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이 당신을 치유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가장 고요한 방식으로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는 향의 마법.
MOVING ON
얼마 전 나는 9년간의 연인 관계를 청산했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전에도 결별의 아픔을 여러 번 겪었지만, 혹독한 고통과 슬픔에 따른 압도적인 중압감에 대한 내성은 전혀 생기지 않았고, 결별 후 이어지는 혼돈에도 대비돼 있지 않았다. 친구들로부터 닥치는 대로 조언을 들었다. 상당수가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아채거나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 “정신없이 살고, 쉬어! 너 자신에만 집중하고 모두 잊어버려!” 산책을 했고, 기사를 썼고, 주량이 셌지만 음주를 멈췄다. 하지만 어떤 것도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상실감으로 크게 힘들어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즉각적인 위안을 주는 것은 없다. 몇 주 후, 나의 휑하고 더 작아진 새 아파트에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커다란 꽃다발과 드리스 반 노튼 향수였다. 친구와 동료들은 이 상징적인 디자이너에 대한 내 충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프린트, 레이어드, 실루엣에 대한 접근 방식엔 특이점이 있다. 영감 가득하지만 편안하고, 우아함에 대한 열망이 돋보인다. 이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의 앤트워프 저택에는 꽃으로 완벽하게 꾸민 멋진 정원이 있다. 자연의 것이지만 세련되고, 감성적인 빛깔을 띠면서, 예기치 못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자 속에 든 새로운 향수병은 그보다 더 아름다웠다. 향수를 품은 유리병의 절반은 마리골드꽃의 오렌지색, 절반은 분홍빛이었다(드리스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컬러의 황제인 것 같다). 뚜껑은 긁히고 망가진 자국으로 불완전한 앤티크 분위기를 풍겼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뿌렸더니 부드러우면서도 상쾌하고, 따뜻한 향이 톡 쏘며 내 주변에 내려앉았다.
의사 결정, 집중, 사교 생활, 수면 등 모든 것이 힘겹게 느껴지는 시기에 정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회의나 이벤트가 있을 때나 사람들을 상대하기 전, 이 아름다운 향수를 목과 손목에 지그시 뿌렸다. ‘뉴욕에서의 하루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혼돈에 앞서 조용한 멈춤’을 적극적으로 기대하게 됐다. 순식간에 치르는 이 의식이 나 자신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던 퇴폐미를 살짝 더하면서 활력을 불어넣었다. 갑자기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에서 마주한 첫 페이지가 가능성으로 넘치고, 낙관적으로 느껴졌다. 이 우아한 향기를 통해 나는 어떤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나는 과감하게 옷을 입는 사람이지만(수요일 오후에는 길게 나부끼는 이세이 미야케 ‘플리세’를 입을 것이다! 상충하는 패턴과 거대한 코르사주로 코디도 한다. 그리고 물방울무늬의 무지개색 크리스토퍼 존 로저스 드레스와 스팽글, 구찌의 수영모를 매치하기도 한다), 뷰티를 향한 내 접근 방식은 늘 더 조심스러웠다. 피부 화장을 하고, 아이라인을 그린 다음,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대담한 향을 부담스러워했던 나는 가볍고 밋밋한 장미 향수를 고집해왔다.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두 가지 컬러가 공존하는 이 향수병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막상 안에 담긴 성분을 전혀 알아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재차 강조하지만 나는 뷰티 전문가가 아니라 패션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 향수의 디자인과 뿌린 직후의 기분 좋은 경험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 개인적인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준 것에 무엇이 실제로 들어 있는지 알아보기를 미룬 것이다. ‘쟈르뎅 드 로랑제리(Jardin de l’Orangerie)’라는 이 향수 노트는 오렌지꽃과 샌들우드의 신선하고 톡 쏘는 향을 담고 있었다. 향기로운 연금술에 특별한 무언가를 더했을까? 무르익어가는 오렌지나무 꽃에서 추출하는 네롤리 오일에 향신료를 가미해 한층 감미로운 향을 완성했다. 이 에센셜 오일은 진정 효과까지 뛰어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경외감으로 머리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결국 내 발걸음에 힘을 실어준 것은 단지 ‘2초간의 즐거운 탐닉’만이 아니었다. 향기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지만, 왠지 모르게 이 천연 성분의 신중한 조합은 내가 서 있는 기로를 정확하게 나타냈다. 즉 강하지만 연약하고, 진정을 필요로 하지만, 조용하면서도 명백한 것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과 쓰라림 속에서 어딘가 모르게 달콤한 꽃이 피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옷을 입는 것에서 얻는 기쁨과 예기치 못한 것들을 포용함으로써 느끼는 만족감, 호기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다른 위험도 무릅쓸 채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자기표현과 실험은 우리가 하는 대로 마법처럼 바뀌는 법이다. 이제는 장미 향수에서 벗어날 시점이었다.
