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편의 강하늘과 이편의 정소민은
우리가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같은 볼륨을 듣던 날. 그 시절의 얼굴인 강하늘과 정소민, 영화 <30일>에서 재회하다.
1만 장을 넘겨도 파란, 강하늘
“이렇게 멋진 옷도 입어보고 좋군요.” 강하늘이 <보그> 촬영 도중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에게 패션은 ‘몸 가리개’ 이상이 아니다. 강하늘은 늘 감사를 표하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넘어가려다 그래도 패션에 관해 묻고 싶었다. 배우도 패션 스타일을 요구받는 시대 아니냐고. “제가 오늘 입은 옷 ‘꼬라지’를 보세요. 아하하.” 그가 하늘색 큰 체크무늬 셔츠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 셔츠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왔다. 01학번인 내가 교정에서 마주친 복학생의 셔츠. 강하늘의 얼굴과 함께 보면 <브로크백 마운틴>의 잭(제이크 질렌할)과 에니스(히스 레저)가 입은 셔츠 같기도 하다. 문득 강하늘이 그런 역을 맡아도 충분히 해낼 거 같았다. 그의 서정적인 얼굴은 영화 <동주>(2016)에서 충분히 검증됐으니까. 당시 청춘의 얼굴은 어느 마운틴에서 벌어진 20년간의 짧은 만남과 긴 그리움을 연기해도 무방할 30대가 돼 있었다.
오늘은 강하늘의 ‘본캐’처럼 유쾌한 코미디 영화 <30일>을 얘기하기 위해 만났다. 사랑했지만 소원해진 부부, 정열(강하늘)과 나라(정소민)가 30일의 이혼 숙려 기간에 사고로 기억을 잃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강하늘은 완성작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공식 상영 전에는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해요. 저는 배우라는 역할에 충실하고, 감독님과 스태프들을 믿고 완성작을 기다리죠. 모두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여요. 그 전엔 영화를 보면서도 저 때 왜 저랬지, 다르게 해볼걸, 많이 아쉬워했죠. 하지만 내가 할 일은 후회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강하늘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 얼마나 현장을 즐기는가,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만족하느냐가 관건이다. “지금 촬영 중인 영화 <야당>도 목표는 한 가지예요. 오늘 하루도 재밌게 촬영하자.” (영화 <야당>은 마약판과 수사기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범죄 액션물로, 유해진, 박해준과 함께한다.) 오늘의 확실한 행복도 중요하지만 배우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지 않을까. 이 역할로 연기력을 인정받거나, 특정 이미지를 구축하거나, 심지어 해외 진출의 디딤돌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제가 그럴 만한 머리가 안 돼요. 아하하. 이 역할로 뭔가 얻겠다란 작전을 짤 마음도 없고요. 그냥 재미있게 찍으면 돼요. 저는 행복하려고 사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웃음이 헤픈가 봐요. 아하하.” 강하늘은 말할 때마다 크고 시원하게 웃는다. 인터뷰에 일일이 쓰지 못하기에 쉼표마다 호쾌한 웃음이 있다고 생각해주길.
강하늘의 ‘과정을 즐기자’란 태도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기점으로 형성됐다. “이전에는 훨씬 더 치열했지만 지금처럼 즐겁지 않았죠.” 강하늘은 선망하던 윤동주 시인을 <동주>에서 연기하면서 중압감에 시달렸다. “괴롭고 힘들었어요. 감독님이 오케이 하면 내가 윤동주 시인을 표현한 장면이 영원히 남잖아요. 이 장면을 평생 후회하지 않을까 생각하면 잠도 안 왔어요. 급기야 이렇게 괴로운 상태로 연기를 계속해도 될지 의문도 들었죠.”
그를 수렁에서 끌어 올린 것은 명상이다. 강하늘은 종종 가는 서점에서 우연히 명상 섹션을 발견했고, 류시화 작가를 비롯한 여러 명상가의 책을 읽었다. 벌써 7년째다. 강하늘은 “명상 얘기를 자꾸 하면 도 닦는 사람처럼 비칠 거 같다”며 웃었지만 요즘 명상은 대중문화다. 과거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강했지만, 하드코어인 세상에서 버텨내야 하는 미생들에게 명상은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흔히 가부좌를 틀고 하는 명상을 떠올리곤 하는데, 종류가 많아요. 걷기 명상, 달리기 명상, 빨래 명상, 심지어 배변 명상도 있어요. 명상이란 하나에 집중해서 잡다한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청소를 하면서 다음 할 일을 생각하지 않고 청소기 한 번, 걸레질 한 번에 집중하는 거죠. 걸을 때도 내 발에 닿는 감촉 하나하나를 느끼는 것이 명상이고요. 그걸 알고부터는 매일 명상하려 하고, 많이 행복해졌어요.” 강하늘의 말은 과거나 미래, 가상 세계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 이는 명상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두려움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사람. 그는 명상을 하면서 우주와 과학, 인문 서적도 탐독하기 시작했다. 군대에서도 여유 시간엔 <코스모스> <사피엔스> 등을 읽으며 보냈다. “얼마 전 초전도체에 대한 뉴스도 유심히 들었어요. 제가 우주, 과학 이슈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에요. 기후변화를 겪는 지구에 어떤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희망에서죠.”
