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멜로드라마는 어디로 갔나
호랑이는 담배를 피우고 인간은 터치스크린 대신 물리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보내던 시절, 그러니까 2000년대 초까지는 이런 농담이 있었다. “한국 의학 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는 얘기, 한국 법정 드라마는 법정에서 연애하는 얘기, 한국 직장 드라마는 직장에서 연애하는 얘기다.” 인도 영화에는 춤과 노래가 있고, 한국 드라마에는 로맨스가 있다, 그게 규칙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한국 드라마에서 로맨스가 사라졌다. 장르물이 양적으로 많아진 데다 거기에 로맨스가 썩 잘 어울리는 고명이 아니란 사실을 제작자들도 눈치챈 거다. 과거 드라마 공급을 독점하던 올드 미디어는 새로운 시청자를 발굴할 의지가 없었다. 드라마는 여자들이 보는 것이고 여자들은 로맨스를 좋아한다는 단순한 상식이 업계를 지배했다. 하지만 채널이 다양해지고 여러 실험이 행해지고 경험이 누적되면서 낡은 상식은 파괴되었다.
2020년대 들어 한국이 세계 최대 스트리밍 콘텐츠 생산지 중 하나로 올라서면서 해외의 시네필이 한국 영화에 갖고 있던 이미지, 예컨대 할리우드식 이야기 문법, 과격하고 잔인한 연출, 장렬한 파국과 자기 파괴적 감성 등이 드라마로 옮겨갔다. A급 배우들의 연령대가 상승하고, 여배우에게도 장르 선택지가 다양해진 것 역시 멜로 기획의 한계가 될 것이다. 그 결과 2022년과 2023년 지상파, 케이블 시청률 상위 10위권 드라마 중 정통 멜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내맞선> <스물다섯 스물하나> <일타 스캔들> <닥터 차정숙> 등이 로맨스를 포함하고 있지만 멜로보다 코미디, 청춘 성장담, 스릴러 등 장르를 복합한 게 주효했다.
정통 멜로라 부를 만한 흥행작은 <옷소매 붉은 끝동> <연인> 등 사극에서 주로 나왔다. 현대물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더 이상 믿음이 가지 않는다. 최근 멜로드라마 중 가장 웰메이드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이해>도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치겠다!’는 식의 격렬한 사랑보다 끝없이 이해를 따지는 현대인의 연애 방식을 해부한 것이었다. 또한 <사랑의 이해>는 높은 비평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3%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시청률이 흥행을 증명하던 시대는 지났다. <나의 해방일지>는 최고 시청률이 6.7%에 그쳤지만 지난해 신드롬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많이 회자된 작품 중 하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물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왜 요즘은 멜로드라마가 없는가.’ 이건 모든 장르에 로맨스가 개입하던 시대와 비교한 착시일 수도 있고, 흥행 상위작에 멜로가 드물어서 느끼는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청자가 ‘인생작’이라 부르고 새로운 클래식으로 등극할 만한, 시대의 감성을 대변하는 멜로의 탄생을 지켜본 지 오래됐다는 기분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건 ‘왜 요즘은 멜로가 없는가’가 아니라 ‘왜 요즘은 대히트하는 멜로드라마가 없는가’다.
올 초 인구보건복지협회 발표에 따르면 한국 청년 65.5%는 연애를 하지 않는다. 비연애 청년 중 70%는 자유의지로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회문제로 고착된 저출생, 성별 갈등까지 고려하면 이 나라 전체의 ‘사랑 에너지'(<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빌려온 표현이다)가 너무 고갈된 게 요인인가 의심된다. 그때 <환승연애> <나는 솔로>가 번쩍 손을 든다. ‘아닌데요, 사람들 연애에 관심 많던데요?’ 그럼 문제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는 걸까?
