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 예술가에게 필요한 건 예술성보다 욕망
*이 글에는 <거미집>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플랑 세캉스(Plan-Sequence)’란 말을 오랜만에 들었다. 영화 <거미집>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용어는 발음에서 알 수 있듯 프랑스에서 기원한 것이다. 하나의 내러티브가 있는 하나의 시퀀스를 하나의 샷으로 찍는 것. 이 기법이 쓰인 많은 고전 영화가 예술적인 영화로 평가되었고, 수많은 영화 서적, 평론가가 예술적이라고 평가한 영화를 보면 플랑 세캉스 기법으로 촬영한 장면이 많다. 그래서 이 기법은 그 자체로 ‘예술적인 무언가’로 여겨진다. 또 그래서 이 용어는 1990년대 영화광에게 ‘아는 척’의 소재가 되곤 했다. 사실 영화 밖에서만 그랬던 건 아니다. 플랑 세캉스는 종종 영화 안에서도 ‘과시’의 의도로 쓰였다. 하나의 샷으로 하나의 시퀀스를 찍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계속 돌아야 하고, 배우는 계속 연기해야 하고, 스태프도 그에 맞춰 계속 움직여야 한다. 여러 명의 배우가 장소를 옮겨 다니는 장면에는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이때의 에너지는 결국 영화 촬영 기술이고, 그러한 기술은 장비를 통해 발현되기 때문에 결국 돈이기도 하다. 예술적 의도보다 어떻게든 찍고 말겠다는 욕망이 앞서야 완성될 수 있는 예술의 경지라고 할까?
<거미집>은 그런 플랑 세캉스를 구현하려 애쓰는 영화감독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영화감독 김열(송강호)은 이미 ‘거미집’이라는 제목의 차기작을 다 찍어놓았다. 흔한 통속극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완성해도 김열의 영화감독 인생은 무난하게 흘러갈 것이다. 그런데 김열은 굳이 이 영화를 다시 찍으려 한다. 설정 몇 가지를 바꿔 결말까지 다시 찍으면 이 영화가 걸작이 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감일 뿐이다. 그에게는 뚜렷한 예술적 비전이 없다. 그가 영화를 다시 찍으려는 이유는 걸작을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다. 데뷔작에 이어 이번 작품도 그저 그런 영화가 될 경우 삼류 감독으로 전락해버릴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다. 예술가를 욕망하는 예술가인 셈이다. 그래서 김열은 영화 속에서나 밖에서나 계속 의심받는다. 그의 계획대로 영화를 다시 찍으면 정말 걸작이 될까? 그리고 그가 품은 걸작의 비전에 플랑 세캉스가 꼭 필요할까? 플랑 세캉스가 없으면 걸작도 걸작이 아닌 걸까? 영화에서 플랑 세캉스라는 용어를 접한 스태프와 배우들은 하나같이 이게 꼭 있어야 되냐고 묻는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김열과 그의 예술성을 지지하는 제작사의 후계자 신미도(전여빈)뿐이다. 하지만 그들도 이 영화의 플랑 세캉스 장면이 가져올 예술적 효과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아마 김열에게도 플랑 세캉스는 생소한 기법일 것이다. 그 시절 걸작으로 불렸던 ‘불란서’ 영화에서 보았던 것, 그리고 동시대의 영화 평론가들이 그런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높이 평가했던 그 무언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걸작을 만들고 싶은 그는 자신의 영화를 예술성으로 가득한 걸작처럼 보이게 할 무언가를 원했을 것이고, 그래서 찾은 게 플랑 세캉스였을 것이다. 그것을 구현하면 나도 예술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상상. 즉 김열에게 플랑 세캉스는 예술적 성취가 아니라 예술성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동시에 뚜렷한 예술적 비전도, 확신도 없는 그가 자신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선택한 방패막이다. 그래서 그가 결국 세트 전체를 불태우는 장면에 도달했을 때의 모습은 상당히 짠하다. 예술적 성취를 획득한 예술가의 희열이 아니라, 드디어 욕망을 해소한 사람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한국 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거미집>에서 이 욕망은 더 크고 거칠게 강조된다. 인기 배우들이 겹치기 출연으로 1년에 수십 편의 영화를 찍던 시절이고, 정부는 시나리오 단계부터 검열을 하던 때다. 검열의 눈을 피해 배우들을 가둬놓고 영화를 완성해야 하는 김열은 욕망이 앞서지 않았다면 영화를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미집>을 보면 예술가에게 필요한 건 예술성보다 그에 앞서는 욕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예술에 확신이 있어도, 자신만의 플랑 세캉스를 완성하려는 욕망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예술은 예술적으로 보일 게 있어야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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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거미집'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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