그가 명상으로 얻은 또 하나의 힘은 어떤 상황에도 ‘행복의 틈새’를 발견하는 것이다. 강하늘은 <보그> 촬영일에도 새벽 6시에 일어나 ‘유재석 형님’과 프로그램을 했으니 12시간 가까이 근무 중이었다. 그는 별로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촬영 중간에 편의점에서 음료를 계산하고 나오려는데 직원이 부르는 거예요. ‘원 플러스 원이에요!’ 제가 ‘정말요?’ 대답하고 뒤돌아서 음료를 하나 더 빼왔어요. 언뜻 힘들어 보이는 스케줄이지만 이렇게 사이사이에 재미가 발생해요. 그래서 오늘도 느꼈어요. 역시, 몸은 피곤해도 즐거울 수 있어!” 원 플러스 원의 어떤 점이 재밌었을까, 나는 그 점이 더 신기했지만 이것이 곧 강하늘의 능력치가 아닐까 싶었다. 행복 확대경이 있달까.
정소민은 “강하늘 배우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한다. 강하늘은 반박한다. “그냥 절 만나는 사람들이 인상 찌푸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행동할 뿐이에요. 저도 친구들 만나면 말도 험해지고 마구 놀아요. 근데 저를 재미없고 그냥 착한 사람으로만 보는 분이 많아요. 싫다는 게 아니라 감사하지만, 저 나름 자유분방합니다. 아하하.” 이렇게 말하면서 웃으니 사람이 더 좋아 보인다. 별명까지 미담 자판기인 배우에게 이런저런 부탁이 들어오지 않을까 싶었다. 강하늘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입지를 다진 후에도 신인 감독 혹은 소자본의 작품에 많이 출연했기에. 우선 “거절 잘 못하죠?”라고 물었다. 강하늘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천장에 두더니 말했다. “생각해본 적 없어서 기억이 안 나는군요. 거절했어도 상대에게 더 좋은 선택이라고 판단해서 결정했을 거예요. 거절하지 않았으면 분명 재미난 일이라서 받았을 테고요.” 혹시 마음 약해서 작품을 결정한 적 없는지 물었다. “작품이 좋아서 했죠. 다만 이건 분명해요. 실력은 있는데 기회가 없어서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신인 감독님이 많아요. < SNL>에서 유병재 씨가 한 대사가 생각나네요. ‘다 경력직만 뽑으면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아?’”
강하늘은 작품 선택의 최우선 조건은 대본이라고 했다. 대본을 읽었을 때 마음을 건드리는 하나가 있으면 된다고. 감독의 명성, 제작사의 규모는 관여치 않는다. <30일>을 선택한 이유도 생활 밀착형 대본 때문. “일어날 법한 상황이 펼쳐졌어요. 영화 초반에 사랑하던 남녀가 점점 자기 사정이 커지면서 배려보다 욕심을 앞세우죠. 그 변심 단계에 공감했어요. 저도 예전에 사귀던 그 사람에게 더 배려했으면 어땠을까 싶더라고요. 어디든 역지사지가 필요하죠. 아하하.”
<스물> <청년경찰>까지 강하늘의 코믹 연기야 자주 봤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장르가 코미디다. 강하늘은 코미디언 최양락의 명언을 예로 든다. “웃기면 개그고 못 터트리면 역적이다! 가벼움을 얹는다는 게 어려워요. 툭툭 얘기하지만 조금 무게 있고, 조금 피식하고, 뭔가 담긴 말로 들려야 하는데 쉽지 않죠. 연기자마다 스타일이 다르지만 저는 상대 배우와 친분이 있어야 더 수월해요. 그래서 상대가 정소민 배우라 다행이었죠.”
