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후, 이솜이 발견한 것
햇살이 비집고 덤벼드는 창가를 보니, 이솜이 그림처럼 떠 있다. 오후가 될수록 이솜은 길어지고, 그림자는 웃고 있다.
10월 4일 이솜은 부산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에 섰다. 코르셋으로 보디라인을 구조적으로 표현한 베르사체의 블랙 드레스를 입은 이솜 옆에는 드라마 <LTNS>에 함께 출연한 안재홍이 블랙 턱시도로 코드를 맞췄다. 처음에 쭈뼛하던 두 사람은 몇 걸음 안 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배우는 생각보다 영화 현장이란 일정한 공간에 갇혀 있기에 레드 카펫이 ‘화려한 외출’이란 얘기를 들었고, 그것이 신난다는 배우도 있었다. 이솜에겐 긴장되고 어색한 경우가 많았다. “5년 전 영화 <소공녀>로 안재홍 오빠와 레드 카펫에 섰어요. 정신없이 후다닥 들어갔죠. 부산에선 맘껏 즐기자고 서로 다짐했죠(웃음).”
나와 대화 중인 이솜은 스웨트셔츠에 넉넉한 품의 반바지를 입고 있다. 블랙 드레스의 이솜보다 미소가 좀 더 수줍다. 오늘 <보그> 촬영에선 오후의 자연광이 드는 주택에서 이솜의 이런 얼굴을 담고 싶었다. 그간 작품에선 그녀의 말마따나 강한 캐릭터가 많았으니까. 이솜은 얼굴이 잘 변한다. <길복순> 차민희의 ‘또라이’ 같은 얼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유나의 복고적인 얼굴, 이솜의 필모그래피에서 뺄 수 없는 <마담 뺑덕>의 슬픈 멜로의 얼굴까지. 그리고 내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매진 행렬을 뚫고 <LTNS>를 겨우 봤다고 말하자 “정말요?”라면서 눈썹을 시옷 자로 만드는 사랑스러운 오늘의 얼굴.
<LTNS>는 <소공녀>를 만든 전고운 감독,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이 공동 연출한 코미디 드라마다. OTT에서 연말 방영이지만 1·2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공개됐다. 내가 ‘광클릭’으로 구한 좌석은 A열 구석. 380석의 대형 스크린을 꺾어 보느라 힘들었지만, 상영 후 이어지는 GV는 프런트 로려니 여겼다. 이솜이 “안녕하세요!”라고 경쾌한 솔 톤으로 등장하자 옆자리 관객이 속삭였다. “이솜 목소리가 이랬어?” 예능 활동이 별로 없던 배우이니 누군가는 인간 이솜의 목소리가 낯설 수 있다. 물론 행사를 위해 텐션을 끌어 올린 목소리였지만 말이다. 이솜은 관객의 캐릭터 몰입을 위해 개인을 드러내길 주저하던 때가 있었다. “맡은 캐릭터마다 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변하더라고요. 주체적인 사람 같다가 또라이 같다가 신비감 있어 보이거나. 그런 재미도 있었지만, 최근 개인적인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분도 많아서, 유튜브 같은 다른 콘텐츠에도 조금씩 출연하고 있어요.” 근래 화보 촬영이 잦은 이유도 비슷하다. “작품 홍보가 아니면 화보를 잘 안 찍으려고 했는데, 많이 바뀌었어요. 내가 잘할 수 있고, 재미있고,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열어두기로 했죠.” 이솜은 2008년 <체크 잇 걸>이라는 Mnet의 모델 선발 프로그램을 통해 발굴됐다. 우승한 이솜이 모델 한혜진과 함께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잡지의 커버 촬영을 했다. 그것이 이솜의 데뷔였고, 벌써 15년 전이다.
<LTNS>가 상영될 때 이솜도 관객과 함께 관람했다. “어디서 웃는지 계속 살폈죠. 근데 큰 스크린으로 보니 약간 부끄럽더라고요(웃음).” <LTNS>는 전고운 감독 표현으론 “집에서 혼자 킬킬거리며 보는” 생활 밀착형 섹시 코미디다. 임대형 감독은 “술안주로 좋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LTNS’는 ‘Long Time No Sex’의 약자다. 섹스리스가 될 정도로 아파트 대출금에 허덕이는 젊은 부부가 다른 사람들의 불륜 현장을 잡아내 돈을 번다는 내용. 그만큼 직접적이고 과감한 대사와 장면이 많다. “전고운 감독님이 배우를 지켜줘야 한다며 말릴 정도였지만, 현실적인 작품인 만큼 더 과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솜은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연출 아이디어를 냈고, 우린 현실 옆집 언니 이솜의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거다.
