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고독
정전이 된 어느 밤, 콰이어트 럭셔리에 도달하다.
경찰, 응급차, 구경꾼들… 퇴근하고 아파트에 도착한 저녁 7시, 이런 광경이었다. 경기도 외곽의 한적한 110동에 무슨 일인가. 더 무서운 건, 무슨 사건인지 궁금하기보다 피곤한데 설마 집에 못 들어가나 하는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는 것. “저 여기 살아요”라고 외치며 구경꾼을 비집고 110동 정문에 당도하자 소방관이 연기가 빠질 때까지 대기하라고 한다. 지하 1층에서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났고, 현장이 정리되는 중이라고. “하… 얼마나요?” 나는 매캐한 연기를 뚫고 나온 소방관에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20분 경과. 끊긴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면서, 소방관에게 그따위로 말했다는 후회보다는 나는 왜 14층에 사는가를 탓했다. 현관문을 열었으나 센서 등이 켜지지 않았다. 110동 전체에 전기가 끊겼다. 온수가 나오는 것에 감사하며 대충 씻고 어두운 거실에 앉았다. 휴대폰은 얼마 안 가 꺼질 것이다.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를 틀었다. 비상용으로 노트북 배터리는 아껴야 했지만 퇴근한 현대인의 ‘불멍’을 건너뛸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볼 게 필요했다. <D.P.> 시즌 2는 정해인이 탈영병을 잡으러 가려고 외출증을 받고 있었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되지 않아 땀이 났다.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든 말든 베란다 창문을 열었지만 뜨거운 공기가 고체처럼 굳어 있었다. 드라마는 탈영한 이유가 밝혀지기 전에 끊겼다. 아직 밤이 길었다.
뭘 할까. 해외에서 사온 수면 유도제를 먹고 누울까. 나는 더운 공기라도 쐬려고 베란다로 나가 캠핑용 의자에 앉았다. 밤이지만 하늘은 까맣기보다 짙은 남색이었고 윤곽만 보이는 산은 검은 짐승 같았다. 이사 온 지 3년인데 처음 보네. 109동은 밝았다. 복도식 아파트라 노랗게 켜진 창문으로 사람들 모습이 비쳤다. 108동도 107동도 밝고 시원하겠지. 그렇게 한 30분 앉아 있었나. 모르겠다. 집에 시계가 없다. 그 역할은 휴대폰이 해왔다. 아침에 깨워줄 알람도 없다. 지각하면 어쩌지. 걱정되고 심심하던 상태는 점차 슬며시 나아졌다. 오늘 밤 아무도 내게 연락하지 못한다! ‘드라마 한 편만 더’ 하다가 늦어지는 시간에 스트레스도 받지 않을 거다. 이 밤은 온전히 내 거다. 냉장고 냄새는 좀 나겠지만.
정전은 계속됐다. 고층에 사는 노인들은 외출하지 않는 듯했고, 경비실에는 배달 온 생수가 쌓였다. 관리 사무소는 간곡하게 이해를 바란다는 공고문을 올렸다. 사흘째엔 경비 아저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외쳤다. “오늘 저녁 7시 정전 해결!” 불행히도 아저씨는 세 번 더 순회했다. “2시간 연장 예정!” “아니, 다음 날 아침까지 복구!”
사흘간 회사에서 배터리를 100% 충전하고 퇴근했지만 집에선 비행기 모드로 뒀다. 아침까지 배터리를 살려야 했고 무엇보다 정전 첫날 밤의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심지어 더워도 정전 상태가 좋기까지 했다. 찬물 샤워를 하고 발가벗은 채 베란다의 의자에 앉는 루틴이었다. 불이 켜지지 않으니 앞집에서 내가 보일 리 없었다. 앉아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응답할 카톡도 없고, 머리에 입력할 정보도 없고, 선택해야 하는 압박도 없었다. 공상이 흘러가게 내버려뒀다. 심리학자 융은 이런 심리적 여행은 자신의 웅크린 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이거야말로 콰이어트 럭셔리다.
