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갱스부르가 살던 집
파리 7구의 고요한 주택가, 대형 그래피티를 그리거나 낙서를 남겨도 불법으로 간주되지 않는 곳. 엄연한 사유지, 그러나 <트립어드바이저>에는 파리 여행 시 방문해야 할 유적지로 등록된 의아한 곳. 베르뇌유가 5번지, 세르주 갱스부르가 살았던 집이다.
1960~1980년대 프랑스 대중음악의 상징이자 문화 아이콘 세르주 갱스부르(Serge Gainsbourg)가 1969년부터 1991년까지 거주한 베르뇌유가 5번지(5 bis Rue de Verneuil)의 시간은 1991년 이후 멈춰 있다. 1980년대에 존재한 통조림이 그대로 놓인 주방, 백조 모양의 팔걸이가 있는 베네치아 스타일의 가구, 열정적인 메모광이던 그가 모은 수많은 종이 조각과 레코드판이 쌓인 난잡한 공간은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 당시의 체취까지 더해져 단추를 세 개쯤 풀어 헤친 셔츠에 담배를 물고 있는 세르주가 여전히 이곳에 머물 것 같다.
이 집의 관리인이자 소유자인 그의 딸 샬롯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는 아버지의 유품을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당시 모습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해왔다. 오래전부터 이곳을 박물관으로 구현하려는 소망 때문이다. 막연하던 바람은 약 5년 전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하면서 전문 큐레이터와 문화재 고문 인력으로 팀을 꾸려 2만5,000점이 넘는 유품을 분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Maison Gainsbourg’라는 이름으로 30여 년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2023년 9월 20일 시민을 향해 열린다. 사유지가 아니라 파리의 유적지로 용도가 바뀌며 모두가 궁금해하던 세르주의 생가에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이다.
샬롯은 방송에 나와 이 집에 대한 감정을 설명한 적 있다. “몽파르나스 묘지의 아버지 무덤 앞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있어요. 찾아가고 싶어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죠. 그래서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대신 이곳에 와서 흔적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어요.” 32년간 오로지 샬롯에게만 허락되었던 이곳에선 파리의 아파트 같지 않은 아방가르드한 실내장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130㎡ 구석구석 세르주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는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다. 18세기에 유행한 달라주 아 카보숑(Dallage à Cabochons) 패턴으로 바닥에 고급 타일을 깔았고 살바도르 달리로부터 영감을 받아 검정 천으로 벽을 덮었다. 대신 문과 창틀에는 흰색 테두리를 둘러 영국 웨지우드 스타일을 적용했고, 이탈리아 조명을 선호했기에 지노 사르파티(Gino Sarfatti)의 조명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메종 갱스부르는 아파트가 자리한 5번지와 뮤지엄, 기념품 숍, 피아노 바인 갱스바(Gainsbarre)가 있는 14번지, 이렇게 두 건물로 구성된다. 관람객은 14번지 입구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전달받아 5번지 집을 관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태어나면서부터 10년간 이곳에서 생활한 샬롯이 간직한 이야기를 그녀의 음성으로 30분간 전달하고, 집 구경을 마치면 14번지 박물관 1층으로 이동해 시간순으로 정리된 유품과 함께 세르주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Je T’aime… Moi Non Plus’를 주제로 준비된 지하층의 기획 전시를 거친 후 반대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화려한 갱스바가 기다린다. (1969년에 발매된 제인 버킨의 앨범에 수록된 ‘널 사랑해… 나도 안 그래’라는 뜻의 ‘J‘e T’aime… Moi Non Plus’는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유럽의 많은 나라로부터 지상파 불가 판정을 받았다. 교황청의 공식 성명까지 발표될 정도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듣지 말라고 하면 더 듣고 싶은 법, 대중에게는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영국 차트 1위에까지 오른 첫 샹송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자크 가르시아(Jacques Garcia)가 인테리어를 담당한 갱스바는 5번지 아파트 실내의 모티브를 토대로 바닥과 카펫, 심지어 문손잡이까지 주물을 떠 똑같이 제작하면서 세르주가 활동하던 시대의 분위기와 그의 심미성을 최대한 반영했다. 샬롯의 음성을 더한 사적 영역의 방문으로 시작해 전시 관람을 거쳐 피아노 바로 마무리하는 동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감동을 선사하려 애쓴 큐레이션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1968년 당시 연인이었던 브리짓 바르도와 함께 살 생각으로 구입했던 곳. 하지만 제인 버킨이 안주인이 되어 1971년 샬롯이 태어나면서 가족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1980년 버킨과 결별한 후 새로운 연인 밤부(Bambou)를 만났지만 세르주는 1991년 이 집에서 홀로 고독한 삶을 마무리한다. 그 후 샬롯의 애착 장소로 32년간 존재했고, 올가을 메종 갱스부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챕터를 연다. 여러 명의 아름다운 여성이 거쳐간 비밀과 컬트적 장소의 주인이 시민으로 바뀐 역사적인 순간, 우리는 샬롯이 준비해놓은 타임캡슐을 통해 1970년대로 시간 여행을 떠날 준비만 하면 된다. 그 준비 전에 메종 갱스부르의 수석 큐레이터 아나톨 마지아(Anatole Maggiar)의 이야기를 들어도 좋다.
