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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나고 선한 것을 순순히 하나하나 씹어나간다

2024.01.13

윤나고 선한 것을 순순히 하나하나 씹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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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어느 때 어느 곳. 두 사람과 한자리에서 만났다. 우리 셋은 영화 덕분에 만난 사이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고 대수인가 싶다. 가까이 오래 보는 사람인 친구, 그것이면 충분하다. 때때로 안부를 물어, 살고 있냐고, 먹고 있냐고, 걷고 있냐고 했다. 때때로 좋은 것을 나누며, 이제부터는 영양제 뭐, 뭐, 뭐는 꼭꼭 먹어야 한다고, 가지와 양배추를 이렇게 저렇게 볶아 먹어보라 한다. 때때로 먹을 것을 사서 쥐여주고, 손수 키운 먹거리를 알뜰살뜰 챙겨와서 쥐여주기도 한다. 때가 되면 캠핑 가자 하고, 때를 맞춰 눈을 보자 하고, 때를 챙겨 서로 칭찬 아끼지 말자 한다. 시간이 다 뭐냐며 오래도록 한자리에 앉아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빚어진 윤나고 선한 것을 순순히 하나하나 씹어나간다. 음미란 이런 것이구나 새삼스레 좋다. 괜스레 마음이 넉넉해지고 빛이 나는 것만 같다. 이러쿵저러쿵 지난 세월 얘기보다는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을 하나, 둘, 셋 새긴다. 귀여운 이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다행이다 싶다.

친구들과 느지막이 헤어지고 돌아오는 밤, ‘참 잘했다’ 싶었다. 적절한 때 신년 인사를 나눈 것도 그러하거니와 두 사람과 만나기 전 잠시 들른 서점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책이 <읽을, 거리>(2024, 난다)라는 점도 그러했다. 쓰든 달든, 억세든 순하든, 그것이 말이면 말인 채로, 그것이 차마 말이 되지 못한 것이면 그런 채로 언제든 어떻게든 제 식으로 잘근잘근 꼭꼭 씹어 찰지게도 참맛을 내는 사람, 시인이자 편집자 김민정의 책이라서. 출판사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로 12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12권의 책 가운데 첫 책이다. 책의 부제가 ‘김민정의 1월’이다. 그녀가 보냈을 수많은 1월 가운데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곳의 기록이자 흔적이다. 1월 1일부터 1월 31일까지 31가지 글이 선형의 연대기를 비켜나 실려 있다. 일기, 에세이, 인터뷰였다가, 다시 시로, 축시로, 동시로 이어지기도 하며, 편지와 노트를 오간다. 그 모든 게 한 가지 틀로 모이지 않는데도 희한하게 단정하다.

김민정, ‘읽을, 거리'(2024, 난다)

시를 쓰고 글을 꿰는 사람답게 그녀의 글에는 시와 글, 책으로 만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말과 글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해두는 건 영 부족하다. 하나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녀의 글은 더 진하고 더 깊으므로. 그녀의 글에는 언제나 그녀가 팔짝 뛰게 좋아 죽는 사람들, 반갑다 못해 꿈에서까지도 사무치는 얼굴들, ‘못 잊어 개새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며 쓴 시들, 그런 사람의 글들, 그런 성정과 기질의 언어들이 넘실대고 출렁이고 일렁이며 아른댄다. 그것은 너무도 구체적이고 실체적이며 개별적인 누군가의 체취, 냄새, 얼룩, 자국과도 같은 것이다. 지척에서 사랑을 속삭일 때나 들을 수 있는 당신의 얕은 숨결, 살을 맞대고 품으로 파고들 때나 할 수 있는 킁킁거림, 곁에서 오래 봐야만 알 수 있는 너의 습속 같은 것이 시가 되고 살이 되는 것만 같다. 그리하여 김민정의 시, 글과 만날 때면 나는 언제나 그녀의 이 찰지고 다정한 미감으로 누군가와 접속하고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1월 11일의 김민정의 에세이로 마주한 시인 허수경, 1월 16일 김민정의 에세이로 접속한 시인 최승자, 1월 27일 김민정의 편지 속 수신인 문학평론가 황현산, 1월 28일 노트에 남아 있는 시인의 아버지…. 김민정의 글에 생생히 살아 있는 저 현현하는 얼굴들, 귀한 친구들을 통해 나는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 되고,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된다’(224쪽)는 문장을 되새김질한다. 김민정의 시 맛, 글맛, 참맛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읽어야 이해되는 책
사랑은 거리로 유지되는 책

사람이 어려우니 썼을 거고
사랑이 아프니까 썼을 거고
책은 밥벌이니 저 끝자리가
필연적인 귀결이었을 테고,

필시 <읽을, 거리>라는 제목이
내 즉흥만이 다가 아니었구나
안도하며 머리에 가져다 쓴다.’
(‘작가의 말’ 중, 10쪽)

이 책의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작가의 말’의 저 문장들을 눈으로 따르다 보니 새삼 여기 모인 ‘김민정의 1월’이 사람과 사랑 사이의 쉼표 같은 것이겠구나 한다. 그것은 살아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최승자 시인의 영세식 미사에서 주임 신부님이 한 말씀, “사랑하는 것이 꼭 해내야만 하는 숙제입니다”를 “살아가는 것이 꼭 해내야만 하는 숙제입니다”로 들었다는 김민정 시인의 말에서 또다시 발견한다. 이어지는 문장은 이러하다. ‘살아가는 것과 사랑하는 것.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 이 화두가 평생 내 숙제임을 안고 파주로 돌아왔다.’(173쪽)

그리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024년 1월 어느 때 어느 곳, 두 사람과 한자리에서 만났던 그날. 사람, 사랑, 사이에서 살아가기. 그것만 생각할 수 있는 밤이라면, 그럴 수만 있다면. 옅은 바람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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