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의 하루
접시가 놓인다. 말끔히 비운다. 마카오의 하루가 그렇게 저문다.
나는 내가 미식가는 아니라고 여겼다. 특별히 좋아하거나 가리는 음식도 없고, 맛보다 포만감이 절실한 경우도 많다. 대단한 맛집이라도 기약 없는 대기표는 미련 없이 사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탁월한 손맛에도 불구하고 ‘집밥’에 시큰둥해지는 때가 잦아지자 음식에 대한 취향이 까다로워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키지 않는 반찬이 식탁 위에 오른 날엔 입맛대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고, 어느 순간 입맛에 안 맞으면 배가 덜 차도 젓가락질을 멈췄다. 긴 웨이팅을 거부하던 철칙도 여행지에서 꾸역꾸역 찾아간 맛집 앞에서는 쉽게 허물어졌다(도쿄에서 네기토로 오니기리 하나를 손에 쥐기 위해 2시간 동안 추위에 벌벌 떠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찾아보니 ‘미식가’는 ‘음식에 대해 특별한 기호를 가진’ 혹은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걸 즐기는’ 사람에게 모두 건넬 수 있는 칭호였다. 음식에 대한 호오가 분명하다면 누구나 미식가인 것이다. 내가 음식 앞에서 특히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은 환상적인 맛의 조화를 경험할 때다. 생경한 식재료 간의 조합이든, 특정 음식과 음료의 페어링이든, 완벽한 순서로 짜인 코스 요리든, 세심하고 적절하게 배합된 맛의 춤사위를 만나는 일은 나를 언제나 행복하게 만든다.
‘미식’에 집중한 마카오 여행은 그런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번 여정의 베이스캠프는 윈 팰리스(Wynn Palace)와 윈 마카오(Wynn Macau). 비현실적인 도시 풍광을 자랑하는 윈 마카오와 코타이(Cotai) 지역에 자리한 좀 더 모던한 분위기의 윈 팰리스는 포브스 트래블 가이드가 선정한 5성급 레스토랑을 각각 다섯 곳과 세 곳을 보유한 리조트다.이 중 네 곳은 미슐랭의 별까지 품고 있다. 마카오를 방문한 여행자들은 부랴부랴 에그타르트와 육포 맛집부터 찾지만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습기와 열기로 꽉 막힌 비좁은 거리를 헤집고 다닐 필요도 없이 마카오 최고의 레스토랑을 방문하기 위해 그저 엘리베이터 버튼만 누르면 됐다. 핸드백도 없이, 로맨틱한 실크 드레스 차림으로! 설렘을 안고 맨 처음 방문한 곳은 윈 팰리스 1층에 자리한 SW 스테이크하우스(SW Steakhouse). 공연장 VIP석 같은 아늑한 분위기의 테이블에 착석하자 ‘이곳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맛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압도적 비주얼의 해산물과 미국식 스테이크가 앞다투어 등장했다. 2층 접시를 가득 채운 랍스터, 알래스카산 킹크랩, 점보 새우, 제철 조개, 그리고 굴은 호스래디시와 칵테일 소스, 오색영롱한 발사믹 소스에 번갈아 곁들일 때마다 색다른 맛을 발산하며 포만감을 모른 척하게 만들었다. 애플우드로 훈연한 마가렛 리버 안심스테이크와 안심과 등심을 모두 즐길 수 있는 드라이에이징 포터하우스는 조금 뻔하다고 생각했지만, 해산물 다음으로 맛보자 한층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윈 팰리스의 자랑 분수 쇼를 명당에서 쾌적하게 감상할 수 있는 윙 레이 팰리스(Wing Lei Palace)는 특히 기대한 곳. 중국에서 지금 가장 존경받는 셰프로 꼽히는 총주방장 탐 쿽 펑(Tam Kwok Fung)의 리드로 포브스 트래블 가이드 5성급 레스토랑, 미슐랭 1스타,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 등 수많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레스토랑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수준급(이면서 정통에 가까운) 광둥 요리를 맛보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에 더 반가웠다. 다진 새우 살과 캐비아를 곁들인 애저구이와 알록달록한 딤섬을 한데 모은 첫 번째 코스 요리는 조금씩 다양하게 맛보고 싶은 소망을 정확히 채워줬다. 알싸한 쏸라탕, 화디아오 20년산과 달걀흰자 품속에서 뭉근하게 삶아진 랍스터, 거위 고기와 블랙 트러플을 아낌없이 올린 볶음밥은 뒤이어 등장해 기분과 기력까지 한꺼번에 끌어올렸다. 때마침 터져 나온 분수 쇼. 한 점, 한 스푼에 농축된 맛에 집중하는 그때, 하늘 위로 솟구치는 물보라가 내가 할 말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다음은 일식이었다. 정교한 일본 요리법을 추앙하는 윈 마카오의 미즈미(Mizumi)에서 여덟 가지 코스로 구성된 가이세키 요리를 맛봤다. ‘일본 바다와의 대화’ ‘숯의 철학’ ‘태양의 선물’…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적인 코스 이름 아래 제철 생선회와 훈연한 갈치, 와규, 우나기동, 망고 테린과 말차 아이스크림까지 주르르 이어 나왔다. 예술적인 플레이팅은 물론 다나카 1789×샤르티에 사케, 리차드 G. 피터슨 피노 누아, 다위링(Dayuling)산맥의 우롱차 등 술과 차를 유유히 넘나드는 페어링으로 대화는 시시때때로 무르익었다. 누군가 교토에서 방문한 ‘인생 오뎅 바’를 소개했고, 이어 부산과 제주의 제철 생선회에 대한 이야기가, 사케와 위스키로 만든 칵테일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계속 터져 나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맛있는 대화로 가득한 감미로운 밤이었다.
