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메르가 서울에 지은 집
겨울 볕이 내리쬐던 서울 한남동에서 르메르의 공동 크레이티브 디렉터 사라 린 트란(Sarah-Linh Tran)과 <보그 코리아>가 만났다. 르메르는 한남동 주택가에 있는 2층 규모의 1970년대 한국 가옥을 첫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를 위한 장소로 선정했다. “르메르의 가치를 구현하고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하는 공간으로 이곳이 제격이었어요. 주택과 부티크의 경계를 허무는 이곳에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르메르 컬렉션을 더했습니다.” 채도가 낮은 남색과 갈색의 르메르 컬렉션을 입고 등장한 사라 린 트란이 차분한 목소리로 현재의 르메르와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보그 코리아>와 6년 만에 다시 만났다.
지난 6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무실을 옮겼고, 마레에 새로운 매장도 열었다. 르메르 팀은 차근차근 성장해왔으며 수년간 함께 일한 팀원들과 끈끈한 결속력이 생겼다. 르메르를 처음 시작할 땐 감히 예상치 못한 결과다. 2014년 브랜드 이름을 ‘크리스토프 르메르’에서 ‘르메르’로 바꾸면서 세계관을 더 넓게 확장했다. 그해를 기점으로 르메르의 언어를 강화할 수 있었고, 르메르만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우리가 처음부터 믿어온 것들, 즉 일상을 위한 아름다운 원단을 창조하는 일이나 풍요로운 옷장을 만드는 일에 대해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한국 고객은 르메르를 충분히 향유할 줄 안다. 우리 옷의 형태와 컬러, 차분함 같은 것을 충만하게 느낀다. 한국에 자주 방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문화에서 우리 옷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평생을 고민해왔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궁금하다.
일. 나에게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가 믿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와 독립성은 일에서부터 온다. 나는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함으로써 나는 성장하고 또 발전한다. 팀원들의 진심과 신뢰를 바탕으로 커가는 것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독립 브랜드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일해야 한다. 끝없는 노력을 거친 지금에 이르러 르메르는 성공했고, 우리는 그 결과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것은 매 순간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과 같다. 구성원들과 의견을 조율하는 일, 새로운 디자인을 완성하는 일, 패션쇼를 준비하는 일 등 모든 과정에 배움이 있다. 일을 통해 겪는 모든 경험을 정말 사랑한다.
일상에서 가장 오래 마음이 머무는 순간은 언제인가.
매일매일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아주 사소한 순간이라도! 파리라는 도시는 대단히 흥미롭다. 지하철이든 버스든,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다. 어떤 시점에서 또 다른 시점으로, 어떤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순간을 즐긴다. 우리는 어디론가 향하는 순간에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해진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본래의 자신이 되는 거다. 파리 어딘가에 잠시 멈춰 사람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행동을 하며, 서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관찰하는 것은 무척 아름답다. 그런 면에서 파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면 수많은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월리를 찾아서’처럼 르메르를 입은 사람을 찾을 때도 있다(웃음).
옷과 가방, 주얼리에 걸쳐 많은 아티스트와 협업을 진행했다. 르메르에 협업이란 어떤 의미인가.
창조의 문을 활짝 여는 일이다.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가운데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영적인 순간을 함께하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공유하는 건 몹시 감동적이다. 협업이란 그야말로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과 함께 만든 아름다운 작품이자 이야기를 고객에게 공유하는 것은 우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협업을 진행할 때, 르메르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가장 염두에 두는 부분은.
규칙은 없다. 사람들이 르메르의 정체성을 정의하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는 데 시간을 쓴 적이 없다. 그래서 변화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협업 아티스트를 선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아티스트를 찾기보다 우연히 마주친 작품을 통해 감동을 받고, 곧장 그 아티스트와 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최대한 그들의 의도를 존중하는 것에서 협업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의 협업을 통해 이뤄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협업 아티스트의 예술성을 르메르의 장인 정신을 통해 현실적으로 구현해낸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르메르의 정체성처럼 보이는 것 같다.
2024 S/S 컬렉션의 주제는 여행이다.
우리가 가진 몇몇 이미지와 아시아 열대의 여름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컬렉션을 출시하기 직전에 베트남에 다녀왔다. 먼저 주목한 것은 그곳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이었다.비와 강한 열기, 태양과 오염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곳 사람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옷을 여러 겹 입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싼 꽃무늬 드레스에 아주 얇고 투박한 디자인의 윈드브레이커를 입거나, 왁스 코팅된 면이나 비닐봉지를 쓰는 일은 거리에서 생존하기 위한 행위다. 그들이 옷을 입는 방식은 우리에게 큰 영감이 됐다. 드로스트링 후드 집업이나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은 도시를 걷고,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움직임을 선사한다. 쉽게 레이어드할 수 있는 옷과 기능의 혼합은 이번 컬렉션에서 매우 중요하다. 컬렉션을 구성하는 색상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색상은 아시아의 여름처럼 짙은 습기를 머금고 있다. 물에 젖은 듯 깊은 색감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르메르 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소재와 컬러, 패턴과 프린트가 있다.
