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박서보의 마지막 전시

2023.10.19

박서보의 마지막 전시

영면에 든 박서보 작가의 유작전이 부산 조현화랑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4일, 박서보 작가는 ‘쓰기(Écriture)’를 멈추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태어난 그는 광복 이후 탈식민지적 고민과 전후 국가 재건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작업에 몰두했으며, 한국 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이끌며 단색화의 기수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해왔습니다. 단색화는 러시아의 구성주의, 그린버그의 환원주의, 유럽의 제로, 일본의 모노하에 이르기까지 세계 주요 회화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지만, 비로소 본질적인 표현 방식으로 구현된 것은 박서보를 통해서였습니다.

박서보 작가의 부고를 듣고 파리에서 이우환 작가가 보낸 편지.

박서보 작가의 묘법(猫法, Écriture)은 ‘글을 쓰듯 선을 긋는 것’을 말합니다. 캔버스 위에 도료를 칠하고 아직 마르지 않은 표면에 연필로 선을 긋고, 그은 선 위에 도료를 칠해 또다시 선을 긋습니다. 그의 말대로 세간을 떠난 고요 속에서 ‘염불을 반복해 외는 승려’와 같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되는 명상적인 작업입니다. 박서보 작가의 묘법은 1970년대 초기의 연필 묘법, 1980년대 중기 묘법, 2000년대 이후의 후기 색채 묘법으로 나뉘며, 갈수록 표면에 각인된 선의 폭은 더 뚜렷해지고 측면에서 보았을 때 더욱 도드라집니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단색화는 강렬한 순색이었다가 한 걸음 다가오며 발견하는 결과 질의 존재감이 더해지죠. 브러시를 놓으면 그림이 완성된다는 서양의 관념과 달리, 박서보 작가의 묘법 회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동양의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온 생애를 예술에 몰두한 박서보 작가의 마지막 전시가 부산 조현화랑 달맞이점과 해운대점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8월 31일부터 11월 12일까지 열릴 예정이던 전시가 유작전이 되면서 20일 정도 연장돼 12월 3일까지 진행됩니다. 조현화랑은 1991년 박서보 작가의 첫 개인전으로 인연을 맺은 후 총 14번 전시를 기획해왔는데요. 이번 개인전을 통해 아직까지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박서보 작가의 신작 묘법을 선보입니다.

전시는 2020년대를 기점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후기 연필 묘법을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뜻깊은 자리로, 총 12점의 후기 연필 묘법이 공개됩니다. 또한 박서보 작가의 손자가 묘법을 재해석해 제작한 비디오 작품을 1,000호에 달하는 연보라 묘법 대작과 더불어 관객 참여형 설치로 소개하는 등 박서보 작가의 묘법을 다양한 물성을 통해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세라믹 묘법 6점, 판화 작품 15점을 비롯, 총 35점을 선보이는 전시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끊이지 않는 탐구와 실험 정신으로 작업을 이어온 박서보 작가의 아름다운 수행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기회입니다.

사진
조현화랑, 박서보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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