정우성, 신현빈의 정통 멜로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 접근하는 심정은 <환승연애>나 <나는 솔로>에 접근하는 마음가짐과는 다르다. 청각장애인 화가와 배우 지망생이 표현의 장벽, 세상의 반대를 넘어 사랑에 빠진다니 분명 아름답고 설레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감정, 그것도 픽션에 기반한 감정의 폭풍과 여운을 받아들이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같은 픽션이라도 사건이 중요한 장르에는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있다. 하지만 멜로는 적극적인 감정의 동요를 유발하는 게 목적인 장르다. 똑같이 감정의 폭풍을 불러일으킨대도 연애 리얼리티 쇼는 일반인의 경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제시하고, 어떤 부조리한 상황이 펼쳐진대도 ‘리얼’이라는 전제가 있으므로 ‘말이 돼?’라고 따질 필요가 없다. 현대 서울을 배경으로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면 ‘요새 저런 남자가 있어?’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사랑 때문에 물불 못 가리는 여자가 나오면 ‘저 멍청이, 고구마, 답답캐’라고 욕을 먹을 것이다. 리얼리티 쇼는 그런 유의 냉소를 피해갈 수 있다. 또한 치밀하게 설계된 우아한 세계에서 아름답게 존재하는 배우들보다 때로 흉할지언정 현실에서 좌충우돌하는 인물들이 훨씬 감정이입하기 쉽다. 역대 한국 영화 박스 오피스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오른 멜로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126위, 누적 관객 수 480만 명)인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 드라마 공식보다는 인간 심리의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리얼리티 쪽의 전개가 훨씬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도 예능은 되고 드라마는 안 되는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환승연애>는 어지간한 멜로드라마 못지않게 출연자 비주얼도 훌륭하다. 결과적으로 감정적 피로가 포화 상태에 이른 현대인에게 멜로드라마는 멀고 리얼리티 쇼는 가깝다. 그럼에도 후자의 성공은 우리가 여전히 좋은 사랑 얘기에 목마르다는 증거로 읽힐 수 있다.
지난해 <나의 해방일지>가 불러일으킨 손석구 신드롬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배용준이 일본 가서 욘사마가 되고 ‘한류’라는 말이 탄생한 2000년대 초, 초식남에 질린 일본 중년 여성이 전통적 남성성에 대한 향수를 한국 드라마로 달랜다는 진단이 많았다. 이제 한국 로맨스에서도 사랑에 목숨 거는 남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칫하면 현대적 성 관념과 어긋나서 욕이나 먹기 십상이다. 이런저런 함정을 피하려니 남녀가 알콩달콩하는 로맨스나 서로 재고 따지다 기회를 놓치는 소소한 심리극 정도가 남는다. <나의 해방일지>의 손석구 캐릭터는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깡패고, 그 여성들에게 험한 짓도 한다. 하지만 배우 개인의 매력과 카리스마가 캐릭터의 문제를 초월해버린 경우다. 우리에게 이런 마초적인 캐릭터가 더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진한 감정을 가진 멜로적 캐릭터의 수요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수요와 시대 사이를 중재할 새로운 남성상 혹은 여성상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환승연애 2>의 한 장면. 촬영분을 모니터링하던 연예인 패널이 가슴을 움켜쥐며 말한 적 있다. “으악, 내 멜로 세포 죽지 않았구나!” 그렇다. 멜로 세포라는 건 쉽게 죽는 놈들이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본능이고 현실이 건조할수록 대리 만족 욕구는 강해지는 법이다. 마음을 울리는 멜로드라마를 찾기 어렵다면, 그건 멜로의 필요가 다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잠시 공백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심장 한쪽이 떠내려갈 것처럼 거센 눈물의 폭풍, 한동안 아프도록 그리워할 캐릭터,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게 만드는 멋진 이야기를 대중은 언제나 기다린다. 지금이야말로 그런 멜로드라마가 필요한 시대다.
- 포토
-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 MBC '옷소매 붉은 끝동', JTBC '사랑의 이해' '나의 해방일지', TVING '환승연애 2'
- 섬네일 디자인
- 한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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