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1세대 최명영이 말하는 일상이 예술이 되는 법
단색화 1세대 최명영은 일찍이 평면적 세상에서 안식을 발견했다. 그의 네모난 작업실을 방문해 반복되는 일상이 예술이 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50년 가까이 평면에 골몰한 그가 뻐금뻐금 말을 이었다.
작업실이 아니라 갤러리 같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정갈하게 배치된 그림들이 눈에 띄네요.
오려는 사람이 많은데 사양을 많이 해요. <보그> 인터뷰도 더 페이지 갤러리 이은주 이사가 하도 추천해서 응하긴 했지만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그럴까 봐 염려도 되고요. 인터뷰도 힘들어요. 그러니 이 기사도 그렇게 길게 쓰지 마세요.
정말 궁금한 것만 묻겠습니다(웃음). 작업실에는 매일같이 출근하시나요?
홍익대학교 교수로 오래 있다가 15년 전에 퇴임했어요. 학교를 안 가니까 매일 작업실로 출근하긴 하죠. 이전 작업실이 있던 서교동이 많이 복잡해지기도 했고, 작업 공간이 부족한 것 같아서 신수동으로 옮겨온 게 20년 전쯤입니다. 집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채 10분이 안 걸려요. 작업실로 향하는 코스가 예닐곱 가지 정도 있는데 매번 다른 길로 작업실에 오지요. 같은 코스도 시간대와 계절에 따라 아주 느낌이 달라요. 난 일상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지만 사실 다 다른 거죠. 그림에 대한 철학도 똑같아요.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일상적인 호흡과 느낌을 축적해서 작업을 합니다.
최근 연달아 전시를 하셨어요. 더 페이지 갤러리와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 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30인의 작가 중 한 명으로 단체전 <Art Pick 30>에도 참여하셨죠. 오랜만에 관객을 많이 만났겠어요.
밋밋한 도배지 같은 단조로운 그림을 과연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궁금했는데 근래에는 젊은 층이 단색화를 관심 있게 봐주는 것 같아서 고맙기도 하고, 기뻤습니다.
인상적이거나 즐거웠던 만남이 있다면요.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열린 전시 마지막 날에 어떤 분이 아주 유심히 제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길래 관심이 갔어요. 한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죠. 그림을 참 좋아하는가 보다, 싶었는데 작품 하나를 1시간이나 들여다보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어제도 왔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물리학자래요. 인사를 주고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에게서 메일이 한 통 왔어요. 제 그림 중에서 반복적으로 지문을 찍으며 바탕을 점점 지워나간 방안지 작업이 감명 깊었다고 하더군요. 물감이 묻지 않은 작은 틈으로 보이는 바탕의 섬유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하면서 질 들뢰즈의 책 <차이와 반복>에 담긴 논리를 설명하는데 그 통찰에 깜짝 놀랐습니다. 해양물리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예술과는 거리가 멀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뚜렷한 형상이나 이미지가 보이는 그림도 아닌데 전혀 다른 감수성을 가진 사람한테도 가닿을 수 있구나, 깨달았어요.
선생님께서는 평면에 무엇을 담으려 하시나요? 197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회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평면 조건’ 시리즈를 이어왔는데요.
내 그림은 이미지를 배제한 평상심 같은 거랄까요. 호흡하듯 어떤 행위가 반복적으로 이어지는데 중심은 없는, 전체가 균일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제한된 공간에는 투명한 존재성이 생겨나지요.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어떤 공간감이 느껴지는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반복하는 과정을 어떤 작가는 수행이라고 얘기하죠. 그리고 조건은 곧 컨디션이기도 하잖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의 컨디션, 캔버스의 컨디션, 모든 순간의 컨디션이 과정에 변주를 일으키는데 결국 하나의 균일한 세계를 향해 흘러갑니다. 반대로 평면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동감이 흐르고 있고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평면의 조건이 있다면요.
바탕이 되는 천이 중요합니다. 흰 바탕은 잘 안 쓰고, 아사(삼베) 천 캔버스를 자주 써요. 사실 백색 작업을 참 좋아해요. 예전에는 이천이나 북한산 등지에 가서 백자 파편을 취미 삼아 모아오기도 했는데… 멀리서 보면 다 같은 백색이지만 유약에 따라, 불의 온도에 따라 미묘하게 색깔이 다 다르거든요. 그야말로 오프화이트 컬러죠. 단색화도 색깔이 정말 여러 가지지만 개인적으로 정수는 흰색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사람에겐 확실히 백의민족의 유전자가 있어요.
서양의 모노크롬과 한국의 단색화는 다른가요?
9년 전, 상하이에 전시(<텅 빈 충만: 한국 현대미술의 물성과 정신성>)를 하러 갔을 때 <조선일보> 기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고 이런 대답을 한 기억이 납니다. 서양의 미니멀 아트, 일본의 모노하, 한국의 단색화, 전부 다 같은 평면화거든요. 하지만 방점이 다릅니다. 미니멀 아트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모노하는 작가와 대상, 사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죠. 한국 단색화는 작가의 작업 과정이 중요하고요. 서양의 미니멀 아트는 의도의 결과, 일본 모노하는 관계의 예술, 한국의 단색화는 과정의 예술입니다.
