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이, 아베 치토세의 디자인 철학은 한 단어로도 충분하다. 하이브리드. 기본적인 화이트 코튼 티셔츠를 만들 때도 예상치 못한 패브릭을 섞거나, 디테일을 더한다. 사카이의 옷이 다양한 무드에서 어울리는 것도 해체와 재구축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묻어난 덕분이다. 그래서 사카이의 옷은 언제나 새롭다.
전혀 다른 것을 재조립하는 아베 치토세의 재능은 특히 협업에서 빛난다. 까다로운 나이키가 몇 번씩이나 협업 파트너로 사카이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 그의 손을 거치면, 사카이와 파트너의 정체성이 교묘하게 50 대 50의 비율로 근사하게 섞인다. 제각기 개성을 살리면서도 새로운 느낌. 어떤 디자이너도 쉽사리 해낼 수 없는 하이브리드가 사카이의 정체성이 된 이유다. 최근 출시한 칼하트 WIP와의 콜라보레이션 제품은 당연히 품절됐다.
칼하트 WIP와의 협업 컬렉션 론칭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한 아베 치토세는 듣기만 해도 숨이 가빠오는 일정을 소화했다. 행사 당일 오전 서울에 왔다가, 론칭 파티 후 다음 날 아침 곧장 도쿄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그>와 만난 그녀는 ‘사카이스럽게’ 차려입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도배한 사카이의 아이템은 물론 겹겹이 쌓아 올린 링과 브레이슬릿에서 ‘하이브리드’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약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을 둘러볼 시간은 있었는지, 기분은 어떤지 궁금하다.
정말 오랜만이다! 오늘 아침 일찍 도쿄에서 출발해, 한국에 사는 친한 친구를 만나 식사를 한 것이 전부다. 일단은 차창 밖의 풍경으로 만족하고 있다. 곧 있을 파리 컬렉션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서 다시 방문할 계획이다.
1년에 네 차례 컬렉션을 파리에서 선보인다. 주로 머무는 곳이 파리인가? 아니면 도쿄인가?
대부분의 경우 도쿄다. 파리는 컬렉션이 있을 때만!
패션쇼부터 칼하트 WIP와의 협업 컬렉션 발매까지,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도 분명 눈에 담고 싶은 풍경이나 사람, 귀에 담아두고 싶은 소리가 있을 텐데.
일본뿐 아니라 파리, 서울 등 다양한 도시를 방문한다. 그곳의 풍경과 사람을 보며 많은 영감을 받는 편이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한국에 와서도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을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업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장 폴 고티에, 킴 존스, 닥터 우, 카우스… 다양한 분야의 거장들과 함께 일한 경험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거장’이라는 점에 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장 폴 고티에를 제외하고, 모두 친구 관계에서 시작했다. 처음부터 ‘협업을 해보자!’라는 분위기보다는 친구와의 대화가 협업으로 발전한 쪽에 가깝다. 동등한 관계에서 협업이 이뤄졌기 때문에 결과물에도 서로의 미학이 자연스럽게 녹아 나올 수 있었고.
사카이만큼 협업할 때 ‘하입’을 만들어내는 브랜드는 없다. 몽클레르, 나이키, 노스페이스, 아크로님… 아웃도어의 정취가 짙게 느껴지는 브랜드와의 협업이 특히 눈에 띄는데.
아웃도어 스타일이나 브랜드를 특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까르띠에와의 협업도 있지 않나. 때마다 내가 가장 끌리는 브랜드와 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 협업을 둘러싼 하입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는 아니다.
칼하트 WIP는 자신들만의 색깔이 강한 브랜드다. 어떤 면에서 끌렸나?
예전부터 칼하트를 좋아했다. ‘칼하트와 함께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를 보고 나서다. 등장인물들이 칼하트의 디트로이트 재킷, 초 재킷, 오버올 등을 입은 것을 보며 멋스럽다고 생각했다.
사카이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 하나를 꼽는다면, 아마 ‘하이브리드’일 것이다. 이번 협업에서는 어떤 종류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했나?
칼하트 WIP의 디트로이트 재킷에 사카이 봄버 재킷 특유의 레이어드 스타일을 조합해 MA-1을 완성했고, 에이프런 디자인을 차용해 미니스커트를 완성했다. 디테일 부분 말고도, 상반되는 무드의 하이브리드 역시 시도했다. 작업복에 페미닌한 터치를 더하는 식으로!
