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흘리는 여자들
올해 들어 난생처음 탐폰 쓰기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신세계가 따로 없다. 전 세계 수많은 여성이 애용해온 이 검증된 문명의 이기를 나는 왜 진작 사용하지 않았던가. 생리 때문에 운동이나 야외 활동 같은, 소소하지만 실은 중요한 일에 스스로 제약을 뒀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괜히 분하다. 아주 오래전 딱 한 번 탐폰 쓰기를 시도한 적이 있는데, 애만 잔뜩 쓰다 실패했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이물질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서둘러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귀찮은 것, 불편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고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하던 대로, 쓰던 대로 기성 생리대에 손을 뻗곤 했다. 나와 맞는 것을 찾는 수고를 들이는 것보다 ‘이게 나에게 맞다’라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편한 법이다.
다시 탐폰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한 건, 수영에 흠뻑 빠지면서부터다. 자칭 ‘수영인’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한 달에 4분의 1이나 수영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울적하고 짜증 나고 답답하다. 오직 물속에 들어가겠다는 일념이 오랜 두려움의 장벽을 깨고 탐폰에 재도전하게 만든 것이다. 결과는 나조차 놀랄 정도의 대성공, 대만족이다. 이제 나는 피 흘리는 날에도 물의, 파도의 그루브를 탈 수 있게 됐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때, 가장 좋아하는 것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각성과 실천이라는 말은 참 쉽지만, 뭔가를 깨닫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렵사리 알게 된 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일상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겠지. 새해가 되면 사람들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일제히 다짐과 실천 목록을 적고 읊지 않나. 새해를 핑계 삼아, 새해에 기대 어떻게든 자신을 바꿔보겠다는 작심이다. 올해의 절반을 보낸 이 시점에서 나의 작은 작심을 돌아보니, ‘탐폰 쓰기 성공’이라는 말이 반짝이고 있어 꽤 뿌듯하다.
최근 이러저러한 일로 ‘생리하는 여성의 몸’에 관해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돌이켜 보니 ‘나의 생리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말한 적이 거의 없더라. 말한다고 해도 ‘생리한다/하지 않는다’, ‘생리통이 있다/없다’와 같은 단순한 문장 몇 개가 전부일 뿐 생리라는 주제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인 양 넘어가곤 했다. 그저 한 달에 한 번 나 홀로 치러야 하는 귀찮은 일 정도로 생각하며 큰 의미나 가치를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내가 수영에 빠지면서, 조금 더 보태보자면 통증, 질병, 노화와 같은 몸의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면서 몸 상태가 심리와 감정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걸 체감하면서부터 달라졌다. ‘몸이 곧 나’라는 생각이 커지자 생리하는 내 몸도 조금 더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에 영화와 책이 좋은 계기가 돼준다. 개봉 당시에도 화제였던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2018, 감독 김보람)는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전 세대 여성의 생리 역사, 국가와 인종을 가로질러 생리하는 여성의 몸에 관해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할 좋은 영상 자료다. 감독의 생리컵 사용기부터 1930년대생인 감독의 외조모와 여성 가족들의 생리 경험담, 1930년대 세계 최초의 생리컵이 발명된 이후 현재까지의 생리대와 생리컵 등 다양한 생리용품의 역사, 생리하는 여성을 위해 필요한 정책과 제도까지. 이 모든 게 한 편의 영화에 알차게 들어 있다. 실천 없는 각성이라 다소 민망하지만, 나는 <피의 연대기>를 온 가족이 함께 보며 피 흘린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하곤 한다.
생리에 관해 함께 말하기를 시작할 때 그림책을 활용해도 좋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여자아이의 왕국>(창비, 2011). 작가는 이제 막 첫 번째 생리를 시작한 여자아이가 느끼는 낯설고 두렵고 어색한 감정을 놓치지 않는다. 여자아이를 ‘공주’로, 생리를 시작한 것을 ‘여자가 된다’고 표현한 것에 여성의 세계를 좁게 해석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림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작가는 ‘공주’, ‘생리하는 여성’을 거쳐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그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자아이는 점점 더 길을 잘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그 길을 갑니다. 여자아이는 자신이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여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36쪽)
생리를 시작해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있던 여자아이로 시작된 그림은 마지막에 이르러 한껏 치장한 채 말을 타고 열린 문밖으로 나가는 여왕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생리하는 몸 한가운데 있는 나는 미래의 완경을 생각해본다. 더는 피 흘리지 않는 몸을 두고 마치 닫히거나 폐쇄된 상태로 여기는 ‘폐경’이라는 말보다 생리가 완결됐다는 긍정의 의미를 담은 ‘완경’이라는 말이 좋다. 몸이 노화를 겪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는 데는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얼마간의 각성과 실천이 필요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내 몸에 집중하고 최대한 긍정하고 싶다. 피 흘리며 수영하는 나의 몸을 말이다. 그런 만큼 올여름에는 언제든 바다로 뛰어들어볼 생각이다.
- 포토
- 영화 '피의 연대기', Pexels,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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