강하늘은 정소민과 함께 출연한 영화 <스물> 이후 7년 만에 재회했다. “쉴 때 휴대폰을 보지 않고 온전히 저를 채우려 하거든요. 시간 난다고 누군가에게 전화하거나 챙기질 못해요. 소민 배우와는 <스물> 끝나고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진 못했어요. <30일>에서 다시 만나 진짜 반가웠어요. 둘 다 <스물>을 찍던 20대로 돌아간 것처럼 신났죠.”
다음 개봉작은 신인 감독 조장호의 <스트리밍>이다. 인기 스트리머가 연쇄살인범을 추적해간다는 내용이다. 스트리밍이라는 극의 설정에 맞춰 주로 롱 테이크로 이뤄진다. 15분에 가까운 롱 테이크도 있다. 강하늘은 인터뷰가 끝나고 문을 나서면서까지 이 경험을 즐겁게 풀어냈다. 그가 또 한 번 달뜬 톤이었을 때는 영화 <어바웃 타임>을 얘기할 때다. 로맨스물이 인생작이라니 의외였다. “저도 <다크 나이트> <인셉션> <인터스텔라> 다 좋아하죠. 하지만 극장 들어가기 전과 후의 공기가 달라진 작품은 <어바웃 타임>이에요. 압구정 CGV에서 심야로 보고 나올 때 새벽 공기와 하늘, 가로등 불빛이 새로웠어요. 이게 뭐지? 왜 이러지? 너무 울고 나와서 그런가? 자문할 정도였죠.” 참고로 평소에 그는 눈물이 없다. 영화적 체험 앞에서만 무너지는 편. “<아이언맨> 보고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분명한 하나는, 앞으로 그가 우리에게 그런 체험을 안길 당사자라는 것. 김나랑 <보그> 피처 디렉터
무해하고 맑은 힘의 방향, 정소민
유독 특정한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미지의 그물에 포박되지 않고, 그 사이를 유연하게 흐르거나 그것을 초과하는 존재. 어느덧 14년 차인 배우 정소민을 떠올릴 때도 그랬다. 과거의 인터뷰를 거의 모조리 찾아 읽어봤지만, 그럼에도 손에 잡히지 않는 인상이었다. 배우의 연기를 두고 ‘나이 들지 않는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만큼 그의 연기는 어떤 규칙성이 없어 보인다. 흔한 말로 관성에 젖어 있지 않다고 해야 할까. 이건 배우 스스로 자신이 지나온 시간의 흐름과 무게를 크게 인식하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 했던 것들을 돌이키면서 그땐 이랬으니까 지금은 이래야지 하는 관점으로 연기에 접근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요. 저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지죠. 그래서 나이 먹는 게 좋아요. 조금씩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소화할 수 있는 연기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그 변화에 맞추어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게 아주 즐거워요.”
곧 개봉할 영화 <30일>은 <기방도령>에 이은 남대중 감독과의 두 번째 만남이자 좀 더 ‘정소민다움’을 듬뿍 담아낸 작품이다. “감독님 특유의 익살스럽고 억지스럽지 않은 코미디가 돋보이는 영화예요. 여태까지 했던 작업 중 배우인 저에게 가장 많은 여지를 열어준 작품이기도 하고요. 감독님과 상의하면서 캐릭터에 제 의견을 많이 반영했고, 현장에서 배우의 자율성도 굉장히 높았죠. 상대역인 (강)하늘 씨하고 즉흥적으로 채워나간 디테일이 많아요. 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상 그게 더 가능했는데, 그래서 작업이 정말 재밌었고 성장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30일>은 30일이라는 이혼 숙려 기간을 앞둔 부부가 겪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로, 약간의 판타지가 섞여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디테일에서 웃음이 발생하는 코미디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달콤하다는 느낌은 받기 힘드실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저는 좋았어요.”
영화 <스물>에서 호흡을 맞춘 적 있는 강하늘과는 화보 촬영 내내 편안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정소민은 작품을 같이한 배우들과 오랜 인연을 이어가는 듯하다. 데뷔작인 드라마 <나쁜 남자>(2010)에서 함께했던 배우 오연수가 아직도 정소민의 현장에 커피 차를 보내준다. 카메라가 멈춰 있는 시간에도 현장은 배우들의 일터다. 그때의 정소민은 어떨까.
“워낙 불화나 험악한 분위기에 취약해요. 현장에서는 모두가 그냥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연기할 때도 상대를 많이 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내 것에만 집중하면 될 것도 안 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내 연기가 왠지 잘 안 풀릴 때 앞에 있는 상대방을 보고 있으면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게 있거든요. 연기는 ‘같이하는 일’이라는 걸 일찍부터 깨달았죠. 항상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리스펙트가 있어요.”
