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림의 그림이 주는 이상한 감정 #여성예술가17
오는 11월 페레스프로젝트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여는 유예림 작가. 그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몇 달 전부터 베를린에 체류하며 새로운 도시에서 영감을 흡수한다.
유예림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 관람객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힐 것이다. 덩치 큰 사람들이 이국적인 동네를 거니는데, 그곳은 몸도 마음도 추운 곳임에 분명해 보인다. 스산한 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간 거리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 같기도 하다. 땅속에는 유령으로 보이는 사람이 누워 있고, 강아지도 쓸쓸해 보인다.
“매번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당신이 그리는 인물은 왜 항상 ‘외국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가? 당신 그림의 배경은 왜 언제나 ‘이국’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항상 우물쭈물하며 ‘내가 그리는 그림에 나 자신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았으면 해서 항상 나와 멀리 떨어진 대상을 그린다’는 말로 위기를 모면하곤 합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에요.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푸른 눈의 거구와 그를 둘러싼 각종 터무니없는 상황을 본 적 없으며,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이 거의 명백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려진 표면만큼은 그 무엇보다 뚜렷이 실재하지요.”
유예림 작가는 2022년 기체 갤러리에서 열린 <조상의 지혜>에서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작품으로 관심을 모았다. 20대 미술가 같지 않은 완성도와 독창성으로 호평받았고, 페레스프로젝트 베를린에서의 네 번째 개인전으로 이어지게 된 것. 이번 전시는 지난해에 이어 1년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지난 전시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회화는 필연적으로 시간성을 내포하기에 그림 안에서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시간이 뒤로 가는 것만 같은’ 그림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여기며 신작을 작업한다.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것 자체가 작업자에게는 엄청난 영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딱히 특별한 것을 하지 않더라도요. 내가 사는 아파트는 1960년대 구 동독에 지어진 건물인데, 집 내부는 새로 페인트칠해서 온통 하얗습니다. 내가 입주하기 전에 누군가가 그 전에 살던 사람의 흔적을 덮기 위해 페인트칠을 해놓은 것 같아요.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벽에 칠해진 하얀 페인트, 미처 지우지 못한 얼룩을 보면 이곳에 머문 이를 떠올리게 돼요. 어떤 사람이었을지, 주말 아침에는 이 부엌에서 무얼 요리해 먹었을지, 이런 것들이요.”
베를린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건물과 거리가 많아서 내러티브를 즐기는 그녀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도시다. 하지만 이곳에 온 지 세 달 정도밖에 안 됐기 때문에 이 도시에서의 경험이 11월에 있을 베를린 전시 전반에 큰 영향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번 전시는 서울에서 절반, 베를린에서 절반 준비한 셈이기도 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입출력이 즉각적인 편이 아니고 작업 구상할 때 시간이 좀 필요한 편이라 지금 베를린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는 아마도 그다음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G는 이웃의 오래된 잔디 깎기 기계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지불할 용의가 있다’ ‘하얗고 딱딱한 것’ ‘아기는 가구들이 완벽히 갖추어진 방에서 약간 배가 고픈 채로 태어났다’. 그녀의 그림 자체도 흥미롭지만, 전시 제목이나 작품 제목도 재미있다. 작품 제목은 작품 내용과 깊은 관계가 있을까?
“무언가를 발음할 때 귀에 들리는 방식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외국어에도 관심이 높습니다. 제목을 지을 때도 그것을 소리 내서 읽었을 때 어떻게 들리는지를 고려하면서 만들어요. 물론 제목이 외국어로 번역되었을 때는 정확한 뉘앙스를 파악하기 어려워서 좀 곤란하죠. 제목과 작품은 큰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떠올린 제목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림을 완성한 뒤에 제목을 짓는 경우에는 그림을 오래 바라보면서 제목을 떠올리기 때문이죠. 남들이 보기에 생뚱맞아 보일 수는 있어도 연관이 없진 않아요.”
인터넷을 통해 소개된 이미지를 조합해 새롭게 그리는 제작 방식을 여전히 고수한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주로 구글링을 통해 찾은 이미지를 참조해서 그리는데, 모델을 기용하기는 어렵고 직접 찍은 사진을 사용하기에는 그렇게 사진을 잘 찍는 편이 아니라서 자료를 찾는 방식을 취하게 된 것. 그중에서도 스톡 이미지를 참고하는 편인데, 스톡 이미지의 극단적 포괄(Generic)이 기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복잡한 감정이나 상황을 검색해도 일반화되고 단편적 이미지로 축소시켜서 보여주는 게 무섭기도 하고 동시에 우습기도 하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 작가의 작품에 모두 외국 남성으로 보이는 등장인물만 등장하는 것도 호기심을 자아낸다. 여성의 옷을 입고 있더라도 남성으로 보이는데, 작품 속 성별을 남성이거나 중성적으로 그리는 이유가 있을까?
