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사색하는 인간의 그림, 다니엘 맥키니 #여성예술가17

2023.09.05

사색하는 인간의 그림, 다니엘 맥키니 #여성예술가17

사색하는 모든 인간은 아름답다. 가장 은밀한 순간에 멈춘 다니엘 맥키니의 시선.

자신의 작품 ‘Eternal’(2022), ‘Stay Put’(2022)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다니엘 맥키니.

DANIELLE McKINNEY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사색 중인 흑인 여성들. 다니엘 맥키니(Danielle McKinney)의 그림엔 언제나 평온한 적막이 흐른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면 작품 속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은 어떤 상태인지 슬그머니 묻고 싶어진다. 그녀들의 안식을 방해하기는 미안하지만 말이다. 2년 전 LA의 나이트 갤러리(Night Gallery)에서 열린 전시에서 다니엘 맥키니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다. 경고음이 울리지 않는 선까지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그림을 살펴본 기억이 난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어딘가 의뭉스러운 모습으로 집 안에 있는 흑인 여성을 그린 초상화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연이 많아 보였다. 붉은 립스틱, 구불거리며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핑크색 매니큐어… 맥키니는 섬세한 여성의 시선으로 생각 중이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책을 읽거나 러그 위에 나체로 웅크린 흑인 여성을 묘사했다. “그런 감정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을 때 느끼는 공허함, ‘나는 대체 누구일까’ ‘겉모습을 다 덜어낸 그 이면의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진지한 물음을 거듭할 때 느껴지는 미세한 감정의 동요 같은 거죠. 그런 감정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곳이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서양 미술계가 전통적으로 조명해온 흑인은 대개 일하고 있거나, 배경의 일부이거나, 화면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모습이다.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거나, 편히 쉬고 있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흑인 여성이 소파에 누워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본 적 있나요?” 가장 보통의 인물과 순간을 비춘 맥키니의 그림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였다.

저지시티(Jersey City)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맥키니는 팬데믹 시기에 비로소 풀타임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나이트 갤러리를 통해 처음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녀의 작품을 마리안 보에스키 갤러리(Marianne Boesky Gallery)에서도 소개했는데 지난해 10월에는 그곳에서 맥키니의 개인전 <Golden Hour>가 열렸다. 맥키니의 그림은 이미 댈러스 미술관, 마이애미 현대미술관, 허시혼 미술관, 스미스소니언 조각 정원 같은 굵직한 미술관에서도 소장하고, 심지어 비욘세도 맥키니의 그림 한 점을 보유하고 있다. “맥키니가 그린 인물에서는 강한 자의식이 뿜어 나와요. 그들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완벽하게 통제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그런 기운은 한층 강렬해지죠.” 할렘 스튜디오 뮤지엄(Studio Museum in Harlem)의 총감독이자 책임 큐레이터 델마 골든(Thelma Golden)이 이메일로 내게 전한 말이다. “맥키니는 쉬고 있는 흑인 여성의 모습은 어떨 것이라는 사람들의 추정을 확인해줌과 동시에 관객으로부터 적당히 방어적인 거리와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 점이 매력적이죠.”

Dream Catcher, 2021. Photo: Pierre Le Hors

지난겨울 나는 온갖 캔버스가 벽에 줄지어 늘어선 맥키니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짙은 갈색, 주황색, 파란색, 녹색이 주를 이루는 다소 우울한 분위기의 그림 속에서 나른한 모습의 여성들이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진이나 영화에서 본 찰나의 장면을 포착하는 것을 즐기는 맥키니는 작업하며 소울 뮤직과 올드 R&B 음악을 즐겨 듣는다. 그뿐 아니다. 언제나 새까맣게 칠한 캔버스 위에서 작업을 시작하고, 배경과 공간을 먼저 구상한 다음 그 안에 인물을 그려 넣는다. 작업실의 모브 핑크색 테이블 위에 펼쳐진 여러 권의 잡지가 눈에 띄었다. ‘미니멀하면서도 대중적인’ 실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베이에서 주문한 <배터 홈스 앤 가든스> 매거진 과월호와 1960~1970년대 빈티지 잡지가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맥키니는 잡지에 실린 이미지가 무려 비닐을 씌운 소파가 있었던 할머니 친구분들의 거실을 떠올리게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테이블 위쪽 벽에는 세피아 톤으로 바랜 그녀의 아버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맥키니의 아버지는 그녀가 한 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제가 홀로 작업실에서 ‘이래도 괜찮나?’ 하며 혼란스러워할 때 중심을 잡아주는 존재예요.”

