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위크를 물들인 알록달록 헤어 컬러
파리 패션 위크의 마지막 날 아침. 한 달간의 대장정으로 지쳤을 법한 패션 피플들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블로뉴 숲으로 향했다. 지난 시즌에 이어 파리 중심부에서 꽤 떨어진 이곳에서 열린 루이 비통 가을 쇼 때문. 모두가 예상했듯 오프닝 모델은 프레야 베하 에릭슨이었다(오직 루이 비통 쇼에서만 볼 수 있기에 더욱 기대되는 프레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건, 세 번째로 런웨이에 모습을 드러낸 모델 ‘페르난다 힌 린 라이(Fernanda Hin Lin Ly)’! 딱 불량 식품 풍선껌을 연상시키는 분홍 머리칼을 흩날리며 거대한 흰색 모피 코트를 입고 워킹한 그녀는 단 한 번의 등장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콕! 박혀버렸다. 그녀의 정체는? 2013년 시드니에서 길거리 캐스팅으로 발탁된 후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열여덟 살 소녀 모델! 하이패션 무대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늘씬한 몸매와 동양적인 이목구비를 갖춘 페르난다가 누가 봐도 ‘모델감’인 건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요술공주 밍키’스러운 헤어 컬러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녀가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눈에 띌 수 있었을까? 또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일주일 전, 밀라노에선 머리카락의 끝 부분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모델들이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첫 구찌 컬렉션 런웨이에 등장했다. 이때만 해도 데뷔쇼를 앞두고 무엇이든 시도해보고 싶었던 패기 넘치는 디자이너와 다채로운 스타일을 구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헤어 스타일리스트의 일탈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제스키에르 효과일까? 어느새 모두가 분홍 머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디자이너들이 모델에게 알록달록한 헤어스타일을 선사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99년 봄 지아니 베르사체 쇼에서는 케이트 모스가 눈부신 네온 핑크로 물든 모습이었고, 2013년 가을 지방시 컬렉션에서는 주홍, 보라, 파랑, 빨강 등 온갖 컬러의 키스컬(Kiss Curl, 이마에 납작하게 붙인 곱슬머리) 헤어스타일을 한 모델들이 등장했다(분홍색을 맡은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는 고대 로마 동상 같은 헤어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웠다!). 또 소피아 코폴라 감독처럼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분홍 머리를 향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 경우도 있다(<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의 스칼렛 요한슨, <마리 앙투아네트(2006)>의 커스틴 던스트을 떠올려보시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즌이 특별한 이유는 런웨이 쇼를 위한 것, 혹은 영화 속 주인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리얼웨이에서 활용 가능한 헤어스타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난다의 경우 루이 비통 쇼를 위해 따로 염색한 것이 아니라, 평소 그녀의 스타일이었을 뿐이니까. 한때는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어느새 ‘옐로페이퍼’조차 장식하지 못하는 니콜 리치가 지난 연말부터 파랑, 분홍, 보라 등으로 쉴 새 없이 헤어 컬러를 바꾸는 건 트렌드보단 관심을 끌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머리칼이 손상되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한 케이티 페리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알렉산더 왕은 형광펜처럼 새파랗고 강렬한 헤어스타일의 래퍼 샤라야 제이를 뮤즈로 삼고 있고, 크레파스 한 세트의 컬러를 모두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난해한 헤어스타일의 모델 아이린은 어디든 스트리트 사진가를 몰고 다닌다(44만 명이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열광하고 있다!). 또 영국 <보그> 3월호에선 사스키아 드 브라우가 글자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파랑, 보라, 빨강으로 차려입은 화보를 선보였다(가령 파랑 헤어스타일에 파랑 프린트 드레스를 입는 식).
최근 우리는 90년대를 추억하고 놈코어와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어쩐지 단조로운 패션계에 적응하고 있다.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화려한 헤어 컬러는 이 단조로움에 톡 쏘는 탄산수 한 잔 같은 요소가 아닐까?
- 에디터
- 임승은
- 일러스트
- Snow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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