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엔드 뷰티의 모든 것
뷰티 월드에서 ‘하이엔드 화장품’은 가격, 퀄리티, 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피라미드 최상위에 위치한다. 불황형 소비, 경험 위주의 실용적 구매 패턴이 주목받는 이 시점에 100만원을 웃도는 화장품이라니, ‘그사세’의 고고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아낌없는 투자와 공들여 만든 완성품에 대한 가치를 가격으로만 딱 잘라 정의할 순 없다. 진귀한 재료, 그를 다루는 기술력, 바이럴 마케팅보다 철저한 고급화와 희소성, 장인 정신으로 디테일까지 신경 쓴 아름다운 외관과 기품 있는 향기, 고유의 스토리텔링까지, <보그>가 최고급 화장품의 기준을 고루 만족하는 하이엔드 뷰티 세계를 공유한다.
게임에서 많은 걸 얻으려면 그만큼 많은 것을 걸어야 한다. 절대 가치의 끝을 향해 달리는 하이엔드 화장품의 인생 플레이.
몇 달 전 뷰티 살롱에서 겪은 일이다. 어시스턴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화장 잘 받게 해주겠다’며 아침 내내 안티에이징 스킨케어 루틴대로 공들여 바른 제품을 깨끗이 닦아내고 익숙한 향이 나는 크림을 펴 바르기 시작했다. 나는 단박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반질반질한 윤기가 도는 특유의 텍스처, 니베아 크림이었다. “라 메르 크림과 성분이 똑같대요. 가격은 거의 70배 차이인데 꾸덕꾸덕한 크림치즈 제형도 거의 흡사하고 보습감은 동일하더라고요. 요즘 피부가 건조한 고객들에게 이걸 사용하고 있어요.” 10년도 더 묵은 논란을 다시 마주할 줄이야. 스마트 쇼퍼의 아우라를 내뿜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달라요.” 제형의 하드웨어 골자만 비슷할 뿐 완벽히 다른 제품인 게 팩트니까. 그리고 “그게 70배나 가격 차이가 날 정도인가요?”라고 되묻는 그녀와 꽤 긴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20만원대 크림도 도마 위에 오르는데 100만원을 호가하는 하이엔드 스킨케어는 말해 뭐할까? 돈 앞에 우리는 모두 대문자 T! 혹시라도 여러분이 앞으로 만나게 될 ‘진짜’ 하이엔드 화장품을 짜릿한 호구의 추억으로 남기지 않도록 ‘가격의 구성’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그 값어치를 헤아려봐야겠다.
첫 번째 항목은 성분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노력. 화장품 전성분표시제가 시행된 지 16년이 지났다. 소비자는 내 피부에 닿고 흡수되는 제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투명하게 알게 됐고, 밀실에서 이루어지던 화장품 제조는 사방이 트인 유리방으로 자리를 옮긴 듯 보였다.
화장품 제조는 자주 오픈 키친에 비유되곤 한다. 유기농 인증을 받은 채소와 호주산 그래스피드 소고기로 눈앞에서 끓여주는 스튜. 하지만 채소의 보관 상태나 고기 입고 시기, 육우 등급까지 일일이 알려주진 않는다. 화장품 성분도 마찬가지다. 널리 알려진 히알루론산과 니아신아미드를 예로 들어보자. 자주 들어 잘 알고 있는 것 같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등급별 그램당 단가는 수십 배 차이가 난다. ‘같은 이름 다른 성분’이라는 말이다. 소비자가 열람할 수 있는 전성분표만으로는 어떤 등급의 성분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0.1g에 몇십만원을 호가하는 성분도 수두룩합니다.” 연구원 출신 화장품 브랜딩 & 제조 컨설턴트 김수정 이사는 원료의 퀄리티 차이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브랜드 산하 연구소를 운영하고, 게다가 독자 성분까지 있다면 그것 역시 돈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이 정도 넣으면 효과 있다’고 공인한 고시 성분을 수급해 적절히 넣은 다음 ‘기능성 화장품’으로 출시하면 오히려 싸다. 자격 갖춰 들어간 학교에서 출석 일수를 다 채우고 받은 수료증 같은 거니까. 낯설고 새로운 성분이 나만의 무기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성취하는 길은 꽤 지난하고 비용이 드는 도전이다.
17년 경력의 화장품 연구원 김해민 소장은 하이엔드 화장품이 발휘하는 ‘즉각적 효과’ 역시 원료 덕분인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발림성 등의 눈속임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하이엔드 화장품은 인내심이 부족한 소비자에게 그 가치를 최대한 빨리 증명해내야 하기 때문에 고가의 성분을 다량 넣어 처방하게 됩니다. 복수의 효능 성분이 동시에 안정되도록 만들려면 기술의 난이도 역시 달라져야 하죠.” 이제 요리사의 ‘스탯’을 따져볼 차례인가.
