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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좋은 16명의 남자가 쓰는 ‘그 향수’

2024.02.06

취향 좋은 16명의 남자가 쓰는 ‘그 향수’

외적 표징이자 가장 사적인 면이 깃든 향수. 16명의 남자가 <보그>에 자신의 소장품을 공개했다.

19-69 ‘Kasbah’ 6년 전쯤 눈 내리던 겨울의 뉴욕, 촬영 장소를 헌팅하던 중 들른 ‘The Line NY’라는 이름의 편집숍에서 구매했다. 따스한 석양빛이 떠오른다. 상온에 둔, 푹 익은 오렌지색이 떠오르지만 시트러스 특유의 상큼함이나 달콤함은 적다. 안온한 기운을 주는 향으로 날씨가 추울 때면 문득 떠올라 공중에 분사하곤 한다. 목정욱(사진가)

CELINE ‘Reptile’ 마음에 드는 물건은 잘 바꾸지 않아 오랫동안 같은 향수를 썼다. 가끔 새로운 향수에 도전했지만, 어느 것도 맘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여름, 도전에 대한 맘도 식을 때쯤 이 향수에 관심이 생겼다. 향에 대한 복잡한 노트보다는 록 스타 같은 날카로운 첫 느낌 뒤에 느껴지는 어른스러운 포근함과 따뜻함이 좋았다. 단정하고 예의를 아는 어른인데, 자유로울 줄도 아는 어른 같았다. 새해 첫 출근, 설레는 마음을 다지며 다시 또 맘껏 뿌렸더니 이제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재필 (<패스트페이퍼>디렉터)

ESCENTRIC MOLECULES ‘Escentric 01’ 한동안 향수 모험가에 가까웠다. 눈에 띄는 새로운 브랜드는 일단 하나씩 사보곤 했다. 이미 ‘페로몬 향수’라는 애칭으로 불린다는 이 향수는 2010년대 초 런던 하비 니콜스에서 구입했다. 그야말로 ‘그림자’와 같은 향. 합성향료 분자인 ‘Iso E Super’를 사용하는 향수는 많지만, 이 인공적인 형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건 이 향수뿐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향수 ‘노트’와는 느낌도 쓰임새도 다르다. 처음 뿌리면 아주 미세한 향이 느껴지지만, 내 피부에 맞닿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매혹적인 향이 솟아난다. 특히 뿌리는 사람은 그 향을 알아채지 못하다가 하루가 끝나는 순간 옷을 벗으며 몸에서 나는 우디한 향에 깜짝 놀라곤 한다. 손기호(<보그> 패션 에디터)

YOHJI YAMAMOTO ‘I’m Not Going to Disturb You Homme’ 요지 야마모토는 어린 시절부터 가장 좋아한 디자이너. 하지만 그의 옷을 내키는 대로 사들일 수는 없어 향수를 구매하는 행위로 타협점을 찾았다. 2년 전 구입한 이 향수는 몇 달 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죽과 타바코가 섞인 묵직한 향은 이름처럼 그 누구도 쉽게 나를 가로막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요즘은 퇴근 후 밤늦게 샤워를 하고 팔목에 한 번, 침대 위에 한 번 이 향수를 뿌리고 있다. 방해 요소 없이, 잠이 더 잘 오는 듯한 기분이다. 안건호 (<보그> 디지털 에디터)

TOM FORD BEAUTY ‘Oud Wood’ 유명한 향수지만, 처음 경험한 것은 2018년 1월 미국 LA 출장길. 동행한 사진가 장덕화에게서 풍기는 향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해 어떤 제품인지 묻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는 내게 ‘진짜 남자가 뿌리는 향’이라며 ‘오드 우드’를 소개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얘기지만 20대 시절에는 향으로 ‘진짜 남자’가 되겠단 일념으로 면세점에서 바로 구매했다. 다른 향수를 수없이 경험했지만 꾸준히 몇 년간 사용해온 제품으로는 유일하다. 처음은 자극적이지만 점차 농밀하고, 부드럽고, 젠틀해지는 향기, 그를 닮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닐까? 박진표(<아이즈 매거진> 대표)

LOEWE ‘Esencia’ 해외 출장 중 베를린 ‘Voo Store’에서 구입한 향수. 살짝 흐리고 쌀쌀한 날씨, 절제된 세련미, 바질의 시원한 향과 묵직한 잔향까지 도시와 어우러지는 향에 곧바로 매료됐다. 향수병 바닥이 드러날 때마다 해외에 나가야 했는데 이젠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지속력은 그야말로 으뜸. 오전에 뿌려도 하루 종일 우드의 산뜻한 향이 은은하게 배어 나온다. Mon Kim(아우프글렛 대표)

MATIERE PREMIERE ‘Crystal Saffron’ 지난겨울 베를린 여행 중 그 도시의 매력과 부합하는 향을 발견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사프란’이 메인이 되는 향기로 뒤에 따라오는 잔향은 굉장히 센슈얼한 느낌이다. 평소 플로럴 계열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 향수는 처음 시향하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다. 여행의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향수를 모으기 시작한 게 벌써 한쪽 벽면을 꽉 채운다. 우연히 스쳐가는 이 향을 맡으면 행복했던 여행지의 추억과 당시 기분이 다시 느껴진다. 이세한(모델)

