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갈피 잃은 세상에 깃발을 세우는 일, 강재영 예술감독

2023.09.01

갈피 잃은 세상에 깃발을 세우는 일, 강재영 예술감독

복합 위기 상황.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을 맡은 강재영은 자연과의 공존, 기본 가치의 회귀를 꺼냈다.

강재영 2023년 청주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할 적임자.”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에 강재영 국민대 교수를 임명한 조직위가 말했다. 화두, 메시지, 트렌드, 정보라는 단어만 보면 혹한다. 흉흉한 세상에서는 어떤 깃발이라도 잡고 싶어져서다. 비엔날레에 주목하는 것도 실은 그 때문이다. 강 감독을 만나러 청주에 내려가면서 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었다.

읽기만 해도 무게감에 짓눌릴 법한 미사여구와 달리, 비엔날레를 열흘 앞둔 강 감독은 밝은 모습이었다. 환기미술관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경기도 한국도자재단 큐레이터 실장, F1963 문화재생사업 총감독(2015~2017년), 밀라노 한국공예전 예술감독(2020~2021), 공예주간 예술감독(2022년) 등을 역임한 그녀는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즉 생명 중시를 바탕에 둔 사람이다. 비엔날레를 앞두고도 “인간을 위한 물건을 만드는 것을 넘어 자연과 공존하는 특별한 공예의 힘을 보여줄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밀라노 한국공예전 예술감독을 맡을 때도 인간 중심의 공예에서 벗어나는 공예를 주제로 삼았다.

은연중 알고 있다. 팬데믹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연성의 회복, 환경을 중시하는 삶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유난히 더웠던 6월, 변덕스럽던 8월은 위기가 코앞까지 왔다는 신호라고들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연과 공존하는 공예’란 말이 선뜻 이해되는 건 아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고 자연과 공생하는 공예란 무엇일까?

조직위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할 적임자”라고 감독님을 칭했다.

그런가? 처음부터 날 적임자로 찍은 건 아닐 거다(웃음). 팬데믹 기간에 밀라노에서 한국공예전 예술감독을 했다. 2020년에는 가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비대면 전시를 했다. 2021년에도 완벽하게 풀린 상황은 아니었기에 이탈리아에 가서 격리해야 했다. 팬데믹이라는 게 잘사는 나라, 못사는 나라 구분해서 온 게 아니잖나. 사실상 인류 전체가 큰 충격을 받으면서 모든 일상이 바뀌었고. 그 시기에 오히려 작가들은 더 고립되면서 창작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 이에 큐레이터들은 ‘예술은 무엇인가’, ‘공예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게 됐다. 나는 플라스틱을 마구 쓰고 버리는 세상에서 오늘날 추구해야 할 공예성은 무엇이며, 창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되돌아봤다. 인류 문명의 위기 속에서 공예를 생각하는 기준을 다시 정립해보자고 생각했다.

코로나 이후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취지로 흘러갔다. 사회적으로 뚜렷한 담론 없이 분산되고 있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화두를 정할 때 어디서 확신을 얻었나.

패션 트렌드를 먼저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공예도 마찬가지다. 공예에 대한 기본적인 지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생각하는 거다. 옛것을 이어가는 전승 공예를 하는 분들도 있고, 잘 팔리는 것들을 만드는 분들도 있다. 비엔날레는 새로운 화두를 던져야 하는 목표가 있으니 현재 공예는 어떻게 흘러가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어디인지 감독으로서 던져보는 거다.

비밀인가?

그런 건 아니다. 돌이켜보면 20세기 공예 운동은 산업혁명의 반대급부로 시작됐다. 당시 기계로 생산한 물건들이 무척 조악했다. 이때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수공예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생활의 격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바로 미술 공예 운동이다. 바우하우스는 완벽한 산업 디자인을 이야기했다. 수공예와 산업 디자인이지만, 두 갈래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삶의 질과 생활의 격을 높이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등장한 거다. 그럼 21세기 공예의 길은 어디가 되어야 하나. 산업혁명 시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물건을, 그것도 싸게 만들어내는데 썩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일회용처럼 물건을 마구 쓰고 버리는 세상이 됐다. 플라스틱 에이지의 폐단이다. 기후변화나 코로나 등 인류가 생존의 위기를 느끼면서 공예에서는 자연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기는 거다.