‘힐링’이 길고 고된 여정이라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때로는 직관적으로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도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게 된다. 감각을 더 고조시키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미래를 위한 희망의 씨앗을 심기 위해 퇴폐적인 뭔가를 찾는 일은 어쩌면 우리에게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향수를 살짝 뿌리는 행위를 통해 그것을 얻었다. Chloe King(미국 <보그> 컨트리뷰팅 에디터)
IN SILENCE
2016년 9월 오만으로 조금 이른 휴가를 떠났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충동이었다. 매년 여름 알래스카에 손을 뻗는다. 전세기는 봄눈보다 빠르게 매진됐고, 매거진 에디터에게 7~8월의 여름휴가는 새로운 직업을 찾을 생각이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언제나 9월이었다. 여름 한정 알래스카 전세기는 서울에서 출발해 경유 없이 짧은 운항 시간을 약속하지만, 올해도 마지막 편은 8월 4일. 혼자 살짝 들떴던 9월호를 만들고 나서야 이런저런 항공편을 찾았다. 어디든 가야 한다는 절박함, 몸에 쌓이다 못해 침전되고 응고된 독소는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 9시간 이상 머물러야 분해된다는 나만의 이론이 있다. 아득한 알래스카만 바라보다 지구본을 휙 돌렸다. 그곳에 오만의 수도, 항구도시 무스카트가 있었다. 무스카트행 항공권을 예약하고 나서야, 그곳에 가야 할 이유 몇 가지를 찾아냈다. 아라비아의 가장 우아한 도시, 유명한 여행 앱에서 말하는 가장 만족도가 높은 도시.
9월의 오만은 염화에 휘발성 액체는 모조리 가져다 부은 듯 타올랐다. 질식할 것 같은 바람, 살갗의 모든 모공을 말려버릴 것 같은 복사열은 ‘이국적 정서’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오만에서 얻을 부산물을 고민했다. 디자이너 킴 존스의 말처럼 “직접 두 발로 디뎌야만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어떤 조바심이었다.
배를 빌려 돌고래 무리 사진을 찍었으며, 아무도 없는 길을 몇 시간 달려 사막으로 돌진했다. 모래는 핑크였고, 파우더보다 고왔다. 한 발짝만 걸어도 체로 친 것 같은 모래가 몸을 타고 올랐다. 모래에 반쯤 눈이 멀어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사금을 훔치듯 담았다. 돌아올 때 공항에서 발권하며 모래를 조금 담았다고 고백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가방 안에 담긴 모래 봉투를 세관원이 꼬챙이로 찔러 어질러진 리모와는 그대로 사막이었다. 오만의 고대 도시 니즈와(Nizwa)에선 해발 2,000m가 넘는 호텔에 묵기도 했다. 황무지를 몇 시간이나 달리면 느닷없이 충격적으로 아름다운 오아시스가 나타나는데, 하루 종일 수영과 선탠을 했다. 그럼에도 이국의 땅에서 품에 안아야 할 뭔가가 더 필요했다. 나는 욕심이 많다.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리기도 전에 유향(Frankincense)이라는 단어가 이런저런 기사와 여행 가이드에서 솟구쳤다.
유향은 유향나무 상처에서 흐른 수액이 굳은 작은 덩어리. 유향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지구에서 극히 드문데, 오만이 그 중심이다. 예멘에 가기 전 살랄라 해변 쪽이라 들었는데, 가본 적은 없다. 어쨌든 우주에서 가장 좋은 유향은 오만에서 살 수 있다. 뜨겁게 달군 돌 위에 올려 매캐한 연기를 낸다. 손님을 환영하는 의미다. 간혹 유향에 대해 묻는 자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한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는 세 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황금과 몰약 그리고 유향이다. 석가탑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덧붙인다. 그래도 부족하면 이집트에선 미라를 만들기 위해 썼다는 말을 들었다고 꽹과리를 친다. 골목마다 유향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무스카트의 상인들은 공간을 지킬 뿐, 눈이 마주쳐도 들어오라는 작은 몸짓도 없다. 말라 비틀어진 빵 껍질보다 드라이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골목을 몇 바퀴 돌아 등을 곧게 편 노인의 가게에 들어갔다. 환영과 답례는 서로 생략했다. 간단히 고개를 숙인 후 “가게에 진열된 것 말고 가장 좋은 유향을 꺼내주세요”라고 말했다. 노인은 가만히 나무 사다리를 올랐다. 얕은 다락에서 유향 봉지를 꺼냈다. 그 유향이 진짜 가게에서 가장 좋은 유향이었는지, 노인이 손님의 기호에 맞춰 혼신의 연기를 펼친 건지 모를 일이다. 노인이 값을 정했고, 나는 토를 달지 않았다.