타임캡슐처럼 32년간 보관되던 개인 공간을 대중을 위한 새로운 장소로 재창조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우선 샬롯 스스로가 박물관 큐레이터의 자세로 이 집을 잘 지켜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텔레비전과 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베르뇌유가 5번지에 들어섰을 때 세르주가 수집한 전설적인 오브제를 만나는 것도 떨리는 일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놀란 공간은 주방이다. 선반 위에 놓인 1980년대 후반 패키지의 소금, 후추, 올리브 오일, 각종 향신료와 통조림, 파스타 박스 등이 전달하는 시각적 충격은 대단했다. 그리고 이런 오브제를 계속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보존 전문가들과 함께 18개월 동안 공부하고 분류했다. 3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구, 옷, 종이, 레코드판 등 오브제별로 지정된 전통 보존 방식을 따라야 하는데 음식의 경우는 좀 다르다. 특히 통조림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부풀어 터질 수 있기 때문에 특정 화학 처리를 통해 보관해야 한다. 그래서 주방은 큰 도전이자 보존 방식을 배우는 데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1970~1980년대 프랑스의 문화적 바이브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세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오늘날 젊은 세대도 세르주의 시대는 모르지만 그의 삶과 노래를 사랑한다. 그 시기를 살아보지 않은 당신에게 1970년대란?
1989년에 태어났으니 내가 두 살 때 세르주가 사망했다. 당연히 그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훌륭한 음악은 시대를 넘나드는 것이니 여느 프랑스인처럼 그의 음악은 늘 가까이 있었다. 한 사람이 작곡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재능에 감탄하면서 세르주라는 아티스트에 관한 관심이 시작된 것 같다. 사회적 논란이 된 ‘Je T’aime… Moi Non Plus’가 샹송 최초로 영국 음악 차트 1위에 오른 사실과 프랑스 국가 ‘La Marseillaise’를 레게로 바꿔 부른 ‘Aux Armes et Cætera’가 받은 정치적 비난과 젊은 세대의 찬사는 지금 들어도 센세이셔널하다. 당시 50대 중년의 가수를 젊은이들이 우상이자 컬트로 숭배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음악 외에도 주목해야 할 점은 ‘버킨 갱스부르’ 스타일이다. 세르주가 버킨에게 음악적 도움을 주었다면 버킨은 스타일리스트 역할을 해준 셈. 남자들이 셔츠에 넥타이를 매던 시절에 셔츠 단추를 세 개쯤 풀고 레페토 신발을 신도록 권한 것이 그녀다. 나도 지금 셔츠를 풀고 앉아 있는데 (웃음)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20대는 당시 스타일을 따라 하고 싶어 한다. 파리의 10대에게 첫 담배는 베르뇌유가 5번지 앞에서 피워야 한다는 룰이 존재할 정도다.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이 늘 인스타그램을 도배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들이 창조한 1970~1980년대 바이브는 영원히 남을 거라 생각한다.
4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회상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
처음 생가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이다. 그리고 퐁피두 센터의 문화재 보존 전문가 스테파니 엘라비(Stéphanie Elarbi)의 도움으로 컬렉션으로 간주될 오브제를 과학적으로 분류한 긴 시간도 잊을 수 없다. 생가를 관람객의 동선을 고려해 다듬는 일 외에도 14번지 건물을 뮤지엄으로 리노베이션하는 과정 또한 쉽지 않았다. 헬스장과 실내 수영장으로 사용되던 내부를 고치는 데만 2년 반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꼽자면 샬롯이 지극히 사적이고 친밀하며 감성적인 이야기를 공유한 순간이 아닐까. 큐레이터 인생에서 평생 한번 찾아올까 말까 한 뮤지엄 개관 프로젝트가 메종 갱스부르이고, 그것을 세르주의 딸과 함께 진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의미가 크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공간은?