유효 성분을 찾아내는 것까지는 고가 화장품의 디폴트 세팅일 뿐, 하이엔드를 향한 레벨업이 본격화되는 건 이제부터다. 에스티 로더가 하이엔드 그리고 수명의 연장을 새로운 비전으로 삼으며 2024년 내놓을 ‘리-뉴트리브 컬렉션’의 신작은 노화 연구, 임상 치료 센터와 생물학 교수 등 전문가들이 모여 대사 조절 단백질을 무려 15년간 연구한 끝에 탄생한 결과물. 크리스챤 디올 뷰티의 초고가 스킨케어 라인 ‘로드비(L’or de Vie) 컬렉션’은 세계 최고의 와이너리, 그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는 이켐 포도나무에 내재된 힘을 알아내고자 하는 집념에서 시작됐다. 포도나무의 생명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에 황금빛 수액을 채취하고, 독자 발효 성분을 담아 극강의 안티에이징 스킨케어를 완성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30년. 화장품 연구원들은 럭셔리 브랜드를 대표하는 최고가 제품의 경우 개발 기간이 최소 2~3년 정도라고 말한다. 진귀한 원료를 찾아내는 것과 그것을 피부에 어떻게 침투시키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 김수정 이사는 이 과정이 빠르고 깊고 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매우 까다로운 숙제입니다. 원료의 활성이나 효능이 크고 좋을수록 피부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래서 적정 함량과 포뮬레이션을 찾아내는 과정에 몇 년씩 투자하는 건 기본이에요.” 게다가 피부 과학, 소재, 제형 각 영역 전문가들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 겨우 다섯 면을 맞춰놨는데 한 면의 컬러가 다른 큐브처럼 안타까운 좌절의 순간이 반복되기 일쑤다. 투자한 시간과 사람의 능력치가 원료를 능가하는 ‘돈’의 구성 요소인 것이다. 이것이 흔히 ‘R&D’라 부르고, 스스로 ‘열심’과 ‘전념’이라고 표현하는 가치의 실체다. 김해민 소장은 하이엔드에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타협은 있을 수 없다고 덧붙인다. “A라는 성분의 순도를 100이라고 가정해봅시다. 보통 모나지 않게 70으로 낮춰 쉽고 빠르게 제품을 만듭니다. 하지만 하이엔드는 달라요. 동원된 모든 원료가 저마다 효능을 100씩 발휘할 수 있게 정말 정교하게 연결을 조합하고 포뮬러를 처방합니다.”
‘고급 에스테틱에서 2시간 스파를 받은 듯한 안색과 감싸주는 듯한 피부 텍스처’ 같은 모호한 감각을 인정받기 위해 여러 단계의 테스터 평가도 수반된다. 피드백에 따라 모든 피부 타입, 의도했던 모든 피부 고민에 유의미한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조정을 반복한다. 테스터 한 명 한 명이 돈이고, 효과를 증명하기 위한 모든 과정에 비용이 지출된다.
콜마와 함께 제형을 개발할 때 파트너 연구원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매스가 95점이라면 럭셔리는 98점”이라던 인상적인 비유였다. 안전성에 문제가 없고, 사용감이 합격점인 95점짜리 제품에 좀 더 특화된 성분과 텍스처를 가미해 98점을 받으면 럭셔리 제품이 되는데, 현실에서 체감하는 3점 차이는 매우 크다고 말이다. 게다가 이 점수판은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로 디자인돼 있어 꼭대기에 등극할 수 있는 제품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중간 이상 오른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단 3점을 더 받기 위해 수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것이 럭셔리라면 하이엔드의 점수는 99점 혹은 그 이상. 단 1점 차이지만 플레이어들이 마지막 1점을 획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출시 일정이 목을 조여와도 과감히 드롭한다. 이 ‘OK 타이밍’이 10만~20만원대 고가 크림과 최고가 하이엔드 제품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류가 아시아를 점령했던 1세대 K-뷰티 시절, 6개월 안에 찍어내듯 브랜드를 만들어 수출해본 경험이 있는 지인은 내 직업을 매우 한가하게 혹은 한심하게 여긴다. 단가 딱딱 맞춰주는 OEM 회사와 로고부터 QC(Quality Control, 품질관리)까지 원스톱으로 서비스해주는 전문가를 소개했더니 화장품 만드는 일이 편의점에서 쇼핑하는 것만큼 쉬웠나 보다. 그래서인지 마주칠 때마다 권한다. “골치 아픈 일 그만두고 화장품이나 만들어!” 내가 하는 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나는 지구력이 부족해서 안 돼.”