그렇다면 과정의 예술인 단색화의 결과만 맞닥뜨리게 되는 관객은 무엇을 바라봐야 하나요?
작곡가가 오선지 위에 음표를 그려 넣으면서 멜로디를 탄생시키듯이 나도 반복적인 자국을 남김으로써 어떤 느낌을 축적합니다. 본래는 평면이지만 질료에 의해 공간이 탄생하게 되죠. 자, 여기 붙여놓은 세 장의 드로잉을 한번 보세요. (액자 틀에 넣은 듯 가장자리가 각각 빨강, 하양, 파랑으로 물든 흰 종이가 작업실 한쪽에 연달아 붙어 있었다.) 색이 칠해진 테두리 안으로 새로운 공간이 보이죠? 여기에서 관객은 무한한 공간을 상상해볼 수 있겠죠.
선생님은 어쩌다 평면에 골몰하게 되셨나요?
홍익대 미대 신입생 때 석고 데생을 실컷 하고 2학년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정물화만 주야장천 그리게 됐어요. 그러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평면 위에 난데없이 사과와 꽃, 유리병을 그리고 그게 ‘리얼리티’라고 하는데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작업실에 가서 직접 흙으로 뭔가를 빚어보는데도 영 와닿지가 않았어요. 그러다 도서관에서 화집을 보는데 거기에서 러시아 표현주의 화가 카임 수틴의 ‘벨보이’(1928)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년의 손이 정확히 묘사되지 않은 채로 그냥 뭉뚱그려 표현되어 있는데 묘사하지 않아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거든요. 그때부터 재료와 질료를 가지고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게 곧 회화라고 믿었어요. 물감으로 칠한 캔버스를 사포로 갈고 지문을 끊임없이 문질러보기도 하고, 그러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평면 조건’ 시리즈에 본격적으로 몰두했죠. 실험을 계속한 거예요. 롤러로 물감을 평면 바깥으로 밀어내보기도 하고, 먹물을 먹인 한지 위에 송곳을 반복해서 찍어보기도 하면서요. 1990년을 전후로 시도한 ‘수직 수평’ 시리즈는 아주 중요한 작업입니다. 바탕색과 상반되는 색깔의 직선이 반복적인 흔적을 남기는데 그러면서 정신화된 공간인 소지(본래의 바탕)가 탄생하죠.
정상화 화가의 지도로 사범학교에서 미대로 전향했다고 들었습니다. 김환기 화가에게는 예술가의 자세를 배웠다고요. 때마다 훌륭한 멘토들을 만나셨군요.
정상화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용기를 얻어 사범학교 졸업 후에 교직으로 나가지 않고 미대에 다시 입학했어요. 형편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요. 대학에서 만난 김환기 선생님은 가슴속에 길이길이 남을 소중한 이야기를 해준 분입니다. 대학교 4학년 때였어요. 한창 그림을 그리다가 선생님이 쓱 들어오시길래 한마디 듣고 싶어 어물쩍거리니까 그러시더라고요. “1년 대패질한 목수하고 10년 대패질한 목수하고 같은 줄 아나.” 그러고 바로 뒤돌아 나가시는데 얼마나 섭섭했는지요. 그런데 그 말이 평생을 가더라고요.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해라.’
실제로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생 때 오리진과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등의 실험적인 미술 단체를 이끌기도 했어요. 어떤 목마름이 있었던 건가요?
입학하자마자 4·19 혁명을 겪었습니다. 선배들 따라 일주일을 행진해서 광화문까지 나갔다 오고 그랬어요.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로 온 세상이 들끓었을 때예요. 한창 앵포르멜(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 추상회화의 경향으로 서정성이 두드러졌다)에 몰두하던 선배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새로운 미술을 해야 한다고 모두가 그랬죠. 미술의 근원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해서 만든 게 오리진이고, 1970년대부터는 A.G에서 실험적인 입체 작업을 많이 했어요.
돌아봤을 때 가장 즐겁게 작업했다 싶은 순간은 언제인가요?
지금이지요(웃음). 퇴임한 후에 아주 해방감이 컸거든요. 학교에 있을 땐 아무래도 작업 시간이 좀 부족하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자유로워져서 참 좋아요.
화가뿐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오랜 시간 활약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이 있다면요.
그거 참 좋은 질문인데 좀 엉뚱해도 괜찮다, 모범생이 되려 하지 말고 아웃사이더가 되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아요. 조르주 루오와 앙리 마티스가 전부 귀스타브 모로라고, 상징주의를 대표한 이 화가의 제자들이에요. 모로가 그 둘에게 자주 한 말이 남들이 잘 닦아놓은 길로 가지 마라, 너희 길을 찾아가라는 거였습니다. 교수한테 잘 보이려는 학생은 자기 그림을 못 그려요. 예술이 테크닉만으로 잘되지는 않거든요.