이후 그녀가 뉴욕의 갤러리에 있고, 내가 런던에서 지내던 시기에 우리는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마친 맥키니가 남편인 예술가 로버트 로스트(Robert Roest)와 한 살배기 딸 샬롯(Charlotte)과 함께 런던을 잠깐 방문한 것이다. 우리는 반갑게 대화를 나누다가 둘 다 앨라배마의 몽고메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흥분하기도 했다. 외동딸이던 맥키니는 어머니와 이모,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녀의 기억력은 남달랐는데, 친구들과 함께 목련 나무 밑에서 놀던 일, 시골로 가족 바캉스를 떠난 일, 론데스 카운티(Lowndes County)의 소 목장에서 할아버지와 산책을 즐긴 일, 베란다에서 가스펠을 들으며 뜨개질하는 할머니와 할머니 친구들 사이에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던 과거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분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였는데 덕분에 아름다운 추억이 많이 쌓였죠.” 돌아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할머니 집에 가면 온갖 잡지를 갖고 놀 수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마음에 드는 페이지를 잘라서 그걸로 저만의 집을 만들곤 했죠. 아주 안락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어요.”

맥키니는 이후로도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일에 몰두했다.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었어요. 예술은 제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완전무결한 세상이었죠.” 그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여긴 할머니는 맥키니를 미술 교습소로 데려갔다. 열다섯 살 때부터는 어머니가 선물로 사준 니콘 카메라로 친구들 사진을 쉴 새 없이 찍었다. 애틀랜타 미술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게 된 경위다. 이후 맥키니는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고향과 180도 다른 풍경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우울증을 겪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파슨스는 근사한 둥지가 되어주었다. 맥키니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내적인 순간’에 놓인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곤 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 가벼운 스킨십을 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영상으로 담아 ‘친밀함’에 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졸업 후 파슨스 교육 부서에서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사진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야심 차게 모아 공모전에 제출했지만 아쉽게도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팬데믹이 닥치기 전까지 그녀는 침체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Tell Me More, 2021.

그러다 2013년 할렘 스튜디오 뮤지엄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바클리 헨드릭스(Barkley Hendricks)의 자화상을 보게 되었고, 뜨거운 예술혼에 사로잡혔다. (맥키니는 가장 좋아하는 화가로 제이콥 로렌스(Jacob Lawrence),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앙리 마티스를 꼽았다.) “그때까지 그림은 일기 같은 것이었어요. 누군가와 사귀는 동안 생겨나는 아주 내밀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곤 했죠.” 맥키니의 초기 작업은 대부분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 본격적으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어요. 밖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는 일이 어려워지자 대신 붓을 잡았죠. 창작욕을 해소할 다른 창구를 찾은 거예요.” 그녀는 곧바로 빈방에 이젤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나이트 갤러리를 비롯한 여러 갤러리에 직접 연락을 취하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나이트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냥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간 방문한 수많은 갤러리에서 흑인을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은 단 한 점도 볼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말끔히 씻어내겠다고 다짐했어요.” 맥키니의 작품을 본 뉴욕 포트나이트 인스티튜트(Fortnight Institute) 큐레이터도 그녀에게 개인전 기회를 제안했다. 얼마 후, 이번에는 비욘세와 제이 지가 맥키니의 그림을 사갔다. 풍성한 주황색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 위에 십자가 목걸이를 드리운 여인을 그린 그림이었다. “젊은 흑인 여성 아티스트를 후원하고 응원하는 차원에서 구입해주신 것 같아요. 정말 영광이었죠.”

나와의 만남 직후 맥키니는 마리안 보에스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지난 5월 나이트 갤러리에서 또 한 번 개인전(<Metamorphic>)을 펼쳤다. 짙은 녹색이 주를 이루는 최근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대부분은 심연을 응시한다. 요즘 맥키니는 자신의 삶에 일어난 변화에 집중해 더 사색적인 작품을 그리고 있다. “이제는 한 단계 더 성장할 때예요. 파티에 가거나 네그로니에 담배를 곁들이며 스튜디오에서 10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더는 할 수 없어요. 인생에서 경험하게 되는 성장과 그로 인해 삶에 찾아온 신선한 긴장감을 작품에 녹여내고 싶어요.” 맥키니는 최근 인물을 공간 안에 그려 넣기보다 인물 주위에 여백을 남기려는 의도에 집중해 작업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특정 공간에 스스로를 그려 넣는 것 같아요. 관객도 편히 드나들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둘 생각이에요.” (VK)

#여성예술가17

피처 디렉터
김나랑
피처 에디터
류가영
ALEXIS OKEOWO
사진
PIERRE LE H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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