“이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닙니다. 성별을 상정하지 않고 그리려 해요. 내가 여성임에도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리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어서요. 그래서 신체의 여성적 특성을 소거시켜 표현하는 편인데, 이 때문에 남성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평소 동물이나 사물을 볼 때 성별에 크게 집중하지 않듯이 작품 속 인물을 볼 때도 그렇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이분법의 부정은 젊은 여성 미술가의 현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21세기 미술계에서도 여전히 여성 미술가는 남성 작가에 비해 특별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녀 역시 미술계는 여성의 비율이 현저히 높은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학교에서 흔히 배우는 ‘중요한’ 작가들은 거의 다 남성이라는 점을 항상 의아하게 생각해왔다. 뛰어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유명 작가의 아내라고만 오랫동안 불려온 여성 작가도 많고, 우리나라 미술대학이 매년 배출해내는 그 많은 여성 졸업생은 다 어디로 증발하는지 의문이 든다.
“학교에 입학할 때는 여성의 비율이 절반 이상으로 훨씬 높은데, 졸업 후 필드에 나오게 되면 실상은 약간 다르죠.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로 이동할수록 남성의 비율이 훨씬 높아지는 구조예요.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져온 구조가 벽으로 느껴졌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작품 속 인물을 외국인이라고 지칭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녀는 사실 스스로를 외국인으로 여긴다. 그림 속 사람들은 모두가 흡사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외국인인 것이다. 그들을 다른 존재처럼 묘사하는 큰 이유는 그림 속 인물을 작가와 연관 짓고 싶지 않아서이다. 스스로를 닮은 사람을 그리게 되면 동양인 여성 작가의 ‘마이너리티로서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그림으로만 축소되어 읽혀버릴 것 같다는 우려도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그게 전부가 아닐지라도 작가가 만들어낸 작업이 작가를 닮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고(물론 그런 카테고리화가 중요한 순간도 분명 있겠지만요), 작업을 통해 명백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들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어느 정도 작업과 거리를 두고 싶어요.”
예전에는 작품이 삽화를 연상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회화에 대해 고민했는데,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며 점차 회화의 평평한 표면 그 자체로 관심이 옮겨갔다. 회화의 표면에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니고, 지난 개인전을 준비하며 나무 패널에서 천 캔버스로 재료를 바꾼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나무 패널의 보존 문제 때문에 다시 캔버스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원하는 특정한 질감이 잘 구현되지 않아서 처음엔 애를 조금 먹었기 때문. 나무가 물감과 기름을 흡수하면서 안료가 표면에 착 달라붙는 듯한 느낌을 좋아했는데 천 위에서는 그런 느낌을 내기가 어려웠다. 캔버스의 올 하나하나가 물감을 뱉어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림이 한 군데도 들뜨지 않게, 그림을 천의 표면에 납작하게 안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평평하고 고른 표면을 만들고 싶어서 예전보다 붓 자국도 많이 남기지 않고, 색 대비도 적게 썼다. 나무 패널을 사용할 때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얻어지는 효과였는데, 캔버스는 그게 안되니까 더 고민을 하게 되고 여러 시도도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캔버스 천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회화의 표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이전에는 ‘무엇을 그리느냐’에만 신경 썼고 그 이미지가 안착된 표면 자체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거든요. 흔히 회화의 물성이라고 하면 물감이 흐르고 튀긴 흔적, 두꺼운 마티에르를 많이 헤아리곤 하잖아요. 나 역시 그랬는데 지난 전시를 준비하면서는 오히려 반대로 매끈하고 평평한 회화의 물성을 가늠해보게 되었어요. 건물 벽처럼 납작하고 건조해서 항상 거기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그림에 대해서요.”
이전에는 다소 극적 연출이 두드러지는 이미지에 흥미를 느꼈다면 지금은 비교적 현실과 맞닿은 이미지에 더 시선이 가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변화를 지난 개인전에서 선보였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아직 드라마틱한 생각의 차이가 있진 않다. 여전히 ‘표면’에 대해 고려하며, 최대한 고르고 평평한 표면, 그러나 동시에 오래된 집이나 기차역 같은 비장함을 내뿜는 표면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고민한다.
작가를 사로잡은 도시의 표면과 회화의 표면이 죽음의 페이소스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녀의 작품이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고, 아티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크든 작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봅니다. 활력이 넘치는 삶에 대한 작품 또한 결국엔 죽음을 상기시키는 면이 있으니까요.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온 표면과 시간에 대한 관심도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과 연결돼 있어요. 박물관의 오래된 그림을 볼 때면 그것을 그린 화가의 손길, 몇 세기에 걸쳐 그림 표면에 닿았던 먼지, 숨결, 사람들의 시선 등이 떠오르고, 그 그림이 목도한 많은 죽음과 탄생에 대해 생각합니다. 다만 ‘죽음과 삶’이라는 키워드 자체가 너무나도 거대하고 거창해 보여서 작업을 설명할 때 굳이 이야기하진 않습니다.”
요즘은 집을 자주 그린다. 그녀는 언제나 집에 관심이 컸다. 집뿐 아니라 집이 위치한 동네도 흥미롭게 표현한다.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그리는 집은 ‘즐거운 나의 집’이 아니라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남의 집이다. 낯선 지역의 주택가를 거닐 때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다. 11월 전시에서 그녀 특유의 미스터리한 감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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