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초의 비상한 능력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 이면의 비상한 능력. 웰니스 생태계에 ‘식초’가 혁명을 일으킨다.
50대 중반에도 변함없이 44 사이즈를 유지하는 제니퍼 애니스톤, ‘웰니스’의 고유명사가 된 기네스 팰트로와 철두철미한 자기 관리라면 두말할 필요 없는 빅토리아 베컴. 건강을 위한 루틴으로 하루가 빼곡한 그녀들의 아침 시간에 암호명과 같은 공통된 일과가 있다. 이름하여 ‘ACV’, 풀 네임은 애플 사이다 비니거(Apple Cider Vinegar)다.
요즘 내 주변에서는 알게 모르게 다이어트 열풍이 불고 있다. 다이어터들에게 일명 ‘양약(良藥)’으로 통하는 식욕 억제제, 삭센다 주사, 온갖 지방 분해 시술까지. 10kg에 이르는 체중 감량으로 몰라보게 달라진 지인들을 보고 나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는 마음 반, 수차례 겪은 요요 현상으로 결국 몸의 항상성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회의적인 마음 반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지난달만 해도 미국 <보그> 웹사이트에 올라온 이 과일 식초에 대한 기사가 세 건. 틱톡에서는 ‘애플 사이다 비니거 구미’라는 젤리 형태의 보충제가 연일 기록적인 검색 수를 달성하며 젊은 세대의 새로운 웰니스 트렌드로 확산되고 있다. 식전에 물에 희석해서 먹는 사과 식초 한 스푼의 효과는? 식후 치솟는 혈당을 낮춰 당뇨 증세를 완화하고, 체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며, 식욕을 억제하고, 체내 염증을 개선한다는 것이다. 의구심 많은 사람이라면 코웃음 치겠지만, 다이어트에 관심 많은 사람에겐 그야말로 귀가 솔깃해지는 효과다.
군침이 싹 돌게 만들다 못해 얼굴이 온통 찌푸려지는 신맛. 알코올을 아세트산으로 바꾸는 대표적인 박테리아를 이용해 라틴어로 ‘신 와인(Sour Wine)’이란 뜻의 단어에서 기원한 식초(Vinegar)가 붐을 일으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고대에는 식초가 조미료보다는 약용으로 널리 쓰일 만큼 풍부한 비타민 성분과 항균 작용으로 기침이나 인후염 치료제로 활용됐다. 그만큼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오래전부터 입증되었다는 이야기다. 2010년대에는 ‘홍초’라는 이름으로 선풍적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석류나 자몽, 복분자 등 붉은색 과일을 발효시켜 만든 식초는 늘씬한 몸매의 모델이나 동안 여배우들을 통해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다. 뷰티 월드에서는 먹기보다는 피부나 모발에 양보하는 방식으로 식초를 소비했다. 샴푸를 악의 축으로 취급했던 ‘노 푸(노 샴푸)’가 유행하던 몇 년 전에는 사과 식초와 베이킹 소다를 이용한 샴푸 대용 레시피가 대두됐다. 식초는 정화·항균 작용을 해 두피 스케일러나 헤어 컨디셔너 만들 때 넣기도 하고, 독소 배출을 위한 입욕제로 활용하기도 한다. 지금 식초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왜 식초를 먹는 행위가 다시 르네상스를 맞이한 것일까?
2018년 <Journal of Functional Foods>에 실린 연구 논문에서는 식사 시 사과 식초 한 스푼을 섭취한 사람들이 하루에 250kcal를 줄인 사람들보다 12주 만에 더 많은 체중을 감량했다고 발표했다. 애리조나 주립대학교 영양 프로그램 부국장을 맡고 있는 캐롤 S. 존스턴(Carol S. Johnston)은 “탄수화물 함량이 높은 식사를 하기 직전 소량의 식초를 섭취하면 혈당 상승을 둔화시킬 수 있고, 전분 흡수를 부분적으로 억제해 혈당 반응을 20~40%까지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식초의 아세트산은 설탕, 녹말이 포도당으로 전환되는 속도를 느리게 만들고, 포도당이 우리 몸에 ‘부드럽게’ 유입되도록 돕는다. 우리가 매일 먹는 쌀밥과 빵, 각종 간식과 음료 등 가공 탄수화물이 일으키는 ‘혈당 스파이크’를 완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쌀,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발사믹, 현미 등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모든 식초가 포도당에 작용하는 효과는 동일하다. 다만 사과 식초에 주목하는 이유는 물에 타서 마시기에 가장 적절한 ‘맛’을 지녔기 때문이다. 영양학자이자 보충제 브랜드 아르타 헬스(Artah Health) 창립자 리안 스티븐슨(Rhian Stephenson)은 “특히 피곤할 때 소화, 혈당 조절에 도움이 됩니다. 당뇨병 환자의 치료제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현대인의 인슐린 반응과 복부 팽만감, 식욕과 포만감, 잠재적으로는 콜레스테롤 수치를 관리할 수 있죠”라고 덧붙인다. 결론적으로 맵고, 짜고, 달고, 자극에 푹 절어 있는 오늘날 우리 식습관에 더없이 필요한 특효약인 것이다.
