 욕을 내뱉어야 하는데 가끔은 내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역할극은 누군가 웃어버리는 순간 끝나버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녀와는 뭔가를 맞춰보기도 전에 결국 이별을 결심했다. 성향이 다르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녀의 마음속에 숨겨진 그늘지고 서늘한 부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도망친 것이다. 그녀는 헤어지면서 의외의 말을 건넸다. 우리의 성향이 서로 맞지 않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섹스가 나쁘지 않았다고. 섹스는 성향만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는 상대와 섹스를 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걸 왜 헤어지는 마당에 깨닫게 됐는지 조금은 억울했다.
<노멀 피플>의 후반부에 여자 주인공 메리앤은 사랑하지 않는 상대와 피학적 섹스를 즐기다가 자기 통제를 하지 못하고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남자 주인공 코널을 찾아간다. 메리앤은 코널과 섹스를 하며 자신을 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코널은 그럴 수 없었다. 메리앤은 코널에게서 성적 욕구를 해결할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그럼으로써 정서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다. BDSM의 울타리 속에 있는 사람이든 상대적으로 무디고 평범한 성적 취향을 지닌 사람이든 결국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나도 사랑받고 싶었고, 그녀도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에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타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할 수 있고, 상대의 유일한 기댈 곳이 되어주는 그 소중한 친밀함. 난 단지 사람이 아닌 그 아름다운 평범함을 숭배하고 싶을 뿐이다. 윤치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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