이솜과 전고운 감독은 <소공녀>를 통해 큰 호응을 받았지만, 그래서 <LTNS>를 함께하진 않았다. “작업을 한 번 해봤기에 서로 더 신중했죠. 전 그저 감독님의 다음 작품이 뭘까 궁금했고, 감독님은 ‘시나리오 썼는데 한번 리뷰해줄래?’ 정도였어요. 근데 글이 ‘킬킬’ 웃을 만큼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관계를 떠나서 그저 이 작품을 하고 싶었죠.” 부부로 나오는 안재홍 배우와도 <소공녀>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안재홍이 감독·주연을 맡은 단편영화)에 이어 세 번째다. 재미난 점은 영화제 GV에서도 일부 관객은 세 작품을 따로 보지 않고 <소공녀> 커플의 성장사로 여겼다는 것. 예를 들어 방이 너무 추워서 포옹도 제대로 못한 <소공녀>의 가난한 연인이,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로 울릉도에서 헤어졌다가, 드디어 <LTNS>에서 난방 되는 아파트에 입성해 감격하는 식이다. 그만큼 이솜과 안재홍의 ‘케미’ 팬들이 많다. “세 작품 다 장르와 스토리가 다르지만,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한다니 재밌었어요. 관객이 만들어가는 한 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고요(웃음).”
이솜이 최근 본 최고작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바빌론>이다. 그중 당대의 영화배우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가 촬영 현장을 둘러보며 감동하던 장면을 좋아했다. 영화 현장에 애정이 깊은 이솜이기에 크게 와닿았던 것. “치열하게 만들어내는 현장이 좋아요. 이번 작품도 감독과 배우들이 더 잘하고 싶다는 의지로 뭉쳤죠.”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는 감당하려 한다. “기록으로 남는 결과물(작품)이 훨씬 중요하니까요.” 그런 현장을 거쳐 개봉을 준비하는 작품만 네 편이다. <LTNS>를 비롯해 영화 <출장수사> <싱글 인 서울> <별빛이 내린다>. “얼른 개봉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배우들도 코로나 이후로 묵힌 작품이 많을 거예요. 시대는 빨리 변하고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기에 빨리 관객과 만나길 바라죠.”
지난 추석 연휴에는 배우 강동원, 이동휘와 함께 출연한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 개봉했고, 비슷한 시기의 다른 한국 영화보다 관객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지난해 추석과 비교하면 미미하다. 지금 한국 극장가는 위기설까지 나오는 중이다. 좋은 작품이 나와야 하는 것은 기본값이지만, 이솜은 큰 스크린에서 보는 영화적 경험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영화 보기를 중요시하고, 되도록 극장에서 보려고 해요. 주변 영화관의 상영 시간표를 자주 들여다보고, 보고 싶은 작품은 먼 지역까지 찾아가죠. 극장 관람은 제게 선물이에요. 치유되는 기분이고, 여행 못 가도 좋은 곳에 다녀온 것 같아요.”
개봉 준비작 중 최국희 감독, 심은경·이솜 주연의 <별빛이 내린다>가 기대된다. 이름이 같은 두 대학생의 파스텔 톤 성장 영화다. 이솜은 “아마 마지막 청춘물일 것”이라면서 웃는다. “제가 연기한 현정이는 글로 표현되기보다는 이미지로 사랑스럽게 표현되는 캐릭터죠. 젊은 에너지와 예쁨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아직 이런 캐릭터가 들어온다니 감사하죠(웃음).” 이솜은 ‘그때’ 할 수 있는 역할, ‘지금’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여기기에 그런 의미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물론 해보지 않은 역할도 늘 찾고 있어요.”
<별빛이 내린다>에 함께 출연한 심은경과는 절친이 됐다. 그럼에도 서로 존댓말을 쓴다. 이솜은 누구에게도 말을 잘 놓지 않는다. 상대가 편하게 하라고 해도 ‘~요’를 들어내기까지 1년은 족히 걸린다고. “심지어 후배가 반말을 해도 전 못 놓겠더라고요.” 10대에 데뷔해 사회에서 만난 인물들이 오빠, 언니, 실장님이기도 했지만, ‘배려’를 중시하는 가치관 때문이기도 하다. “심은경 배우와는 그런 면에서 무척 잘 맞았어요.” 그렇다고 둘이 자주 연락하진 않는다. 수천 개의 전화번호를 자랑하며 인맥 관리에 열을 올리는 유형과는 정반대다. 심지어 카카오톡 앱도 없다. “잘 있길 바라는 마음을 간직하지,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요. 상대도 자기 생활이 있을 테니, 전 이게 배려라고 생각해요.” 배려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이솜이 양보하지 않는 하나가 있다. “과거에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언제나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려 하죠.”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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