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바위가 된다, 김범 개인전
어떤 분야든 ‘작가들의 작가’가 있습니다. 유명한 정도를 떠나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좋아하고,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사실만큼 믿을 만한 평은 없기에, 그런 예술가들은 반드시 기억해두곤 합니다. 이를테면 미술계의 ‘김범’ 같은 존재 말이죠. 그는 ‘1990년대 한국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작가’ 중에서도 단연 최고입니다. 수십 년 전에 이름을 알렸다 해도 그 명성을 이어오기가 쉽지 않겠지만, 더군다나 김범은 거의 은둔하다시피, 아니 어쩌면 유명해지지 않으려고 용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용히 자기만의 세계를 지키며 작업해온 미술가입니다. 그러니 국내에서 13년 만에 선보이는 리움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소식이 반가운 건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김범의 <바위가 되는 법>은 오매불망 그의 작업을 기다려온 저 같은 오랜 팬들에게는 말할 나위 없이 귀하고, 그의 존재를 몰랐던 관객에게는 무명한 유명 예술가의 작업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일 거라 확신합니다.
<바위가 되는 법>은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홍보 문구 아래 김범의 모든 걸 펼쳐놓습니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작품 세계를 포괄하는 최대 규모 전시에, 초기작부터 해외 소장작까지 총 70여 점의 작업을 일괄하는 데다, 개인전을 좀체 열지 않는 작가이니 그야말로 흔치 않은 기회인 겁니다. 그래서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곳곳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이 다양한 작업을 일관성 있게 촘촘히 묶는 작가의 철학을 금세 파악하게 되니까요. 김범이 보이는 것의 실체를 의심하고 이면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예술의 본령을 탐색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의 작품은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수용했던 사고와 관습 등을 재차 관찰하고 재고하게 합니다. 의심과 자조로 점철된 작품은 절대 딱딱하게 날 서 있지 않습니다. 예술의 비판 정신을 앞세워 호들갑을 떨지도 않지요. 오히려 표현은 담백하고 유머는 덤덤합니다. 해학과 풍자로 시작해 부조리한 제안으로 이어지는 그의 작업은 너무 소박한 동시에 진지해서, 보고 있으면 피식 웃음이 날 정도지요.
이런 식입니다. 산의 능선을 그린 풍경화 같은 ‘현관 열쇠'(2001)는 실은 열쇠의 골을 확대한 작품으로, 그림이나 형상을 바라보는 우리 시선을 되묻는 김범의 ‘인지적 회화 연작’의 대표작이죠.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2010)은 돌에 시를 읽어주고 설명하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입니다. 설정 자체가 어처구니없지만, 정지용이 누구인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근대 시인의 빼어난 시는 월북설로 한때 금기시되기도 했죠. 숱한 공식적, 비공식적 교육을 통해 지적, 정서적 내용이 어떻게 이입되는지, 급기야 대상의 의미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친숙한 고통'(2008)은 미로 퍼즐을 추상화로 구현합니다. 그 앞에 서면 무의식적으로 길을 찾으려 애쓰는 나 사진을 발견하게 되니, 일상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난관을 은유했다는 작가의 의도를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죠. 대단치도 않은 노란색 선으로 추상화 그리는 법을 강의하는 ‘”노란 비명” 그리기'(2012)는 대단치도 않은 예술에 매진하는 예술가의 실존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불의한 권력자를 위한 인테리어 및 생활 소품을 만드는 프로젝트 결과물 ‘쥐와 박쥐 월페이퍼(‘폭군을 위한 인테리어 소품’ 중)'(2016) 역시 ‘김범답게’ 삐딱하지만 아름다운 작업입니다.
현대미술과 세상사에 공히 적용되는 특유의 엄청난 골계미는 결국 바위가 되고자 평생 고투한 예술가의 인생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시 제목으로 차용한 ‘바위가 되는 법’은 작가의 아티스트 북 <변신술> 본문에서 발췌한 텍스트 작업입니다. ‘한 장소를 정하되 가능하면 다른 바위가 많은 곳에 자리 잡으면 도움이 된다. (중략) 모든 계절과 기후의 변화도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중략) 땅에 닿는 부분에 이끼가 끼거나, 벌레들이 집을 짓게 되면 다치지 말고 보존한다.’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자기 변화, 인간의 가변성(혹은 가변성에 대한 강박), 그리고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와 외로움을 주제로 한 이 작업이야말로 전시를 관통하는 김범만의 통찰력과 해학, 풍자와 비판 의식 등이 응축된 결정적 작품이구나 싶습니다. 저는 이러한 김범식 유머를 참 좋아합니다. 그의 작품이 어떤 코미디 영화보다 웃깁니다. 하지만 작가처럼 나 역시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나 바위가 되는 법을 하루하루 터득하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낄낄거리던 헛웃음이 잦아들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웃긴 작업은 이 웃기지도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시선과 태도를 환기합니다. 김범의 전시를 N차 관람해야 하는 이유가, 아직 소개하지 못한 작품이 너무 많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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