화장품은 ‘뉴비’에 비교적 호의적인 산업이다. 임상으로, 감각으로 차이를 증명하면 창업주 혹은 크리에이터의 전직이 무엇이든 까탈스럽게 따져 묻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이엔드 화장품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VVIP 유통 채널을 가지고 있으니까’ ‘투자할 돈이 있으니까’ ‘좋은 성분을 찾아냈으니까’ ‘하이엔드 브랜드 출신 연구진을 스카우트했으니까’ 등을 계기로 시작된 브랜드라면 아직은 ‘그저 비싼 화장품’으로 분류해 판단을 보류한다. 진짜 하이엔드에는 수반돼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계관을 사수하는 고집’과 ‘존버의 투지’ 같은 것 말이다.
2030년까지 전 라인을 친환경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TF를 진행 중인 샤넬 뷰티가 대표적인 예다. 뷰티 원스톱 프로덕션 컴퍼니 ‘클레이’의 최대균 대표는 이미 몇 년 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서스테이너블 패키지의 3대 요소인 리필(Refill), 리유즈(Reuse), 리사이클(Recycle) 중 그들은 ‘리필’을 미션으로 던졌다. “가격과 소재의 제한이 전혀 없었어요. 상상력을 제한하는 그 어떤 정보도 배제한 채 전 세계 ‘화장품장이들’의 값비싼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있는 거예요.”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착한 기업이라는 정체성 유지를 위해 ‘D-10년’부터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관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버티는 힘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K-진생’을 세계관의 중심에 두고 있는 두 브랜드를 예로 들어볼까? 더 히스토리 오브 후에는 ‘환유고’라는 제품이 있다. ‘돌아올 환 還, 어릴 유 幼’, 이름부터 회춘을 장담하는 크림으로 60ml에 80만원이다. ‘LG생활건강의 모든 연구 성과를 때려 넣었다’는 소문이 떠도는 제품이다. ‘아시아 일부 국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30년 이상 자생하는 산삼’만 주성분으로 하기 때문에 화장품 회사라면 발에 차이고도 남아야 할 2ml 샘플 하나 허투루 돌아다니는 일이 없다. 그들에게 이 제품이 왜 비싸냐고 물으면 진귀한 원료와 베이스에 대한 언급 외에 “이렇게 지속적으로 20년 넘게 산삼을 연구해오는 곳은 유일무이하다”는 말을 꼭 덧붙인다. 설화수는 아예 자신들만의 인삼을 재배한다. 직접 씨를 뿌리고 종을 개량하며 몇 년을 지켜보고 실험한다. 여차하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연구를 거듭하며 파랑새를 낳는 심정으로 안갯속의 오르막길을 인내하며 걸어간다. 편파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오래되고 유명한 브랜드의 화장품을 좋아한다. 버티는 것은 그 무엇보다 특별한 재능이니까. 그리고 그 탤런트에 값을 쳐달라고 하면 기꺼이 낼 의향이 있다.
애초에 하이엔드 가격의 근간에는 ‘소수’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실제로 이 모든 시간과 과정을 이해하고 인정할 머리, 1점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아는 감각, 그리고 가치 소비에 거금을 지불할 수 있는 여유를 동시에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박리다매가 불가한 시장이니 조금 찍어 비싸게 팔 수밖에. 부자재 단가도 가격 상승 요인이다. 내용물의 가치를 한눈에 어필해야 하기 때문에 패키지의 고급스러움이나 내구성도 최고급 사양을 추구하고, 광고도 감도 높은 인력을 투입한다. 이를 판매하는 장소와 컨설턴트의 경력, 애티튜드 또한 플랜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삶은 각양각색, 개개인에게 하이엔드 화장품이 내포한 의미와 기회비용은 감히 측량하기 어렵다. 전에 없는 불황이 예고된 지금, 파는 사람 입장이 지나치게 구구절절하게 느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치열하지 않은 현장 없고, 남의 돈은 쉽게 얻을 수 없는 법. 누구도 그 좁고 높은 계단을 오르라 종용하지 않았고, 독 짓는 늙은이나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소외된 장인도 아닌지라 올라가기만 하면 그에 맞는 보상이 따르니 필요 이상 감정이입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보그>가 이토록 장황하게 ‘값어치’를 읍소한 이유는 단지 그들이 당신을 호구로 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오히려 칼자루는 소비자에게 있다.
하이엔드가 오늘 벌어들인 돈은 미래의 매출을 빌려온 것이다. 이것을 구입하지 않았다면 살 수 있었던 수십 개의 제품 대신 한 선택이기에 충분한 만족감을 주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 아니, 오히려 약간만 발목을 삐끗해도 꽤 큰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브랜드의 근간을 의심받고 평판이 무너지며 다른 제품 매출이 연쇄적으로 감소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진짜 하이엔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감히 잠깐의 눈속임에 운명을 맡기는 도박은 하지 않는다. 그저 만드는 사람과 사는 사람 모두에게 명예이자 사치이며 리스크인 존재가 양쪽 모두에게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길 고대하며 달릴 뿐이다.
- 컨트리뷰팅 에디터
- 백지수
- 포토그래퍼
- 강혜원
- 프롭
- 전예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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