중국 특별 행정구에 속하는 마카오는 반도다. 광둥 부근으로 연결되는 중국 본토로부터 튼튼하고 실한 채소와 향긋한 찻잎을, 아래로 넓게 펼쳐진 남중국해로부터 신선한 해산물을 바로바로 공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150년 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는 동안 고스란히 뿌리내린 유럽 식문화는 마카오의 맛을 의도치 않게 풍성하게 만들었다. 정통 이탤리언 레스토랑 레이크사이드 트라토리아(Lakeside Trattoria)와 타이 푸드를 선보이는 팰리스 카페(Palace Café), 특별히 끌리는 메뉴가 없을 때, 아침, 점심, 저녁, 아무 때나 찾아가도 좋은 다국적 레스토랑 폰타나(Fontana)와 카페 에스플라나다(Café Esplanada) 등 윈 리조트의 미식 지도가 손쉽게 확장된 비결이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아쉬워 윙 레이 바(Wing Lei Bar)를 찾은 다음 날엔 룸서비스로 속을 든든히 채웠다. 잼과 버터류까지 세심하게 준비되는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부터 마카오식, 일식, 한식, 양식 등 폭넓은 라인업과 정갈한 플레이팅을 자랑하는 인 룸 다이닝이 여행 내내 조식을 먹기 위해 폰타나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멈칫거리게 만들곤 했다. 쇼핑타운 윈 에스플라나드(Wynn Esplanade)를 기웃거릴 때는 번스 앤 버블스(Buns & Bubbles)의 갓 구운 페이스트리와 버블티가 심신을 간편하게 위로했다.
푸드 트립의 최종 목적지는 골든 플라워(Golden Flower). 중국 황실 요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레스토랑이라는 짧은 소개문이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마오타이 바이주를 베이스로 만든 시그니처 칵테일 ‘문릿 스프링(Moonlit Spring)’으로 목을 축이자마자 시작된 맛의 향연. 산둥성 장추 지방에서 공수한 파튀김을 솔솔 뿌린 전복구이와 황주로 마리네이드한 꽃게찜으로 구성한 전채 요리는 가능한 한 오래 곱씹었다. 두부로 착각한 부드러운 닭고기가 춤을 추던 치킨 수프와 닭 껍질을 환상적으로 요리한 프라이드치킨은 닭 요리에 일가견 있는 한국인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디저트 9첩 반상이 등장하기 전 눈앞에 놓인 와규 비프 라이스 역시 결코 얕잡아 볼 수 없었다. 소고기, 우설, 골수를 듬뿍 넣고 감칠맛 나게 볶은 이 메인 요리는 ‘볶음밥’이라 칭하기 난감할 정도로 깊은 풍미를 자랑했으니 말이다. 미식의 세계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마지막 만찬이 테이블에 모여 앉은 모든 미식가를 행복하고 겸허하게 만들었다.
마카오 여행에서 나는 시내 투어에 소홀했고, 쇼핑몰과 카지노를 누비지도 못했다. 하지만 맛있는 한입으로 여정은 충분히 풍요로웠다. 마카오의 밤이 쉽게 저물지 못한 건 무언가 아쉬워서가 아니다. 혀끝에 맴도는 감칠맛의 여운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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