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 #4_매끈한 만남
욕망의 지점에 정확히 착지한 불꽃. 5인의 성감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매끈한 만남
누군가 섹스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왁싱 숍을 보게 하라. 섹스의 미래는 관악산이 아닌 민둥산에 있다는 이야기다. 누구나 섹스에 관해 야릇한 판타지를 갖고 있겠지만 내 경우는 왁싱한 상대와의 섹스였다. 심지어 꽤 오래된 판타지로 죽기 전에 꼭 한 번 이루고 싶은 버킷 리스트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스리섬이나 여행지에서 라틴계 이성과의 흐뭇한 만남을 꿈꿀 수도 있겠지만 실현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그럴 배짱도 없었다. 근데 왜 하필 왁싱에 꽂혔냐고? 이제 막 주민등록증에 잉크가 말라가던 어린 시절, “서로 왁싱한 상태에서 관계를 가지면 그렇게 좋대”라는 친구의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그렇게 10여 년을 가슴속에 희망을 품고 살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그 사이 신분당선이 개통했고 정권은 네 번이나 바뀌었으며 세 번의 월드컵을 치렀다. 세상 모든 게 변했는데 내 섹스 라이프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그러나 갈망은 분명 커지고 있었다.
왁싱에 입문한 건 2011년 즈음이었다. <맥심>에 갓 입사한 신입 에디터 시절, 그때는 체험기 같은 르포 기사가 유행이었다. 어느 날 기획 회의 때 ‘남자 왁싱 숍 체험기’ 이야기가 나왔다. 왁싱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고 남자가 왁싱을 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며 특집 기사를 작성하기로 의견이 모였다. 그리고 모두가 날 쳐다봤다. “음? 제가요? 왜죠?” 한 달에 한 번도 부모님께 전화를 하지 않던 나였지만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운운하며 효자에 빙의해 항변했다. 먹히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남자 에디터가 세 명 있었는데 모두 나보다 다섯 살 이상은 많은 선배들이었다. 심지어 유부남도 있었다. ‘그래, 시키니까 해야지.’ 기꺼이 내 털을 뽑아 엄청난 기사를 완성하겠다는 장대한 꿈을 품고 왁싱 숍으로 향했다. 그리고 1시간이 흘렀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 사이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사나이는 태어나 세 번 운다는데 소중한 찬스를 왁싱 숍에서 썼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겪었고 여자 관리사라서 겪은 수모 등을 나열하려니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였다. 짧게 요약하자면 그렇게 민둥이가 됐다.
20년 동안 함께하던 것들이 사라지니 어딘가 어색했다. 관리사는 “한 번도 왁싱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왁싱한 사람은 없어요. 앞으로도 계속하실 거예요”라며 등을 토닥였지만 들리지 않았다. 왁싱 숍 쪽으로는 변도 보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결국 기사는 나왔다. 뭐라고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복잡한 감정으로 휘갈겼는데 편집장은 재미있다며 좋아했다. 선배들도 킥킥거리며 후속 기사로 ‘왁싱한 사람들의 섹스 이야기’를 써보면 어떻겠느냐며 부추겼다.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다. 민둥이들의 성생활 탐구하기. 쉽지 않았다. 누군가가 왁싱을 했는지 여부도 알기 힘든데 그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듣는 건 더 어려웠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내 경험담을 쓰는 거였다. 나는 민둥이가 됐으니 이제 섹스만 하면 됐다. 하지만 섹스 칼럼니스트라고 해서 밥에 김치 먹듯이 매일 섹스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때는 여자 친구가 없었다. 여자 친구가 없는데 어디서 섹스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왁싱 후에는 유효기간이 있었다. 왁싱하고 최소 2주 정도가 민둥 기간이었고 이후부터는 샤프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왁싱하고 2~3주 안에 섹스를 해야 했다.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모는 죽순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결국 기간 안에 섹스는 실패했다. 어쩔 수 없이 친구 중에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릴 때부터 성욕이 남달랐다. 첫 경험도 또래보다 일찍 했고 누구보다 섹스 경험이 많고 지식도 해박했다. 그 친구가 신세계를 들려줬다. “누리야, 둘 다 왁싱한 상태에서 하잖아? 그럼 정말 미쳐. 일단 둘 다 보드랍잖아. 그리고 엄청 촉촉해져. 아니, 왜 좋은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그동안의 섹스가 신세계라면 왁싱한 뒤의 섹스는 신세계 본점이라니까. 차원이 다르다는 말로도 부족해. 아예 다른 경지야.” 그 친구는 침을 튀겨가며 왁싱 후 섹스를 찬양했다. 그때부터 ‘므흣한’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부드러운 살결의 만남, 그렇게 다를까?
다시 또 올 거라는 관리사의 말대로 그 후로도 왁싱 숍을 찾았다. 민둥이의 삶에는 이점이 훨씬 많았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털을 주신 이유도 있겠지만 그걸 뜯을 기술도 주신 이유도 분명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렇게 시간이 제법 흘렀다. 어느덧 연차가 쌓인 에디터가 됐고 온갖 주제로 섹스 칼럼을 썼다. 하지만 여전히 왁싱 후 섹스는 꽤나 오랫동안 판타지로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사랑도 섹스도 쌍방이다. 나만 왁싱을 했다고 해서 최상의 섹스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왁싱한 상대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있는 여자 친구 손을 잡고 왁싱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왁싱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룰 꿈으로 가슴속 깊숙이 넣어둔 채 한 해 두 해가 지나갔다.
그러던 중 한 여성을 만났다. 키도 컸고 패션 센스도 좋았다. 무쌍의 고양이 상에, 프로페셔널한 전문직 종사자에, 맑은 날 따뜻한 라테를 시키는 취향까지 잘 맞았다. 이상형 그 자체였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우리는 세 번의 식사와 두 번의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꼬치집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신 날, 우리 집으로 자리를 옮겨 서로의 은밀한 취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왁싱한 이성을 만나보고 싶다고 털어놨다. 말하고도 낯간지러워서 귀까지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 왁싱하고 레이저 제모까지 했는데…”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심장 소리가 옆집까지 들릴 정도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던 그녀는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무쌍의 눈매가 더 야릇하게 느껴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었다. 오랜만에 격렬한 섹스를 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침대 커버가 흠뻑 젖어 몇 년 만에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잤다. 친구가 말한 대로였다. 그동안의 섹스가 국내 음원 차트 순위였다면 왁싱 후 섹스는 빌보드 차트라고 할 정도로 차원이 다른 쾌감이었다. 그 감촉과 감정을 글로 담아낼 수 없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 당신이 아직 풍성이라면 단언컨대 아직 인생 최고의 섹스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섹스의 미래가 궁금하면 어딜 보라고? 왁싱 숍에 정답이 있다. 박한빛누리 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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