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추억들
파트릭 모디아노. 내게 이 이름은 일종의 주문(呪文)과도 같다.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파리의, 그곳 거리의 배회자가 된다. 그의 소설은 그만큼 강력하다. 이 말이 그가 그리는 세계가 또렷하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마치 희뿌연 안개 속, 검디검은 밤을 지나 어슴푸레한 빛이 먼발치에서 미세하게 가늠되는 새벽녘, 그때 느껴지는 차가운 적막, 오직 그때만 품을 수 있는 비밀처럼 느껴진다. 그의 세계는 이 모든 것을 품은 하나의 덩어리로 다가온다.
지금 당장 그의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파리 시내를 걷는 무모한 상상을 한다. 그것은 파트릭 모디아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뒤죽박죽인 기억의 조각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소설이라는 이름의 지도다. 그 지도에는 너무도 또렷하고 구체적인 이름들이 보인다. 구(區), 도로, 카페, 호텔, 바, 역, 기숙사, 공원, 서점… 그 모든 게 그대로 그곳에 생생히 살아 있을 것만 같다. 그가 말한 길을 따라 얼마간 걸어가면, 그러니까 저 길모퉁이를 돌기만 하면, 새벽까지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정적의 카페가 보일 듯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토록 구체적인 지도를 들었는데도 나는 매번 그의 세계에서 길을 잃는다. 방금 지나온 그곳을 금세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혹은 뭔가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혹은 기억과 추억의 비탈길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한 듯이. 구체적이고 세밀한 세계로 보이지만 그 세계는 뭔가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놓친 듯 공허하다. 헛헛한 마음을 안고 텅 빈 거리를 헤매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일까. 불투명하고 모호한 모디아노의 세계를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 배회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엮은 또 하나의 지도, 그의 앞선 지도들의 연속인 지도는 2017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잠자는 추억들>(2022, 문학동네)이다. 201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후 첫 번째로 펴낸 소설이자 1968년 데뷔작 <에투알 광장> 이후 쓴 스물여덟 번째 작품이다. 그의 세계가 언제나 그러하듯 이번에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억의 편린과 그때 마주쳤으나 어느새 잊거나 기억 저편으로 밀려난 우연한 만남, 그때의 사람들을 다시 그러모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 역시 우연한 만남이었다.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어느 날, 센강변 헌책 노점상 거리에서 <만남의 시간>이라는 책 제목이 내 눈길을 끌었다. 내게도 아주 먼 과거에 만남의 시간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자주 공허의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내가 그런 어지럼증을 느끼던 것은 나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바로 그때 막 만나서 알게 된 어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였다.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명 저 사람들을 따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야, 하고 속으로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런 인물들 중 몇몇은 정말이지 사람을 어느 지경까지 몰아갈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비탈이 미끄러웠다.“(7쪽)
‘만남의 시간’이라는 말을 기억하자. 이것은 단순히 한 권의 책 이름에 그치는 게 아니라 파트릭 모디아노의 세계 그 자체를 관통하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의 세계에서는 만남과 그 만남의 시간이 중요하다. 이 책을 번역한 김화영은 해설에 이렇게 썼다. “‘만남(rencontre)’이란 무엇인가?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전은 만남을 ‘우연히 어떤 사람이 있는 곳에 함께 있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접촉’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남의 비의도적 우연성이다.”(129쪽)
의도치 않은 우연한 접촉이야말로 모디아노 소설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연쇄적으로 거듭되는 사건이자 실체이며 그 모든 것이다.“나는 오랫동안, 진정한 만남은 오직 길거리에서만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어왔다.”(11쪽) 특히 그의 세계가 거리와 그곳을 배회하는 이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런 만남은 매혹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런 만남에 이끌리면서도 그로부터 탈주하고 싶다. 이 양가적 상태가 화자 장 D.를 이끌고 미지의 세계로 데려간다.
소설은 21개의 짧은 장(章)으로 구성됐다. 장 D.는 <만남의 시간>을 만나며 자신의 지난 만남의 시간을 기억해낸다. 수십 년 전, 열네 살 무렵부터 스무 살쯤까지 우연히 만났던 여인들, 그녀들을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사람들, 그들에 관한 기억, 기억의 구멍에 관하여. 그리고 마침내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기억으로까지 다가간다. 1965년 6월 늦은 밤, 우연히 알게 된 한 여인의 집, 양탄자 위에 있던 뤼도 F.라는 사내의 시신. 그로부터의 탈주.
모디아노가 이처럼 길 위를 서성이며 기억의 지도를 엮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누가 나에게 “그 모든 것을 다 무슨 목적으로?” 하고 물었다면 나는 그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파리의 신비들을 밝혀보려고.””(113쪽) 파리의 신비. 나는 이 말을 알 수 없는 생의 비밀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거나 잃어버린 기억, 시간, 사람, 사물에 깃든 설명 불가능하고 모호한 무엇에 우리의 현재가 기대고 있다. 나는 기꺼이 모디아노의 세계에서 신비로운 길 잃기를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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