모든 컬렉션은 일반적인 욕구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가벼움에 대한 욕구나 따뜻함에 대한 욕구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욕구는 컬렉션을 구상하는 데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사용하는 소재나 스타일링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직물을 만져보고, 과거에 사용한 원단을 다시 찾아보면서 컬렉션에 쓸 원단을 섬세하게 고른다. 르메르를 정의하는 원단을 찾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팀원들과 함께 의논해 원단을 결정한 후 색상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영감을 준 이미지를 혼합한 컬러 카드를 만들기도 하고, 이미 낡을 대로 낡은 빈티지 원단을 활용하기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 찾은 오래된 원단이나 종이 속에서 컬러를 발견할 때도 있다. 원단에서 컬러가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원단과 컬러를 테스트할 수 있는 작업실을 갖고 있고, 우리만의 기술을 통해 빠르고 정확하게 원단을 개발할 수 있다. 브랜드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이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 무척 기쁘다. 작업실에서 원단 개발을 마치면 그 원단이 몸 위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처음에 언급한 기초적인 욕구를 얼마나 반영하는지 등을 테스트한다.
르메르 옷은 입었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고유의 실루엣을 완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옷에 머무는 것, 즉 편안함에 대해 민감하게 가늠하고 그것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편안함에서 나오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분명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아침에 오래 준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색에 미묘하게 다른 음영을 가진 옷을 입으면 매우 쉽게 스타일링이 가능하다. 비록 실루엣은 단조로울 수 있지만 같은 컬러의 울, 드라이 실크, 포플린 등으로 질감의 변화를 주면 스타일링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르메르에서 레이어드는 특히 중요하다. 얇고 가벼운 옷을 여러 벌 겹겹이 입으면 날씨 변화에 따라 입고 벗기 편하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주 편안한 실루엣이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르메르의 옷은 성별과 시대를 가뿐하게 초월한다.
특별히 의도한 결과는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편안함에 집중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우리는 시즌마다 뭔가를 만들고 개선하는 걸 좋아한다. 새로운 사람과 협업하고 싶은 생각은 늘 있지만, 핵심은 편안함이다. 단순하다.
서울 플래그십은 파리 외의 도시에 처음 생긴 스토어다.
한국 고객은 무척 세련됐을 뿐 아니라 반응이 즉각적이고 강렬하다. 처음엔 왜 한국인이 르메르를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 번 서울을 방문해 한국인이 르메르를 착용하는 방식을 보며 이해하기 시작했다.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울 플래그십은 한국인이 르메르에 친밀감을 느낄 수 있도록 더 많은 통찰력을 제공하고 고객과 더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이상적인 장소다. 특히 한남동에 자리한 서울 플래그십은 번화가와는 약간 동떨어진 곳에 있지만 다른 상점이나 카페와 가깝다. 우리가 주로 생활하는 동네와 비슷한 환경이다. 고객이 부담 갖지 않고 편하게 들를 수 있는 좋은 위치다.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춰서 구상했나.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는 LTH 스튜디오의 건축가이자 공간 디자이너 임태희와 함께했다. 그녀는 르메르를 아주 잘 이해한다.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디자인하고 일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그녀 덕분에 한국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누비로 만든 커튼, 한지로 채운 벽면, 옻칠 가구 등을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엔조 마리(Enzo Mari)의 디자인을 한국산 목재를 사용해 제작한 가구도 있다. 아바카(Abaca) 매트와 베즈마트(Bejmat) 타일은 파리 플래그십과 연결 고리가 된다. 세심하게 선별한 요소를 통해 파리와 서울을 긴밀하게 이었다.
르메르에 한국은 어떤 곳인가.
대단히 신비로운 곳이다. 한국 고객의 욕구는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다. 이 부분이 우리에게 꽤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국은 문화적으로 자연과 아주 깊은 관계를 지녔다.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이나 한국 음식 등에서도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한국 문화의 많은 부분에서 다양한 영감을 받았다.
파리 엘제비르가에 있는 르메르 플래그십 스토어엔 르메르의 런웨이 음악을 담당하는 사운드 디자이너 필루스키(Pilooski)와 르메르가 함께 큐레이션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서울 플래그십의 음악이 궁금하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프렌치 음악으로 구성했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음악인데, 뭔가 우울한 느낌이 있다. 프렌치 음악은 시대를 관통하는 분위기가 존재하며 화보 같다. 서울 고객에게 파리에 온 듯한 느낌을 주고 싶기도 했다(웃음). 파리 플래그십에서는 프렌치 음악을 자주 쓰진 않는다. 패션쇼를 할 때는 서사를 만들기 위해 음악을 사용한다. 대부분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을 하고 노골적이지 않게 한다. 예를 들어 봄에는 봄에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사용한다. 2024 S/S 컬렉션에서는 베트남에서 녹음한 몇몇 소리를 쓰기도 했다. 음악은 다른 세계나 다른 나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는 힘이 있다. 음악은 국경을 아름답게 무너뜨린다. 음악을 들을 때 그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해보길 바란다. 음악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서울 플래그십이 어떤 공간이 되길 원하나.
르메르의 집. 아주 친밀한 방식으로 우리의 옷을 경험할 수 있는 따뜻한 장소가 되길 바란다. 정원에선 누구나 자유롭게 앉아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마셨으면 좋겠다. 서울 플래그십은 이벤트를 열고 사람들을 초대하면서 점차 진화할 도화지 같은 공간이다. (VK)
- 사진
- 김재훈, 맹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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