콰이어트 럭셔리는 요즘 최대 유행어다. 미디어에선 이것이 재벌 루퍼트 머독 일가가 떠오르는 HBO 드라마 <석세션>의 인기 때문인지, 기네스 팰트로의 ‘스키 뺑소니’ 법정 공방 패션 때문인지 분석에 나섰지만, 어쨌든 화두다. 콰이어트 럭셔리는 보통 이렇게 정의된다. 고급 소재와 장인 정신, 영원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깃든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잘 만들어진 제품을 사면서 지속 가능한 소비를 추구하는 것. 솔직히 내겐 계속 유행을 만들어내야 하는 소비 촉구 기업의 수작처럼 느껴졌다. 인플루언서를 비롯해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에 대한 피로, 시끄러운 옷에 질린 대중의 욕구를 채워줄 다음 유행일 뿐이라고. 콰이어트 럭셔리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아이러니하다. 영화 <타르> 속 케이트 블란쳇의 패션이 대표적인 예인데, 의상 감독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옷을 입히고 싶었다”며 드리스 반 노튼, 질 샌더, 더 로우를 선택했다. 콰이어트 럭셔리가 계급 나누기란 비판도 있다. 모두 브루넬로 쿠치넬리를 살 수 없고, 로고 없는 저 니트가 로로 피아나의 것인지 알아차릴 순 없지 않나.
콰이어트 럭셔리를 이야기할 때 올드 머니와 스텔스 웰스(Stealth Wealth)도 하위 개념으로 자주 언급된다. 올드 머니 스타일이 부와 명예를 물려받은 소피아 리치의 승마라면 스텔스 웰스 스타일은 소형차로 출퇴근해도 휴가는 프로방스의 개인 별장으로 떠난다. 개인 요트나 전용기를 탔을 수도 있다. 물론 SNS에 절대 올리지 않는다.
새로운 용어가 나올 때마다 ‘또야?’ 싶다. 난 콰이어트 럭셔리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정전으로 인한 ‘110동 다큐 3일’이 내겐 콰이어트 럭셔리다. 톰 포드가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두 번 욕조에 몸을 담근다는 기사를 봤다. 어느 유명한 작가는 인터넷과 전화를 쓰지 않는다. 모든 연락은 비서가 처리한다. 정작 비서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릴지 모르지만, 작가는 단절된 시간에 탈고할 수 있을 거다. 연락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위치, 고독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현대 럭셔리가 아닐까. 내가 톰 포드처럼 “반신욕 좀 하고 올게요”라며 사무실을 나갈 수 없고, 비서를 고용할 수도 없다. 내 선에서 콰이어트 럭셔리는 퇴근 후 자발적 고독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정전은 끝났으니 물리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인스타그램을 지웠다. 금요일 저녁이면 카톡도 삭제했다. 주말에 아무 연락이 없었다. (요즘엔 문자나 전화를 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월요일 아침 지하철에서 카톡을 다시 설치하며 어떤 연락이 와 있나 스트레스를 받지만 말이다. 두 번째 목표는 평일 퇴근 후에도 카톡을 삭제하는 것. 중요한 카톡이 오면 어떡하지? 하지만 지금 당장 생과 사를 오가는 응급 상황이 몇 번이나 있을까. 그럴 땐 전화하겠지.
사적인 약속도 줄였다. 심지어 난 관계 중독이었다. 연애도 하와이안 꽃목걸이처럼 계속 얽혀 이어졌다. 심리학자 매슬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훨씬 더 진정한 자신이 된다고 했다. 몽테뉴는 그렇다고 타인의 존재를 완전히 ‘제거’하진 말라고 했다. 그 존재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을 줄여가라는 것. 이를 위해 그가 ‘뒷방’이라고 표현한 자발적 고독이 필요하다.
나는 어제저녁도 호화스럽게 고독을 맞이했다. 호화스럽다는 건 그만큼 얻기 힘들다는 의미다. 휴대폰과 넷플릭스가 구 남친처럼 가끔 그리워졌다. 하지만 매체를 비롯한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는 자기들 생각을 내게 주입시킬 뿐이라고 생각하니 거부가 쉬워졌다. 먼 산을 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나를 돌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이면 공중 부양했다가 일상으로 내려온 기분이었지만. 하지만 같은 자리는 아닐 거다. 10cm라도 다른 곳에 착륙해 이전과 다른 내가 된다고 믿는다. 소방관에게 한숨을 쉬지 않는 인간이 될 수 있겠지.
숯의 화가 이배의 작업실에 간 적 있다. 그는 고향인 경북 청도의 폐교를 작업실로 쓰며,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하루 종일 작업한다. 주변엔 숯을 굽는 가마와 산뿐이어서 철저하게 고요했다. 그는 100년 된 한옥을 개조한 다실에서 혼자 차를 마시거나 선산을 산책한다. 그곳엔 숯과 고독, 규칙적인 작업만 있었다. 청도에서의 하루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고독이 내게 뭔가 더한 걸 줄 수 있지 않을까.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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