ASTIER DE VILLATTE ‘Artaban’ 지난가을 한남동에 오픈한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구매한 후 중요한 날에 꼭 뿌리는 향수가 됐다. 중성적이고, 스파이시하며, 달콤 쌉싸름하면서 이국적이다. 모임에 나갈 때마다 지인들의 반응은 역시 반으로 나뉜다. 남들 리액션과는 상관없이 내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호’의 향. 박경진(모델)

COMME DES GARÇONS ‘Monocle Scent Three Sugi’ 꼼데가르송 매장에서 ‘진(Gin)’의 향이라고 추천받은 이 향수는 처음에는 썩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이후로 계속 그 미묘한 알코올 향의 매력이 생각나 구매하게 됐다. 일본 삼나무 ‘수기’에서 영감을 받은 향으로 신선하고, 후추처럼 톡 쏘는 느낌. 그날 매장에 있는 향수는 물론 다른 숍에 있는 제품까지 싹쓸이할 욕심이 들 만큼 독점하고 싶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한 바텐더의 추천으로 진 베이스의 칵테일을 맛보게 됐는데, 그 향이 정말 좋았다. 취한 상태로 그날 이 향수를 바텐더에게 선물한 추억을 잊지 못한다. 전민규(세트 스타일리스트)

COMME DES GARÇONS ‘Mirror by Kaws’ 2022년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100달러에 구입한 향수. ‘Kaws’와 인연을 맺은 오랜 친구로서 늘 응원하는 사이기에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피규어 디자인만큼 향은 산뜻하면서도 포근한 향취로 친근한 매력을 지닌다. 타고난 알레르기가 있어 피부에 직접 향수를 뿌리진 못하지만, 지인들을 집에 초대할 때마다 공간에 가득 뿌리곤 한다. ‘웰컴’ 그 자체의 메시지를 갖고 있으니까. 최진우(<더블유> 맨 콘텐츠 디렉터)

HEADSPACE ‘Tubereuse’ 지난여름 파리 출장길에 들른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시향하는 순간 반했다. 이름처럼 새하얀 투베로즈 꽃다발을 가득 안고 있는 기분. 사랑에 빠지고, 취하고, 유혹당하는 감정을 무더위에도 느꼈으니 말 다 한 거다. 풍성하고 더없이 관능적이다. 단, 이 향을 가득 입고 택시를 타면 기사님들이 창문을 바로 내린다는 사실. 정백석(렉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MOMENSCENT ‘Neem Tree’ 우연한 기회로 접한 국내 브랜드의 향수. 편안하고, 숲속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나무 향이 돋보인다. 연예인 스타일링을 담당하다 보니 배우와 함께 캐릭터를 연구하고, 의상을 매치하곤 하는데 향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인위적이지 않은 옅은 플로럴, 우드 특유의 선선한 분위기를 지닌 향수를 그때그때 상대에게 매치하는 직업을 매력적이라 여긴다. 박선용(스타일리스트)

IIUVO ‘Soigné’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밤에 외출할 때 즐기는 향. 그만큼 향을 맡는 순간 한껏 ‘멋’이 느껴진다. 도쿄의 한 백화점에서 오래전 구입한 이 향수는 계피, 부드러운 캐시미어 우드와 파촐리, 머스크가 어우러진 향으로 거칠지만 우아하다. 자신감과 재능이 넘치는 누군가에게 꼭 맞는 옷처럼 느껴진다. 유고(모델)

BYREDO ‘Mumbai Noise’ 지난 5월 생일 선물로 받은 향수. 첫인상은 굉장히 복잡한 느낌이었다. 스모키하고, 마지막은 달짝지근한 향이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이름 때문인지 본능적으로 인도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떠오른다. 기존에 선호하던 향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은 선물인 데다, 뿌리고 만날 때마다 그가 기뻐하기에 이제 가장 좋아하는 향수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국내 단종 소식을 듣게 되어 요즘은 아껴가며 사용하는 중이다. JEY 정진형(뮤지션)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Rose Tonnerre’ 내 이미지가 너무 남성적이라고 여겨 향은 페미닌한 무드의 향수를 선호한다. 무수한 장미 향이 있지만 이 제품은 야생 장미 향을 있는 그대로 가장 자연스럽게, 또 강렬하게 구현했다. 중국의 판권 이슈로 ‘윈 로즈’에서 ‘로즈 토네르’로 이름이 바뀌어 파리 매장에서 한참을 헤맨 적이 있다. 같은 브랜드의 베르가모트, 앰버 향의 ‘뮤스크 라바줴’ 보디 크림을 바른 뒤 이 향수를 레이어드한다. 김영진(스타일리스트)

MAISON LOUIS MARIE ‘No. 04 Bois de Balincourt’ 우연히 방문한 작은 부티크에서 즉흥적으로 구입하게 된 향수지만 그 후로 롤온 타입을 여행 파우치에 꼭 휴대한다. 비밀스럽고, 신비롭고, 이국적이면서도 너무 인위적이거나 강렬하지 않은 숲의 향. 이 향기를 맡을 때마다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모험을 하는 기분이 들며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된다. 피터 애시 리(사진가) (VK)

일러스트레이터
ORIGINAL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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