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슈퍼모델의 시대
1990년 10월, 당시 최고의 모델이었던 린다 에반젤리스타는 <보그> 인터뷰에서 “하루에 1만 달러도 벌지 못할 거라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당연하게도, 린다는 언론과 대중의 질타를 받죠. 이후 <가디언>은 이를 마리 앙투아네트의 망언(이라고 알려졌던) “그럼 그들이 케이크를 먹게 하세요”와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린다가 그렇게 말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1990년대는 슈퍼모델의 시대였거든요. 영국 <보그>는 ‘이번 10년은 슈퍼모델의 것이야’라고 공표라도 하듯 나오미 캠벨, 린다 에반젤리스타, 크리스티 털링턴, 신디 크로포드 그리고 타티아나 파티즈를 1990년 1월호 커버 스타로 내세웠습니다. 럭셔리 브랜드는 더 많은 슈퍼모델을 캐스팅하기 위해 전쟁을 치렀고, 쇼의 피날레를 장식한 것 역시 늘 슈퍼모델이었죠. 이후 클라우디아 쉬퍼와 케이트 모스가 합류한 ‘슈퍼모델 군단’은 웬만한 톱스타 못지않은 파급력과 인기를 누렸습니다.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처럼, 슈퍼모델의 시대 역시 2000년대에 접어들며 자연스럽게 저뭅니다. 케이트 모스와 나오미 캠벨이 각종 사건에 휘말리며 활동을 중단하게 된 것이 ‘결정타’였죠. 크리스티 털링턴은 1990년대 중반에 은퇴를 선언하고, 클라우디아 쉬퍼 역시 결혼 이후 패션계와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패션 트렌드가 돌고 도는 것처럼, 슈퍼모델들의 시대가 다시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1990년대 모델들이 그 어느 때보다 멋지고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왔거든요.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케이트 모스부터 볼까요? 지난 2023 S/S 시즌, 그녀는 벨라 하디드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1990년대 특유의 반항기와 무심함을 발산하며 보테가 베네타의 런웨이를 거닌 순간은 2023 S/S 시즌의 ‘베스트 모먼트’ 중 하나였으니까요. 생 로랑의 컬렉션에 참석할 때는 모피 코트를 바닥에 질질 끌며 헤로인 시크의 창시자다운 면모를 뽐내기도 했습니다.
나오미 캠벨 역시 런웨이로 돌아왔습니다. 알렉산더 맥퀸의 2023 F/W 컬렉션에서는 오프닝을, 오프화이트의 컬렉션에서는 클로징을 맡았죠. 여전한 워킹 실력은 물론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전성기 못지않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 프리티리틀씽(PrettyLittleThing)의 디자이너로 나서기도 했고요.
진정한 의미의 컴백을 만들어낸 것은 린다 에반젤리스타입니다. 그녀는 2010년대 중반, 돌연 모든 활동을 중단하는데요. 이후 간간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식을 전했지만, 한때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던 린다의 아름다운 얼굴은 사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2021년, 린다는 자신이 쿨스컬프팅(CoolSculpting)이라는 시술의 부작용으로 지난 몇 년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외적인 콤플렉스로 인해 은둔해온 슈퍼모델의 이야기는 패션계에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죠. 두려움을 극복한 린다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5년 만에 런웨이로 돌아온 것은 물론 며칠 전에는 <월 스트리트 저널 매거진>의 디지털 커버를 장식했죠.
미국 <보그>의 2023년 8월호 커버는 ‘오리지널’ 슈퍼모델 군단이 돌아왔다는 선언문과도 같습니다. 올 초 전이성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 타티아나 파티즈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1990년 1월 영국 <보그> 커버를 장식했던 4명의 슈퍼모델이 다시 한번 모였기 때문이죠. 다가오는 9월 20일에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애플 TV+의 4부작 다큐멘터리, <더 슈퍼모델즈(The Supermodels)>가 방영됩니다.
과거의 슈퍼스타들이 돌아오며 잊혔던 이들 역시 뒤늦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최초의 흑인 슈퍼모델’이라 불렸던 도니알 루나(Donyale Luna)입니다. 그녀는 인종차별의 잔재가 남아 있던 1960년대에 데뷔해 1979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는데요. <보그>와 <바자> 커버를 장식한 최초의 흑인 모델이자, 살바도르 달리의 뮤즈이기도 했던 그녀의 이름은 의아할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내일 HBO에서 공개되는 다큐멘터리 <도니알 루나: 슈퍼모델(Donyale Luna: Supermodel)> 역시 한때 트위기, 베루슈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슈퍼스타의 삶과 족적을 기리기 위함이죠.
애플 TV+는 린다, 크리스티, 나오미 그리고 신디를 두고 ‘오리지널 인플루언서’라 설명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하이패션이 상류층의 고상한 취미에서 ‘모두를 위한 놀이이자 문화’로 변모한 데는 슈퍼모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죠. 이들의 두 번째 전성기는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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