다만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지 못하고 자기반성과 성찰을 거의 밤의 친구로 삼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면 그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뚱땅뚱땅 어떻게 여기까지 왔네?’ 하는 느낌이 들어요. 20대에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정적이고 단단해졌죠. 요즘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려고 많이 노력해요. 사실 저는 승부욕이 조금 강한 편인데, 저의 승부욕은 어떤 쪽이냐면 남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경쟁이에요. 그래서 거기 부합하는 스포츠인 클라이밍도 좋아하고요. 그러니까 혼자만의 싸움을 좋아하는 거죠. 지난번에 못했던 걸 해내고, 아까 못했던 걸 해내는 이런 것에 엄청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과정에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은 느릴 수는 있지만 더 오래, 더 멀리 갈 수 있다. 그리고 함께 갈 수 있다. 보이는 것이 중요한 세계에서 이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에 어떤 계기로 저를 들여다보고 돌아보게 되었는데 저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과정에서 스스로 뭔가 해냈다는 느낌을 못 받으면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이건 거품이고 이건 가짜야, 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알게 되어서 스스로가 조금 더 좋아졌을까. “좋아졌다기보다는 그걸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모르고 그저 휩쓸리듯 살았다면 내가 만족하는 방향이 아니라 남들이 만족하는 방향으로 갔을 텐데. 지금이라도 이걸 알아서 다행이다. 앞으로 내 삶을 살아가는 데 나의 지분이 더 커지겠구나. 참 다행이다.”
예전에 한 프로그램에서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책 리스트를 소개한 적 있는데, 꽤 개성 있는 것이라서 그 리스트를 업데이트해보고 싶었다. “음, 산도르 마라이 작가의 <열정>이라는 소설을 추천하고 싶어요. 책에서 에너지를 느끼기 쉽지 않은데, 이 책은 그저 놓인 것만 봐도 에너지가 마구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아요.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도 좋았어요. 우리한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거잖아요. 그런데 이 책은 미래를 이미 일어난 일로 다루거든요. 발상 자체가 재밌어요. 저는 양립하기 어려운 요소가 믹스 매치되어 있거나 양극단에 있는 것들이 한꺼번에 다가올 때 재밌다고 느껴요. 그리고 그런 게 약간 삶 같기도 하고요.”
정소민과 1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왜 그의 이미지가 유독 손에 잡히지 않았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령, 그는 구체적인 단어를 콕 집어 내주지 않는 인터뷰이다. 위에 언급한 책 제목 정도를 제외하면 말이다. “제가 그래요? (웃음) 음…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 라고 늘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살거든요. 음악도, 영화도 장르마다 매력이 다르듯 사람도 그렇고. 그러니까 다가오는 외부의 모든 것에 대해 그냥 열어놓으려고 해요. 이해하고 싶어요. 이해까지는 못하더라도 인정은 하고 싶죠.” 이 말이 너무도 인상적이라서 삶을 대하는 그의 가치관을 좀 더 듣고 싶었다. 유치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가 선뜻 이렇게 답했다.
“있어요! 책을 보다가 인상적인 구절이 나오면 줄을 긋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삶의 태도를 정확히 표현한 문장이 있었어요. 잠깐만요. 지금 좀 찾아볼게요.” 정소민이 분주히 스마트폰을 뒤지는 동안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커버를 슬쩍 찾아보았다. 과연 어떤 정념 덩어리 같은 데가 있었다. 눈앞에서 열정적으로 메모를 찾고 있는 정소민은 겉으로는 큰 동요가 없지만 분명 안에 뜨거운 것들로 꿈틀대는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드디어 메모를 찾아낸 그가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 실린 문학 평론가 서영채의 문장을 또박또박 낭독해주었다.
“순하고 맑은 힘이다. 그 힘은 이를테면 열기라기보다는 온기에 가까워서 힘보다는 기운이라고 함이 좀 더 적절할 수도 있겠지만, 비유하자면 그 힘은 추운 겨울에 따뜻한 실내로 들어갔을 때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온기와도 같다. 힘은 힘이되 누구도 해칠 수 없어 보이는 부드럽고 따뜻한 힘, 압도적이지만 위압적이지는 않은 힘이다.”
정소민은 맑고 무해한, 그러니까 위엄 있는 힘 쪽으로 흔들리며 뚜벅뚜벅 걸어나갈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점점 더 손에 잡히지 않는, 좀체 특정한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액체 같은 배우가 될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고 있자니 퍽 즐거워졌다. 김현민 영화 저널리스트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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