내친김에 기대감을 안고 쿠팡에서 ‘애플 사이다 비니거’를 검색했다. 진입 장벽이 높은 식초 특유의 맛 때문에 달콤한 젤리 형태로도 출시되고 있지만, 상당한 양의 당분이 함유되어 있어 과감히 패스. 가장 대중적 인지도를 지닌 데니그리스(De Nigris)와 브래그(Bragg)의 사과 식초 두 병을 구매했다. 뚜껑을 열자마자 ‘쉰내’에 가까운 강렬한 향이 나 평소 신맛을 즐기는 편임에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글루코스 혁명>의 저자 제시 인차우스페가 권장하는 식초 섭취 적정량은 하루 1큰술. 얼음을 넣어 차게 마시거나 탄산수로 대체하니 점차 먹을 만해지기 시작했다. 식사 20분 전후에 마셔야 이상적으로 혈당 조절 효과를 볼 수 있다. 샐러드 드레싱으로 활용하는 것도 훌륭한 방법. 다만 온라인에서 눈에 띄는 것처럼 식초를 위스키처럼 ‘스트레이트’로 마시거나, 희석한 물을 빨대 없이 그대로 들이켜는 것은 치아의 법랑질이나 식도를 손상시킬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마시기 시작한 지 어느덧 3주. 스스로 체감할 만큼 식욕이 억제되거나 살이 빠지는 효과는 찾아볼 수 없어 서서히 의구심이 들 무렵, 피트니스 센터에서 진행한 체성분 검사 후 평소와 다른 결과를 들었다. 문제가 다분한 신진대사는 제쳐두고, 100g의 변화도 없는 체중 가운데 체지방은 2% 살짝 못 미치는 수치가 줄었으며, 다른 항목에 비해 무기질 상태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쉽게 말하면 회복력이 뛰어난 겁니다. 근육에 피로가 쌓여도 다음 날 아침이면 빠르게 원상태로 복구되는 거죠.” 그러고는 요즘 따로 관리하냐고 물었다. 근육통의 원인이기도 한 젖산을 식초의 유기산이 분해하는 것은 물론, 무기질 흡수력을 높이는 식초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초는 여성 건강과도 관련이 밀접하다. 한 연구에서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앓는 여성 7명 가운데 4명이 사과 식초 음료를 하루에 한 번 마시기 시작한 지 40일 만에 다시 생리를 시작했다는 결과가 있다. 콜레스테롤과 인슐린 수치가 높을수록 불임, 여성 질환 발병 가능성이 높기에 식초의 혈당 조절 효과가 연쇄 작용을 일으켜 난소 기능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식초의 임상 효과는 주로 소규모 집단을 상대로 진행해왔기에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취재차 만난 산부인과 전문의는 말한다. 그뿐 아니라 사과 식초를 마시거나 목욕물에 떨어뜨리면 ‘그곳’의 불쾌한 냄새가 제거된다는 낭설이 SNS에서 떠도는데, 냄새가 유독 신경 쓰이는 경우는 염증일 가능성이 높으니 민간요법보다는 병원을 먼저 방문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쯤 되면 식초를 이미 장바구니에 담고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식초가 급증하는 ‘젊은 당뇨’ 치료제가 될 수는 없지만, 조금 더 쉽고 저렴한 방법으로 식습관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임은 분명하다. 여기에 위산을 중화해 역류성 식도염을 방지하고, 소화작용을 도우며, 중성지방을 낮추는 한편 식욕을 적정 수준으로 조절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웰니스를 향한 여자들의 무한한 갈망. 그다음 등장할 ‘뉴 페이스’는 무엇일까? (VK)
- 포토그래퍼
- 정우영
- 프롭
- 전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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