강재영 예술감독

비엔날레에서 “자연과 공존하는 공예”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뜻은?

공예가의 지적 설계를 기반으로, 자연의 재료를 가지고 몸을 써서 ‘육화’한 것이 공예다. 기본적으로 몸을 통해 나오는 것으로 자연과 훨씬 더 밀접하다. 예를 들어 붓 하나를 만든다고 치자. 붓대는 대나무 등 식물로 만든다. 붓촉은 족제비 털, 여우 털 등 동물의 털을 찌고 말리고 저장했다가 세척해 가지런히 말아서 고정한다. 붓 한 자루에 동식물, 만물이 다 묻어 있다. 식물의 줄기, 동물의 털, 인간의 손길이 닿아서 만든 붓 한 자루가 움직여야 책이 써진다. 모든 문명은 도구에서 시작되었다. 전 세계의 다양한 필기도구를 통해 책이 나오고 인류가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신적인 것만 높이 사고, 만드는 기능은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건 만드는 과정 자체를 잊은 듯하다. 물건은 공장에서 찍어서 나오는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맞다. 플라스틱 세대에게는 잊힌 자연의 귀환을 이야기한다. 과거와 달리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공존하는 데 의의가 있다. 이 시대가 추구해야 할 정신과 같이 가는 거다. 패션도 마찬가지 아닌가? 사람들이 점점 인조 모피를 입고 환경을 생각하는 제품을 구입하고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쓰는 생활 속 작은 노력을 하잖나. 공예가의 실천은 그것보다 훨씬 자연과 닿아 있다는 거다. 그래서 팬데믹 이후 공예의 길을 생각할 때 자연과의 관계가 훨씬 중요해졌다.

모든 사물은 자연에서 비롯했고, 이미 알고 있는데도 새롭다.

그래서 비엔날레의 주제를 ‘사물의 지도’라고 했다. 밀라노에서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말했는데 그것에서 좀 더 확장된 개념으로 나아갔다. 전 세계 작가들이 참여해 각지 공예의 특성을 경험해볼 수 있어서다. 인도를 보면 한 나라 안에 한대부터 열대까지 기후가 다양하다. 한대 지역에는 양모가 있으니 태피스트리가 발전한다. 중간 기후에는 흙이 많아서 도자기를 생산하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금속 가운데 은이 많아 작품에도 자연스럽게 은을 사용한다. 공예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의 산물이다. 나라별로 자연과 동식물, 인간이 만나 만들어내는 관계의 지형이 공예품이다. 비엔날레에서 작가들이 재료를 가지고 문화적 유전자를 어떻게 발현하는지, 문화적 맥락의 요소를 비교해볼 수 있어 무척 재미있을 거다.

양유완 作
양유완 作

사실 공예는 크래프트, 장인의 키워드에 한정된 느낌도 받는다. 전시를 둘러보니 설치미술 같기도 하다. 공예의 범위를 어디까지 봐야 하나.

최근 해외 비엔날레나 전시회에 가면 공예적 표현이 압도적이다. 여성, 소수자,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면서 커뮤니티 이야기도 하고, 사회적인 내용도 다루다 보니 그것을 보여주는 표현 방식에서 공예 스타일이 나온다. 앞서 말했듯 공예는 커뮤니티, 즉 지역사회의 산물이다. 문화는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도 결부되어 돌아간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지구를 생각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흐름이다. 자연스럽게 예술계에서 공예와 맞닿는다. 가장 오래된 인간 예술의 장르가 공예이고, 자연과 가깝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건축과 미술, 공예가 하나였다. 집을 지으면 문에 장식하는 것, 촛대를 놓는 기물이 공예였고, 공간이 생기면 그림을 걸었다. 어느 순간 미술과 공예를 상위개념과 하위개념으로 나눴지만, 이제 그런 틀이 필요 없어졌다. 특히 비엔날레는 산업적으로 풀어나가는 자리가 아니다. 예술가들의 지적 설계, 어떤 생각을 하고 만들었는지에 주목하는 시각이 중요해졌다.