굳이 한 공간을 골라야 한다면 관람객이 가장 마지막으로 들르게 되는 갱스바를 꼽고 싶다. 세르주가 생전에 좋아하던 잉글리시 스타일의 호텔 바-호텔 라파엘과 리츠의 헤밍웨이 바-를 재현했고, 바닥과 벽, 가구 모두 그의 생가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했다. 뮤지엄 운영 시간은 식사와 애프터눈 티 등을 즐길 수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 형태로 운영된다. 그러다 뮤지엄이 문을 닫는 오후 7시 30분부터 은밀하게 숨어 있는 스피크이지 바처럼 벽의 숨겨진 조명이 켜지며 나타나는 악보와 함께 그가 1984년에 구입해 샬롯이 처음 연주를 배운 피아노와 동일한 모델인 야마하 U1에서 라이브 음악이 연주된다. 애주가 세르주가 좋아했던 음료로 구성된 칵테일 리스트도 매우 훌륭하니 기대해도 좋다.
갱스바 옆에는 뮤지엄 숍을 운영 중이다. 일반 뮤지엄과 다른 특별한 굿즈가 있나?
공간 디테일에 최선을 다한 만큼 굿즈 제작에도 힘을 다했다. 빈티지 앨범을 포함해 새롭게 레코드판으로 제작된 세르주의 전체 앨범은 물론, 그와 관련된 책,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으로 탄생한 세르주의 장롱 속 아이템이 기다린다. 그가 즐겨 입은 리 쿠퍼(Lee Cooper)의 하이 웨이스트 진, 레페토의 지지 옥스퍼드 슈즈, 말리(Marly)의 선글라스까지 그대로 재현했다. 선글라스는 제작 가능한 공방이 사라지면서 쥐라(Jura) 지역 문 닫은 공방의 기계를 찾아낸 사람과 연락이 닿아 어렵게 재현할 수 있었다. 도서 섹션도 세르주가 읽었던 책을 장르별로 분류한 후 출판사를 컨택해 동일한 에디션으로 구성하도록 노력했기 때문에 흥미로울 것이다. 이런 심도 있는 큐레이션은 일반적인 뮤지엄 숍과의 차이점을 증명한다. 심지어 연필 한 자루를 제작하는 데도 최고의 디테일을 담았다. 취향에 관해서는 완벽주의자인 세르주의 수준에 맞췄다고 자신한다.
생가를 방문할 수 있는 연말까지의 티켓이 오픈되자마자 7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이런 폭발적인 대중의 관심을 예상했는가?
물론이다. 4년간 이 장소에서 일하면서 하루라도 집 앞에 관광객이 없는 날을 보지 못했다. 많은 인원의 동시 수용이 불가능한 거주용 건물이기 때문에 상태 보존과 안전의 이유로 설정된 1년 최대 수용 인원은 겨우 80~100명이다. 30분마다 2~3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고, 집 전체에는 최대 10명, 한 층에 5명 이상 머물 수 없다. 팬들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 있지만 샬롯이 친한 친구를 초대하는 마음으로 대중에게 문을 열기로 결정했다는 점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적은 인원 방문이 가진 장점은 공간과 깊은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음성 가이드를 통해 샬롯의 안내를 받으면 매우 감성적인 시간을 보내며 최면에 걸린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2만5,000점 중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할 오브제를 관람객에게 추천한다면?
손으로 작성한 3,500장의 악보 가운데 유일하게 단 한 장만 존재하는 ‘La Javanaise’의 오리지널 악보를 추천한다. 악보 위에 선명하게 남은 커피 자국까지 아름답다.
(명곡으로 평가받는 ‘La Javanaise’는 1962년 여름밤 줄리에트 그레코의 집(베르뇌유가 33번지) 거실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돌아온 세르주 갱스부르가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작곡한 사랑을 고백하는 곡이다. 다음 날 그레코에게 보냈고, 1963년에 녹음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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