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우주를 정복하고 싶은 예술가, 인베이더

2024.02.12

우주를 정복하고 싶은 예술가, 인베이더

모두가 잠든 밤, 인베이더의 야심이 꿈틀거린다. 우주 정복을 목표로 전 세계 곳곳에 기묘한 모자이크를 새겨 넣는 이 비밀스러운 거리 예술가의 뒤를 좇아 파리의 밤을 거닐었다.

이 사람이 진짜 인베이더일까? 한때 루브르박물관에 작품 10점을 몰래 숨겨둔 뒤, 이로써 자신이 루브르박물관의 전시 작가 중 유일하게 현존한다고 외친 인베이더. 그는 이후 두 번이나 자신의 작품을 우주로 쏘아 보냈다.

땅은 유난히 질퍽질퍽했다. 시체가 썩어가는 축축한 땅 위를 걷는 듯했다. 그 위에서 지저분하게 나뒹구는 감자칩 봉지와 음료 캔이 적막을 깨뜨렸다. 이 수상한 여정의 리더인 인베이더(Invader)와 그의 공범 미스터 블루(Mr. Blue)가 사수하려 애쓰던 고요였다. 때는 무더운 지난여름 어느 날, 새벽 1시 3분. 나는 그들과 함께 파리 동쪽 외곽에 펼쳐진 A4 고속도로 옆의 작은 부지를 향해 무성한 풀숲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차가 지나가면 벽에 바짝 붙어 몸을 숨기세요.”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풍성하게 자란 양치식물을 헤치며 전진하던 인베이더가 뒤로 돌아 주의를 줬다. “배기가스에 포함된 이산화탄소 때문에 식물이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는 거예요.” 우리의 목적지는 파리의 A4 고속도로 위에 드리운 작은 고가도로를 떠받치는 높이 12m의 콘크리트 기둥이었다. 차량은 시속 130km의 속도로 우리 주변을 무섭게 내달렸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평정심을 발휘하던 인베이더가 작업 도구가 담긴 슈퍼마켓 비닐봉지를 찾기 위해 덤불 속으로 몸을 바짝 숙였다. 밴을 타고 그곳을 지나칠 때 미스터 블루가 미리 창밖으로 던져놓은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미스터 블루는 연장 사다리와 씨름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사다리를 펼친 미스터 블루는 기둥에 설치했다. 무릎을 꿇고 완전히 주저앉은 인베이더는 15×15cm 크기의 정사각 타일로 만든 패널을 땅에 늘어놓았다. 패널에는 A1, A2, A3, A4, B1, B2, B3, B4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꼭 은행 터는 거 같죠.” 불과 몇 분 전, 인베이더가 한 말이다.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사전에 완벽하게 계획을 세워놓아야 해요.”

인베이더는 27년 동안 파리를 포함한 전 세계 도시의 벽, 다리, 기념비, 터널, 보행로, 계단, 난간, 문, 연석, 벤치, 차량 진입 방지 구조물, 말뚝, 전신주, 파이프, 기둥, 분수대, 수영장, 선창, 방파제, 지붕, 굴뚝, 중앙선, 버스 정류장, 기차역, 가게 앞, 서점, 술집 등에 재기 발랄한 모자이크를 새겨 넣어왔다. 날개 달린 곤충부터 만화 캐릭터, 슬롯머신에 등장하는 과일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양한 이미지를 작업으로 남겼다. 인베이더는 자신의 작품을 ‘침략(Invasions)’이라 불렀고, 그의 모자이크 타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침략자들(Invaders)’로 알려져 있다. 인베이더는 지금껏 총 32개국 172개 도시에 4,000여 점의 작품을 남김으로써 전통적으로 수명이 짧다고 여겨지던 스트리트 아트 신에 영속적인 흔적을 새기고 있었다.

