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에서 바라본
하늘이 높아졌다. 시야가 트인다. 마음까지 넓어진다.
가끔 멀리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릴 적 무심코 찾아오던 날고 싶은 충동과 비슷하다. 이상하게 연말이 되면 그 해방감은 한결 절실해진다. 현실은 중요하고, 그에 충실하기 위해 열두 달 동안 애써 삼켜온 감정의 부스러기와 매듭짓지 못한 일이나 관계가 찝찝한 잔여감을 남긴 탓이다. 비슷한 감정 곡선을 따라 흐르던 지난 연말, 드론 포토그래퍼 양건의 사진을 보게 됐다. 드론 사진을 곰곰이 들여다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매끈한 구도와 부드러운 색채는 그의 사진을 한 폭의 정물화처럼 감상하도록 부추겼다. 사람들은 점이 되고, 육중한 건물은 독특한 육체미를 과시하는 귀여운 피사체로 변해 있었다. 다리가 둥둥 뜨는 듯했다. 마음도 조금씩 홀가분해졌다. 이윽고 이 사진을 건네고 싶은 사람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사진으로 연하장을 만든다면 뒷면에 써넣을 문구까지도. “잠깐 / 하늘을 보자 / 고개 들어 하늘을 보자.”(김인복의 시 ‘고개 들어 하늘을 보자’ 中)
해가 바뀌고 나는 양건에게 서울을 주제로 한 드론 사진을 의뢰했다. 첫 촬영지는 왕십리 광장. 아침 8시,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학생과 직장인들 틈에서 드론이 ‘우우웅’ 소리를 내며 상공으로 치솟았다. 30m, 40m, 점점 솟아오르는 드론이 시시각각 스마트폰 화면으로 송출하는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다가 이내 독특한 형상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까이에서는 그저 길고 검은 얼룩에 불과한 그림자가 위에서 보니 귀여운 유령처럼 보인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횡단보도가 피아노 건반처럼 보이고, 잔디밭에 듬성듬성 놓인 원형 테이블과 의자, 그곳에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은 꽃과 벌처럼 보여요. 드론의 눈을 빌려 우연한 아름다움을 포착할 때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이 생기죠.” 날씨가 온화해지며 양건의 작업은 점점 더 속도를 냈다. 여의도 한강공원과 석촌호수, 광화문과 경복궁, 요가와 테니스 경기, 버스킹이 펼쳐지는 서울의 거리를 담은 사진이 공유 드라이브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 날아든 양건의 사진은 소소하지만 충만한 행복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일상을 멈추고, 하늘을 날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남몰래 해방감을 만끽했다.
“서울에서 드론을 띄울 수 있는 최고 고도는 150m예요. 화질을 고려해 보통 30~40m에서 촬영하는데 이번에는 150m까지 올라가서 전체를 조망한 적이 많았어요. 멀리서 바라보고 싶었거든요.” 위성 지도를 관찰하는 오랜 취미를 지닌 양건은 몇 년 전, 지도 앱의 위성 사진으로 바라본 파란 테니스 코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때부터 건물 옥상에 올라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다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드론을 구입했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그는 심미안을 자극하는 드론 사진을 찍게 되었다.
이번 촬영에서 그가 가장 자주 드나든 곳은 한강공원이다. 총 31개 다리가 물을 가로지르고 광나루, 강서, 난지, 뚝섬, 망원, 반포, 양화, 여의도, 이촌, 잠실, 잠원까지 총 11개 공원을 거느린 한강은 서울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서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한강에 얽힌 추억이 있다. 나는 대학 때 가장 친한 친구와 서강대교를 자주 거닐며 마음을 나눴다. 때론 당찼고, 때론 주저했던 수많은 발걸음이 그곳에 묻어 있다. 그때의 고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양건이 포착한 한강공원의 사람들 역시 곳곳에서 각자만의 추억을 만끽하고 있었다. 만개한 벚꽃을 감상하는 연인들, 멀리서 보니 귀여운 풍뎅이처럼 보이던 텐트 속에서 여유를 즐기는 가족들, 버스킹이 시작되니 순식간에 원을 이루던 사람들… 사진가의 말에 따르면 꽃샘추위와 무더위 속에도 한강은 언제나 들뜬 웃음과 대화로 가득한 마법 같은 공간이었다.
뒤늦게 발견한 드론 사진의 묘미는 확대해서 들여다보는 즐거움이다. 6월 21일 올림픽공원에서 펼쳐진 UN 세계 요가의 날 행사에서 촬영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형형색색의 요가 매트만큼 다채로운 사람들의 요가 패션이 눈에 들어왔다. 산뜻한 컬러의 레깅스와 스니커즈, 매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에코 백과 물통까지 다 보였다. 평범한 수요일을 활력 있게 보내는 사람들의 생동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도시 한복판에서 테니스를 즐기고, 노을을 보며 고가도로 아래에서 퇴근 후 피크닉을 즐기는 등 서울 사람들은 어디서든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낭만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계절과 장소, 모임의 성격에 따라 180도 변신하던 패션도 인상적이었죠.”
서울 근교에서 UX/UI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양건에게 서울은 원래 음울한 푸른빛을 띠는 회색 도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6개월 동안 서울 구석구석을 탐방하고 음미한 지금, 그에게 서울은 그 어떤 곳보다 다채로운 색채와 에너지가 넘실거리는 도시다. “사진을 정리하면서 정말 놀랐습니다. 겹치는 컬러가 거의 없더라고요. 아주 멀리서, 때론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서울은 환한 색채로 다양한 사람과 삶을 환대하는 도시로 느껴졌습니다.”
이곳에 실린 사진 18장을 통해 그는 무심코 지나친 공간과 순간, 나아가 모든 존재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평범한 일상은 예술이 될 수 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당신이 발 닿고 있는 곳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그곳에서 이미 행복을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VK)
- 포토그래퍼
- 양건
추천기사
-
여행
풍성하고 경이로운 역사를 품은 스페인 중부 여행 가이드
2024.11.22by VOGUE PROMOTION, 서명희
-
아트
위스키를 음미하는 조해진의 단편소설 ‘PASSPORT’
2024.10.24by 김나랑, 류가영
-
아트
까멜리아상 첫 수상자, 류성희 미술감독
2024.10.31by 김나랑, 류가영
-
아트
조성진, 임윤찬의 뉴욕 필하모닉 데뷔를 성사시킨 미숙 두리틀
2024.10.31by 김나랑, 류가영
-
아트
국내외 젊은 작가들의 전시 3
2024.11.21by 이정미
-
아트
한국 근현대를 담은 사진전 3
2024.11.15by 이정미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