특히 좋아하는 예술가가 있으신가요?
저기 보시면 사진이 붙어 있죠? (그가 손바닥만 한 사진 세 장이 붙어 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초상화가 라비니아 폰타나, 마르셀 뒤샹, 피카소입니다. 날카로운 면도칼로 캔버스를 긋는 폰타나의 저 단호함, 현대미술계에 과감한 전환기를 몰고 온 뒤샹의 개척 정신, 피카소의 효과적이면서도 다양한 변주, 작업이 왠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할 때마다 저 사진을 봐요. 교과서 같은 사진이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올바른 길이 보이곤 하거든요.
최근 알민 레쉬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는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9월 7일에는 파리 마티뇽 지점에서 첫 개인전이 열린다고요.
특별한 건 없어요. 거기에도 한번 그림을 보여주면 좋겠다, 그 정도 생각입니다.
파리에 대한 개인적 인상은 어떠신가요? 1967 파리 비엔날레에 참여했고, 2016년에는 페로탕 갤러리에서 이승조, 서승원 화가와 함께 단체전을 선보인 추억이 묻어 있는 도시죠.
대학생 때는 정말 꿈의 도시였지요. 그래서 프랑스어도 열심히 배웠어요. 결국 파리로 진출하지는 못했지만요. 1976년에는 카뉴국제회화제에도 참가했는데 그때 내가 한국 대표 커미셔너였어요. 윤형근, 이우환 등의 친구들과 도록을 만들어서 그걸 갖고 파리로 갔죠. 프랑스 남부까지 넘어가서 니스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후 웃통 벗고 사진 찍던 김중만이랑 미술 평론가 이일 선생도 만났습니다. 페로탕 갤러리는 제자 30명 정도를 데려갔던 거라 의미가 있지요. 오랜만이라 한번 가봤으면 싶기도 한데 컨디션이 어떨지 모르겠군요.
요즘 한국 예술계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계시나요?
모든 것이 세계화됐습니다. 이제 K-컬처도 대단하잖아요. 전 세계에서 뭐가 유명하다 싶으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그 소식을 바로 들을 수 있는 세상이에요. 정보의 부족함이 전혀 없지요. 그런데 그러는 사이 한국적인 정체성은 많이 흐려진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작가들은 캐릭터 같은 걸 많이 그리던데 거기에 한국만의 고유한 정서가 녹아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은 상황이 조금 나은 것 같아요. 무라카미 다카시의 캐릭터에서는 일본의 정서가 느껴지거든요. 그게 아마 과제일 겁니다. 단색화는 지극히 한국적이에요. 한국의 계절과 풍토성이 다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기풍이 생긴 거죠. 정보만 받아들여서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자기만의 논리와 세계가 명확해야 돼요.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뭘까요?
삶을 멀리 보면 좋겠어요. 우리나라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라는 아주 중요한 기구가 있어요. ‘100년 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식의 연구를 하는 곳인데 그런 미래적인 논의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침마다 작업실로 가는 길에 수많은 노인들을 만나요. 80~90대 분들이 은퇴 후에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뭔가를 시작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죠. 참 안타깝습니다. 항상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야 해요. 우리는 정말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자꾸만 되물어야 합니다
현재를 되돌아보게 되는군요. 그림 외에는 어떤 것들에 흥미를 느끼시나요?
음악을 참 좋아해요. 다섯 살 때인가 아버지가 클라리넷을 사와서 연습하시던 것이 기억나는데 음악을 좋아한 아버지의 영향이 아닐까 싶군요. 지금 들어도 현대적인 바흐와 반복적인 느낌이 강한 안톤 브루크너, 여백이 아름다운 현대 작곡가 필립 글래스의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제 그림과 비슷한 구석이 많죠. 작업실 근처에 좋은 음반 가게가 있는데 거기도 가끔씩 드나들고요.
<보그> 촬영에 평소 선호하는 스타일로 임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데님 룩을 고르셨어요.
평소 작업할 때 이렇게 입고 합니다. 요즘은 모임에 가면 감각이 좀 남다른 친구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이상한 무늬가 있는 스카프라든지 빨간 양말이라든지 작은 거지만 뭔가 달라질 것 같은 느낌으로 그런 시도를 하는 거거든요. 아주 작은 변신으로 생활 자체가 달라질 수 있잖아요. 나도 무슨 마음인지 가끔 입지도 않을 옷을 사서 방 안에만 걸어두는데 보기만 해도 기분은 좋더라고요. <보그>에서도 시니어들의 이야기를 많이 다뤄주면 좋겠군요.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서 우리도 뭔가를 시도해볼 수 있겠어요.
지금 꿈꾸는 것이 있으신가요?
여전히 그림이죠. 자려고 누워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곧바로 책상에 앉곤 해요. 종이에 뭔가 끄적거리다 보면 12시가 넘어가더군요. 어떤 때는 심지어 자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 같기도 해요.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입니다. 아직도 내가 몰두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완전히 얻지는 못했어요. 그러니 조금 더 하면 좋겠다, 그런 생각입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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