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인 어머니 곁에서 원단을 가지고 놀던 소녀는 가족의 우려 속에 패션 유학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브랜드를 설립했지만, 적은 매출 탓에 폐업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준비한 컬렉션이 기적처럼 성공을 거둔다.
디자이너 레지나 표의 이야기다. 그녀의 삶은 설화의 구조와 닮았다. 위기 속에서 희망의 싹을 틔우고 결국 영웅이 된다는 식의 해피 엔딩. 물론 직접 만나본 레지나 표는 현실에 착 발을 붙이고 사람과 삶에 맞닿은 브랜드를 만들고 있었다.
한국에는 오랜만에 들어온 거죠?
딱 1년 만에 들어왔어요.
최근 2023 F/W 팝업 스토어를 열었어요. 국내에서 여러 고객을 만나는 건 생소한 일일 텐데, 어땠나요?
한국에 들를 때 항상 듣는 피드백이 있었어요. “옷이 예쁜데 입어볼 곳이 없다”, “더 많은 옷을 보고 싶다”는 얘기였죠. 엑시츠(XYTS)나 현대백화점 폼에 레지나 표 브랜드가 입점했지만, 아무래도 편집숍에서는 브랜드 전체를 보여줄 수 없으니까요. 언젠가는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많은 양의 컬렉션을 실제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트렌드와 달리 팝업 스토어를 연 곳은 경리단길이었죠.
한국을 떠나 생활한 지 벌써 15년이 됐는데요. 서울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겠다고 말을 꺼내면 많은 분이 성수동과 백화점을 추천했죠. 물론 좋은 공간이겠지만 제가 생각한 이미지와는 다소 맞지 않았어요. 리스크는 있지만 다소 외진 경리단길의 독채 건물을 빌렸죠. 자연 소재를 많이 사용한 게 마음에 들었어요. 이 건물은 팝업 스토어에 오시는 분들이 모두 처음 오는 곳이었죠. 독특하고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다들 좋아하셨어요. 다음 팝업 스토어는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테스트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디자이너인 어머니가 패션과 관련된 일을 반대하셨다면서요? 하지만 어릴 적부터 남다른 스타일링을 해줬다고 들었죠. 어린 시절 어머니의 스타일링이 지금의 당신에게 영향을 끼쳤을까요?
하하(웃음). 어머니는 패션이 너무 힘들다면서 제가 하는 걸 원치 않으셨죠. 그러면서도 제가 열세 살 때 재봉틀도 직접 가르쳐주셨어요. 또 독특한 스타일링도 해주셨죠. 초등학생 때 브라운 리넨 롱 드레스 같은 걸 입기도 했어요. 베레모에 빈티지 가죽 재킷, 쇼츠에 롱부츠를 신는 등 보통 아이들과 많이 다르게 옷을 입혀주셨어요. 돌이켜보면 저도 남과 다르다는 것이 마냥 싫진 않았고, 꽤 즐겼던 것 같아요. 덕분에 남과 똑같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그게 지금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 브랜드가 생겨나는 데 영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죠.
센트럴 세인트 마틴 졸업 패션쇼를 비롯한 디자인 초창기에는 패션과 예술을 직접적으로 결합했어요. 그을린 나무에 옷을 걸고, 바느질 대신 원단을 태워 이어 붙었죠.
졸업 패션쇼는 생산과 판매 걱정을 하지 않을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전에 보지 못한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났죠. 이때는 홍익대학교 선배이자 멋진 아티스트인 이재효 작가님이 졸업 쇼 나무 조각을 만드는 걸 도와주셨어요.
그에 비해 지금은 훨씬 웨어러블한 옷을 만들고 있어요. 워크 웨어를 차용한 적도 있죠. 디자인 방식에서 전자와 후자에 차이가 있을까요?
이때 제가 나타내고자 한 컬렉션에서는 컬러와 형태가 중요했어요. 이 둘의 조합을 통해 타임리스하고, 우아하면서 모던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간의 위트를 더해야 하고요. 사실 이 정신은 지금의 레지나 표 브랜드에서도 절대 변치 않는 핵심 정신이죠. 패션을 떠나 어떤 작업을 하든 이 목표는 절대 변치 않을 것 같아요. 브랜드에서는 현대의 바쁜 여성들이 툭 입기만 해도 특별해지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21세기의 아머를 만드려고 하죠.
여러 인터뷰를 쭉 보았는데 좋아하는 키워드 몇 가지가 눈에 띄었어요. 패션, 예술, 사람. 그 중에서도 패션보다 예술을, 예술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맞을까요? 아니면 다른 키워드가 있을까요?
하하(웃음). 사실 저는 겉모습만 꾸미는 패션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옷을 입는 사람도 중요하죠. 또 패션과 예술은 다르지만, 둘 사이에서 끊임없는 협업이 발생하잖아요. 이 둘은 많은 공통분모가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말씀하신 순서대로죠. 패션, 예술, 사람. 하지만 이 순서는 사랑의 깊이에 대한 차이보다는 단순히 규모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요. 패션이 예술에 속하고, 예술은 사람이 창조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제가 가장 사랑하고 영감을 받는 곳은 이 모든 것이 속한 삶이라고 할 수 있죠.
