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화와 눈을 맞춘 순간
막이 오르기 전, 새벽같이 투명한 얼굴을 한 엄정화가 싱그럽게 웃는다. 한결같이 순수하고 반가운 얼굴이다.
디바, 댄싱 퀸, 스타일 아이콘, 신드롬 메이커. 매혹적인 뱀파이어처럼 언제나 한결같은 존재감을 발산하는 것이 참으로 비상하다 여기던 엄정화를 마주한 어느 날, 그에게서 낯선 활력이 느껴졌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일요일 오후였다. 무지개와 오픈카, ‘캘리포니아’라는 단어가 낙천적인 형광색으로 수놓인 티셔츠와 청바지, 스니커즈 차림으로 듬직한 반려견 ‘슈퍼’와 함께 등장한 엄정화는 경미한 시차에 시달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새 영화 <화사한 그녀> 시사회와 화보 촬영으로 곧장 ‘일 모드’에 진입하니 조금 어지럽긴 하군요(웃음).” 엄정화는 아크네 스튜디오의 2024 봄/여름 패션쇼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다녀왔다. 팬데믹 직전, 오프화이트 쇼에 참석하며 생애 첫 패션 위크를 누빈 그가 전위적인 멋과 도전 정신을 중시하는 또 하나의 브랜드로부터 러브콜을 받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며칠 뒤 엄정화의 인스타그램에는 검은색 긴 생머리에 시크한 블랙 드레스 차림으로 함께 쇼를 감상한 뮤지션 멜로, 래퍼 BM, 크리에이터 정글, 배우 원지안, 모델 아이린과 찍은 사진이 주르르 업로드됐다. “흥미로운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자신만의 기회와 무대를 과감하게 개척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엄청난 영감을 받았죠. 덩달아 저도 흥분되더라고요. 우리 세대에도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초대를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관심 있는 브랜드가 있으면 ‘너희 쇼에 가보고 싶은데 초대해줄래?’라고 먼저 연락해보는 거죠.”
배우로서, 가수로서 공평하게 사랑받으며 밀도 높은 상반기를 보낸 엄정화에게 스페인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도시 마요르카에서부터 시작된 이번 여정은 꿈같은 휴가였다. “아마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 아닐까요?” 돌이켜보면, 좋은 기운은 사실 지난해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존경하는 ‘대배우’들과 함께 촬영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그 시작이었다. “<우리들의 블루스>를 촬영하기 직전에 갈비뼈를 다쳐서 걱정이 많았는데 촬영하는 내내 너무 즐거웠어요. 이 작품을 통해 오랜만에 관심도 많이 받고, 여러모로 채워지는 것이 많은 시간이었죠.” 드라마가 한창 방영 중이던 지난해 봄, 사랑하는 동생 이효리의 예능 프로그램 <서울체크인>에 종종 모습을 비친 엄정화는 충만하고 행복해 보였다. 이후 <닥터 차정숙>이 운명처럼 그를 찾아왔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이거야, 이건 내가 너무 잘할 수 있는 거네!’ 싶었어요. 재미있고, 잔잔한 감동도 있고, 여자의 마음을 콕 집어내는 대사까지, 전부 마음에 들었죠. 팬데믹으로 인해 시나리오를 받은 지 1년이 지나서야 촬영을 시작했는데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 것 같아요.” 순수한 진심과 장난기, 잔뜩 응집된 감정 표현을 불쑥불쑥 오가야 하는 차정숙의 ‘톤’을 고민하느라 촬영하는 내내 전전긍긍하며 연기했지만, 엄정화는 스스로를 믿고 끝내 흔들림 없이 촬영을 마쳤다. “(김)병철 씨처럼 재미있는 배우들이 많이 나오니까 순간순간 절제할 때가 많았어요. 중반부쯤 ‘주인공이 너무 진지한 거 아니야?’라는 피드백을 듣고 ‘아차’ 싶었지만 어떡해요. 다시 찍을 순 없잖아요. 그럴수록 나를 믿어야 한다고 중심을 잡았죠.” 20년 차 가정주부에서 1년 차 레지던트로 변신하며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나 스스로 찾아볼게”라고 외치던 차정숙처럼, 요행을 바라지 않는 엄정화는 결국 자신만의 답을 만들어갔다. <닥터 차정숙>은 최고 시청률 18.5%로 종영했고, 무려 17개국에서 넷플릭스 ‘톱 10’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 엄정화는 언제나 유일무이한 길을 개척했다.
“좋은 역할을 만나면 언제나 심장이 떨리죠. 부러운 용기와 결단력을 지닌 <싱글즈>(2003)의 동미와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안겨준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의 연희에 대한 애정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아요.” 만나지 못한 인물과 이야기에 대한 엄정화의 열망은 한결같이 뜨겁다. 몇 달 전, 개인 유튜브 채널 ‘Umaizing 엄정화TV’에서 최근 흥미롭게 본 영화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소개하며 그는 그런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양자경이 부럽다고 터놓았다. 차기작 <화사한 그녀>는 관객 122만 명을 동원한 <오케이 마담>(2020) 이후 이유 있는 변신을 감행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던 차에 만난 반가운 작품이다. “제작을 맡은 신영이엔씨의 김현정 대표님은 사실 줄곧 드라마만 만들던 분이세요. 그런데 자기는 영화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꼭 한 번 영화를 제작하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항상 뭔가를 뜨겁게 갈망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이끌려요. 저 역시 좋은 배우가 되고 싶고, 좋은 영화를 만나고 싶은 바람이 크니까요. 꼭 한 번 함께 연기해보고 싶었던 송새벽 배우의 출연을 강력하게 지지한 것도 그렇고, 제 의견을 용감하게 피력해 완성한 영화라 의미가 큽니다.” 개봉 직전 진행된 VIP 시사회에서는 명세빈과 화사 등 작품을 통해 인연을 맺은 동료들이 참석해 엄정화의 도전을 응원했다.