서울에서 유향을 꺼냈다. 그제야 도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딱히 가진 게 없었다. 처음엔 달군 프라이팬에 올렸다. 연기가 창문을 뚫고 나갈 만큼 거실에 가득 찼다. 여기는 아라비아가 아니고, 이건 아니었다. 숯을 피운 화로 위에 돌을 올려 달구고 약간 식힌 다음 유향을 올렸다. 하루가 갔다. 생각 끝에 티라이트로 피울 수 있는 아로마 램프를 샀다. 열전도를 고려해 촛불 아래 대리석 받침을 괬다. 그제야 연기 없이 서서히 녹으며 공간을 침식했다. 숭고했다. 향기를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눈을 감고 있으면 칠흑 같은 공간 한가운데, 얕고 잔잔한 물 위에 맨발로 딛고 선 기분. 숨은 몰아쉬는 게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침묵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유향이 등 떠밀듯 응원하는 침묵은 아름다웠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유향을 녹였다. 문득 나도 몰래 발끝을 들어 조용히 걷기도 했고. 아침에는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빗소리 같았고, 밤에는 혹등고래의 노래 같았다. 유향으로 나를 두르는 시간이 익숙할 때쯤 고질적인 공황 발작에서 반 발짝 멀어졌다. 일하다 질식할 것 같은 순간,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억지로 울어서라도 빠져나와야만 했던 순간이 잦아들었다. 거의 매달 함께했던 사진가들은 촬영 중간에 공황장애 약을 먹었다. 다 그렇게 일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들에 비해 심각하지 않은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유향은 내 안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했고,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 늘었다.
아로마 램프가 거슬렸다. 불완전해서 완벽한 수준도 아니고 ‘대충’이니까. 아마존엔 아라비아 문양이 쉼표 없이 들어찬 유향 버너만 있었다. 인도 자이푸르 도자기 마을에서도 유향 버너로 쓸 수 있는 걸 찾지 못했다. 결국 포기한 채 직접 주문해 만들기로 했다. 도예가 최나은을 찾았다. 해변을 빚는 작가라면, 거절하지 않을 것 같아서. 3박 4일 동안 불을 지피는 가마엔 다른 종류의 흙과 유약이 발린 유향 버너 여러 개가 구워졌다. 열전도를 위해 여기저기 구멍을 내며 흙을 가져다 가마로 길을 재촉할 때마다 위로와 감사를 함께 보냈다. 최나은 작가가 하얗게 눈이 온 가마터 사진을 보내며, “온통 하얗다”는 문자를 보냈을 때쯤 검은 돌 모양의 유향 버너가 완성됐다. 단순했고, 기능적이며, 튼튼했다. 구들장의 바닥을 치며 ‘이만하면 됐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설 만큼 좋았다. 티라이트에 불을 댕겨, 유향 버너에 불을 지피는 즐거움이 더해졌다. 기다림과 수많은 과정은 필연이었으나, 약속된 아름다움을 위한 여정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매달 마감을 재촉하고, 전화 통화는 “여보세요” 대신 “죄송한데요”라고 시작하며, 이메일 제목으로 ‘어전트(Urgent)’ ‘이머전시(Emergency)’를 남발하던 때와는 좀 달랐다. 매거진 에디터 1년 차 시절 에르메스 남성복 디자이너를 인터뷰했는데, “우리는 옷을 위해 두 가지를 아끼지 않아요. 시간과 돈”이라 말했다. 유향 버너를 만들며 적어도 재촉하진 않았다. 뭔가 만들기 위해 시간을 쪼개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요즘 유향에 불을 지피고 잠시 집 근처를 산책한다. 다른 사람들이 가끔 산책을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유향의 향이 퍼진 공간과 문득 맞닿았을 때 느낌은 배가된다. 황무지를 가로질러 만난 오아시스처럼. 가끔 유향이 바짝 타버린 청어처럼 재가 될 때까지 길고 깊은 낮잠을 잔다. 오충환(프리랜스 패션 에디터) (VK)
- 글
- Chloe King, 오충환
- 사진
- 장기평
- 모델
- 김하은
- 헤어
- 이혜진
- 메이크업
- 유혜수
- 스타일리스트
- 장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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