예술에서는 특히 조각과 회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여요. 디자이너 레지나 표에게 조각과 회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조각과 회화 외에 설치미술도 좋아해요. 우선 조각은 형태가 있는 3D라는 점에서, 몸에 맞게 디자인하는 컬렉션과 비슷한 점이 있죠. 회화의 경우 각기 다른 컬러와 면 분할이 모여 멋진 이미지를 만들잖아요? 저는 컬러를 좋아하는데, 같은 노란색이라도 보라 옆에 있을 때와 오렌지 옆에 있을 때 완전히 다른 느낌이 나요. 또 소재가 반짝이는 실크였을 때, 퍼지한 니트일 때도 달라지죠.
하지만 어릴 때부터 언젠가는 제 예술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 시절 이후로 놓고 있던 그림을 다시 시작했어요. 꽤 오래전부터 매주 수요일이면 세인트 마틴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죠. 앞으로도 그림은 계속 발전시키고 싶어요.
자연과 공간에도 관심이 많지 않나요? 앞서 말한 레지나 표의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면서 공간에 대한 여러 고민을 했을 것 같아요.
공간은 정말 중요한 요소죠. 말씀하신 대로 우리 브랜드가 8개월 전 런던 소호에 스토어를 오픈했어요. 브랜드가 가진 예술적이고 독특한 느낌을 구현하고 싶어서 제가 직접 인테리어와 가구 디자인에 참여했어요. 런던의 아트북 숍 클레어 드 루엔(Claire de Rouen)의 루시와 함께 큐레이팅한 아트북도 준비했죠. 이뿐 아니라 스토어에는 다양한 작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어요. 이 모든 작품을 통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서 레지나 표를 표현하고자 했죠.
스토어에는 어떤 작품이 있을까요?
먼저 런던에서 떠오르는 여성 화가 캐서린 렙코(Catherine Repko)의 작품이 있어요. 본인의 가족, 네 자매 중 셋째인 그녀는 주로 자아와 기억을 표현하죠. 또 모델로도 알려진 코니 발레스(Conie Vallese)의 초창기 프린트 작품도 걸어놨고요.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세라믹도 있습니다. 앞으로 컬렉션을 더 늘려갈 생각이에요.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어디일까요?
스토어에 구석구석 신경 써서 그런지 어디 한 군데 딱 집어서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특히 애정이 가는 몇 가지를 말씀드릴게요. 제가 영국 디자이너 엘리엇 반스(Elliot Barnes)와 함께 디자인한 테이블 위에는 아들 루카가 아일랜드 비치에서 모아온 돌멩이를 디스플레이했어요. 사람 모양을 한 행어와 유니크한 모양의 전신 거울은 런던의 메이커 바나비(Barnaby)가 제 디자인을 보고 제작해준 것이에요. 또 피팅 룸에서 옷을 꼭 입어보기를 추천해요. 제가 이탈리아에서 직접 공수한 아주 특별한 거울과 레지나 표 시그니처 단추를 손수 단 커튼이 있거든요.
저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추측할 수밖에 없어요. 두 아이와 함께 새로운 가정이 생긴 후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요? 일과 육아의 균형을 맞추는 일도 궁금해요.
아이를 가지면서 다음 세대에 대한 고민을 아주 많이 하게 됐죠. 물론 책임감도 생겼고요. 그래서 아들이 생긴 6~7년 전부터 지속 가능성에 더욱 집중했죠. 어떻게 하면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한 것 같아요. 좀 더 멀리 보고 크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거죠.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건 솔직히 말하면 쉽지 않아요. 저녁에 아이들이 잠들면 다시 일을 시작하죠.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은 없는걸요!
앞으로 브랜드 레지나 표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 브랜드가 사람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면 좋을 것 같은가요?
한국 브랜드가 이렇게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았다는 것, 그리고 많은 분이 자랑스러워한다는 게 감사해요. 앞으로도 계속 잘해야겠다는 원동력도 되죠. 오래 살아남아 20대부터 70대까지 입을 수 있는, 또 인간과 환경, 삶의 밸런스를 생각하면서 소비를 이끌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한번 사면 딸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그런 브랜드로요.
남편과 요리책을 출판한 적 있고, 회화가 취미인 패션 디자이너 레지나 표의 다른 행보를 기대해도 될까요?
하고 싶은 일은 아직도 너무 많아요. 남편과 항상 여러 아이디어로 토론하죠. 요즘 들어 인생이 짧게 느껴지는데, 남의 눈치를 보기에는 더더욱 짧죠.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은 추진력 있게 진행하려고 해요. 인간은 실패를 두려워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어 많은 의지가 요구되지만, 해보지 않으면 영원히 알 수 없으니까요. 앞으로는 한국에서도 더 많은 분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