두 개의 삶. 가수 엄정화가 주인공인 또 다른 멀티버스 역시 올 한 해 바삐 요동쳤다. 2010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갑상선암의 위기를 딛고 10집 앨범 <The Cloud Dream of the Nine>(2017)과 환불원정대로 활동하며 꾸준히 음악적인 행보에 몰두해온 엄정화는 이번에는 예능 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에 출연해 무대 위를 활보했다.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보아, 화사와 함께 5개월 동안 진행된 전국 투어의 일환으로 오일장, 농구 코트, 소방서, 대학 축제 등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며 새로운 관객도 많이 만났다. 농구장에서 자신을(혹은 차정숙을) 향해 열광하는 어린이 팬들 앞에서 ‘Festival’ 무대를 선보이며 ‘초통령’ 바이브를 뽐내기도 했다. “정말 즐겼어요. 오래전에 무대 위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생생하게 기억나더라고요. 실은 개인적으로 과거의 퍼포먼스를 복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항상 새롭게 도전하는 쪽이 좋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배반의 장미(1997)’나 ‘몰라(1999)’ 무대를 선보이는데 감동이 밀려왔어요. 같은 시대를 빛낸 아티스트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어가는 것도 좋았고요.”
투어에서 선보인 첫 번째 공연으로 ‘배반의 장미’를 부를 땐 생경한 감각에 휩싸였다. “한창 활동할 때 정말 절실한 마음으로 부르던 곡이에요. 아주 오랜만에 무대 위에서 선보였는데, 그때의 절실함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다는 확신이 느껴져 반갑더군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엄정화는 사실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3)를 통해 배우로 먼저 데뷔했다. 당시 영화의 음악감독이던 신해철의 눈에 띄어 그가 작곡한 ‘눈동자’를 부르게 됐고, 이후 탁월한 표현력과 세련된 감각으로 끝없는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화려한 디바로 탄생했다. “‘눈동자’는 너무 좋은 곡이죠. 사실 저의 1집 앨범 <Sorrowful Secret>(1993)이 발매됐을 때도 아주 마음에 드는 곡은 없었는데, 운명처럼 ‘눈동자’를 만났어요. 이 곡 때문에 ‘배반의 장미’와 ‘몰라’의 엄정화도 탄생할 수 있었다고 믿어요.”
2008년 발매된 ‘D.I.S.C.O’로 아이코닉한 음악과 패션을 선보이며 가수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뒤 그는 10년 가까이 마음 놓고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댄스가수 유랑단>을 통해 듣게 된 음색과 음악성에 대한 칭찬이 유난히 반가웠던 이유다. “목소리 좋아요. 노래 좋아요. 무대 멋있어요. 이런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죠. 후배들이 피처링을 부탁할 때도 참 행복해요. 시대를 대표하던 아이콘이 아니라 동시대 뮤지션으로 계속 부름받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엄정화는 모든 기회와 무대를 감사한 소명으로 붙들며 살아가고 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느낀 순간들이 전부 사명의 길이었다고 믿어요. 데뷔하자마자 연기와 노래에 모두 도전할 수 있었고, 감사하게도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때조차 가장 좋은 길을 걷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죠. 감사함으로, 요즘은 엄마와 친구, 동료 등 항상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엄정화는 인터뷰 내내 친근하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건넸다. <댄스가수 유랑단>의 일정 중 하나였던 팬 사인회에 참석한 그는 자신을 보고 울먹이는 오랜 팬들을 항상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30년 가까이 변함없이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스타와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바라는 팬. 이들이 이룬 감동적인 파장은 경계 바깥에 자리한 이들의 마음까지 넉넉하고 온화한 기운으로 물들였다. “팬덤이 엄청난 가수는 아니었거든요. 제 풍선 컬러가 핑크였어요. 여러 가수가 함께 출연하는 콘서트 무대에 오르면 H.O.T., 핑클, god 사이에 낀 자그마한 핑크색 구름이 나타났는데 참 귀엽고 힘이 됐죠. 오래 봐온 팬들은 이제 이름도 다 알아요. 관계가 하도 오래돼서 깊은 대화도 곧잘 나누죠. 서로의 존재가 그저 고마우니까 눈만 마주쳐도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무대에 서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저도 흔들렸어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계속 음악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기도 했죠. 그럴 때 팬들을 떠올리면 ‘그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와이 낫?’ 결국 이렇게 마음먹게 되더라고요.”
엄정화는 벌써 다음을 바라본다. 12월에는 무려 23년 만에 단독 콘서트로 관객을 만난다. 홀로 무대를 채우기에 앞서 걱정스러운 마음을 토로했지만 그의 마음에 벌써 기분 좋은 설렘이 한가득 밀려들고 있음을 엄정화의 반짝거리는 눈동자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다. “용기를 내보는 거예요. 목소리는 결코 완벽하지 않고, 무대에서도 계속 불안하겠죠. 그래도 <댄스가수 유랑단>을 통해 용기가 생겼고, 20년 만에 대학 축제 무대에 올랐을 땐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아요. 재밌겠다, 그럼 해보자, 항상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보려고요.” 새벽같이 포근한 엄정화의 음성이 스튜디오에 나직이 내려앉았다. 소파에 기댄 채 이야기를 주고받던 우리의 발밑을 맴돌던 ‘슈퍼’가 어느새 깜빡깜빡 졸고 있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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