최근 달항아리나 정다혜 작가의 ‘성실의 시간’이 알려진 후 공예에 열광하는 분위기다. 한국 공예의 세계화라는 측면도 보인다. 실감하나.

우리나라 작가들이 정말 훌륭하다. 손재주는 기본이고 표현력도 좋고, 재료를 해석하는 능력도 좋다. 이번 전시에서 국내 작가, 해외 작가를 안배하지 않고 요청했는데, 모아 보니 반반 정도였다. 정다혜 작가의 경우 주목해야 할 점이 전통 모자의 재료인 말총으로 기물을 만들었다는 거다. 생각을 전환한 아이디어를 높이 사야 한다. 유명해지니 해외에서도 구매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고, 영국에서 인기도 좋았다. 생활의 격이 높을수록 좋은 공예품을 쓰려고 하는 거다.

김준명 作
한정현 作
한정현 作

‘성실의 시간’이라는 작품명처럼 공예는 절대적 시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작업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공예에 열광하는 분위기와 달리 사회에서는 성실의 가치가 빛나는 것 같지 않다.

2021년 밀라노 한국공예전의 주제가 ‘사물을 대하는 태도’였다. 당시 반려 기물이란 표현을 썼다. 대를 이어서 계속 쓰고 싶은 아름다운 기물이 공예품이라는 의미다. 공예는 소량 다종이 기본 정신이다. 한 땀 한 땀 공들이는 것 자체가 공예다운 제작 방식이다. 공예가들은 인류가 함께 쓸 수 있는 물건의 원형을 생산한다. 쉽게 버릴 수가 없다. 가격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고. 또한 작품을 보면 느껴지겠지만, 그들이 만들면 아름다워진다. 여기서 태도가 중요해진다. 만드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어떤 태도로 사물을 만들고 쓰느냐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그런 논의가 비엔날레에서 증폭되기를 바란다.

반려 기물이라니 굉장히 멋지다. 공예를 관념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당연히 공예는 의식주와 관계되어 있고 그것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비엔날레 작품은 다를 수 있지만, 기본 개념이 그렇다. 다만 작가들과 계속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적 설계’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어떻게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왜 만들었는가,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제 21세기의 공예가들은 달항아리를 만들 때 기존 틀을 벗어나 바이오플라스틱을 활용하고, 3D 프린터로 구워낸다. 산업 폐기물 같은 재료로 조명도 만든다. 디자인과 공예를 넘나들고, 예술의 범위를 다양화하는 교집합 안에서 자유로이 설계한 것들을 풀어놓는 거다. 그래서 공예 비엔날레가 쓸모 있고 아름다운 기물만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훨씬 더 넓은 의미, 확장된 의미의 공예로 다시 해석되어야 하고, 새로운 화두를 던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강재영 예술감독

기획자로서 작품을 보는 관람객에게 이것만큼은 꼭 전달되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작품을 보면서 공예가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문명과 함께해온 장르였다는 점을 느꼈으면 좋겠다. 인류 문명의 탄생과 함께한 물건부터 쓸모 있고 아름다운 물건, 지적 설계를 통해 만들어진 모든 물건이 공예의 한 장르다. 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유리, 도자기, 섬유, 나무 등 갖가지 재료를 바탕으로 한 땀 한 땀 들어간 노력의 에너지를 마음껏 받았으면 좋겠다.

2023 청주공예비엔날레(@craftbiennale_2023)
장소 : 문화제조창 본관 및 청주시 일원
기간 : 9. 1(금)~10. 15(일)
관람 시간: 10:00~19:00

포토그래퍼
김민교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