이번 협업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하나만 꼽는다면.
아무래도 MA-1을 꼽고 싶다. 협업 무드가 가장 잘 드러나기도 하고, 사이즈도 다양해 모두 입을 수 있으니까.
나도 똑같다. 특히 벨벳 소재의 칼라가 마음에 들었다.
아! 마음에 드는 부분이 또 있다. 소매 부분의 버튼. 칼하트의 아카이브 속 버튼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제 사카이에 좀 더 집중해보자. 얼마 전 2005년에 발표한 사카이 컬렉션을 봤다. 한눈에 봐도 사카이인 걸 알았다. 사카이만의 아이덴티티는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지만, 컬렉션에서는 늘 새로운 에너지가 느껴진다.
사카이는 언제나 새로운 실루엣을 추구한다. 나는 입버릇처럼 ‘안심과 배신 사이의 균형’이라는 말을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카이의 모습(안심)과 누구도 보지 못한 모습(배신)을 한 컬렉션에 담아내려 한다. 이런 면이 사람들에게 새롭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안심과 배신이라니, 서로 다른 요소를 섞는 것에서 재미를 찾는 것 같다.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한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렇다. 세상에 평범한 옷은 너무나 많고, 나는 그런 옷으로부터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어쩌면 ‘평범한 옷’보다는 ‘남들과 같은 옷’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다른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무언가 다른 옷을 입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하이브리드라는 개념으로 이끌었다. 요즘은 누구나 지닌 내면의 강함과 유약함처럼 사람의 다양한 면면을 표현해보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해체주의 역시 사카이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다. 아베 치토세가 생각하는 해체주의의 정의가 궁금하다.
재구축. 해체주의에 대한 관심 역시 남들과 다르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했다.
남성복을 시작한 지 10년이 됐다. 여성 디자이너가 볼 때 여성복과 남성복은 무엇이 다른가? 다른 관점에서 디자인하는지도 궁금하다.
차이점은 없다. 유일한 차이점은 내가 사카이 남성복을 안 입는다는 것이었는데, 요즘에는 내가 만든 남성복도 입는다!
하이브리드와 해체주의라는 철학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그 철학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가?
사실 20년 전과 지금의 사카이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규모도 훨씬 커졌고, 지금의 사카이는 굉장히 체계화된 상태니까. 하지만 크리에이티브 측면에서는 전혀 바뀐 것이 없다. 나만의 철학, 이에 대한 믿음을 오랫동안 유지했다는 것이 사카이만의 장점이기도 하다.
예전에 전개한 서브 레이블, 사카이 럭을 참 좋아했다. 어딘가 심플하고, 도발적이면서도 발칙한… <보그> 런웨이의 니콜 펠프스는 사카이 럭을 미우미우에 비교하기도 했는데. 서브 레이블을 다시 전개할 생각은 없는지 궁금하다.
미우미우라니(웃음)! 재밌는 비유다. 사카이 럭에 대해 심플하다고 설명했는데, 맞는 말이다. 다만 지금은 메인 컬렉션에도 심플하고 도발적인 아이템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단지 ‘사카이 럭’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을 뿐!
훌륭한 디자이너일 뿐 아니라, 훌륭한 ‘비즈니스우먼’이기도 하다. 혁신적인 디자인과 비즈니스, 얼핏 들어서는 양립이 불가능한 단어처럼 느껴지는데.
매출은 사카이의 최우선 순위가 절대 아니다. 언제나 창의성을 매출보다 우선시하는 성향이 역설적으로 지금의 균형 잡힌 사카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팀원들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고! 하지만 디자이너이자 사장이기에, ‘매출이 오르지 않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파리에서 첫 쇼를 선보인 것이 2009년이다. 당시와 비교해 사카이와 아베 치토세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나의 위치가 달라졌다거나, 사카이가 더 대단한 브랜드가 됐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 지금도 슈퍼마켓에서 채소를 사며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여전히 2009년의 아베 치토세다. 다만 예전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리테일러도 많이 늘었고, 함께 일하는 공장도 많아졌기 때문에.
인간 아베 치토세의 목표, 그리고 사카이 디자이너로서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아베 치토세=사카이’이기 때문에, 둘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내 목표와 사카이의 목표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