인베이더는 그래피티 예술가들이 흔히 쓰는 방식을 아주 오래전 메소포타미아인이 즐겨 사용하던 재료와 결합했다. 그는 프랑스 타일 회사 에모 드 브리아르(Émaux de Briare)가 제작한 25가지 색상 타일을 특히 자주 사용한다. “아주 예쁜 분홍색 타일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죠.” 자신의 작업을 탐내는 이들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애써 설치한 타일을 뜯어가려는 도둑의 손길로부터 타일을 지켜내기 위해 더 강력한 접착제를 쓰는 일이 불가피해졌다. 보호 조치의 일환으로 가마에 구운 타일을 찬물에 담금질하는 과정도 필수로 거친다. “급격한 온도 차를 주면 누가 그것을 떼내려 했을 때 쿠키처럼 부스러지거든요.”

작업 초기엔 완성한 작품을 가져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붙이는 식으로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막상 설치하고 나니 타일 색깔이 벽 색깔에 묻힌다거나 작품에 새긴 외계인의 눈이 강조하려던 지점이 아닌 엉뚱한 곳을 응시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바람에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주아주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그래서 이젠 장소를 먼저 고른 다음 그에 맞춰 작품을 만든다. (예를 들어 뉴욕의 한 보행로에 작업한 슈퍼마리오 모자이크는 거리에 있는 두 개의 파이프를 건너뛰는 것처럼 보이도록 유도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업한 결과물을 아우르는 상세한 기록을 추후 지도나 책으로 출판한다. 인베이더는 자신의 작업을 ‘도심 속 침술(Urban Acupuncture)’이라 표현한다. “발길이 닿는 도시마다 항상 그곳 혈 자리부터 찾으니까요.” 영화를 보다가도 눈길을 사로잡는 벽이 등장하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리스트를 업데이트하곤 한다.

인베이더는 자신의 작업을 ‘도심 속 침술’이라 설명한다. “발길이 닿는 도시마다 항상 그곳의 혈 자리를 찾으니까요.” 그는 전 세계 172개 도시에 4,000여 점의 모자이크를 남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인들은 알게 모르게 인베이더의 전시장을 거닐고 있다. 유저들이 인베이더의 모자이크 작업인 ‘침략자들’을 찾아 사진으로 찍거나 ‘적발해내는’ 모바일 게임 플래시인베이더(FlashInvader)에는 약 35만 명이 참여하는 중이다. 일부 ‘침략자들’은 1978년 니시카도 도모히로(Tomohiro Nishikado)가 창시한 비디오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에 등장하는 네 가지 캐릭터(게, 오징어, 문어, UFO)를 답습한 모습이고, 그 외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농담을 담고 있어 추가 해석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뒤록(Duroc) 거리에 가면 오리걸음을 하는 척 베리(Chuck Berry)를 만나고, 베르사유에서는 왕관을 쓴 게처럼 생긴 외계인을 만나는 식이다. 물론 에펠탑의 전혀 예상치 못한 모퉁이에서도 인베이더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

파리 시장 안 이달고(Anne Hidalgo)의 사무실에도 인베이더의 작품이 걸려 있긴 하지만 사실 인베이더의 모자이크는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존재 자체가 불법이다. 감옥에서 징역을 살거나 최대 3만 유로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공공 기물 파손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가 가명으로 활동하고, 드물게 사진에 찍히는 경우에는 살바도르 달리 마스크나 스키 고글을 쓴 채 등장하는 이유다. 물론 다소 존재론적 이유도 있다. 아티스트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는 증언한다. “그는 정말 인베이더처럼 살아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니까요. 완전히 그 세계관에 몰입했죠.” 끊임없이 불 지를 곳을 찾는 방화범처럼, 인베이더는 작품을 설치한 다음 날 그곳을 다시 찾아 사진을 찍곤 한다.

30년 넘게 이 ‘Projet Sans Fin(끝없는 계획)’ 시리즈를 이어온 인베이더는 점점 편집광적인 모습을 보였다. 철저한 준비를 중시하는 그의 비밀 요원 같은 면모에서는 권위와 규칙에 저항하는 펑크 마니아다운 성정도 엿보인다. “인베이더는 늘 아주 치밀하게 준비해요. 하지만 계획이 틀어지더라도 한번 점찍은 장소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죠.” 페어리의 말이다. 인베이더는 과거 일간지 <리베라시옹> 인터뷰에서 ‘그 행위의 강박적인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다고 밝혔다. 당시 <리베라시옹>은 2011년 헤드라인 기사의 모든 ‘A’ 자를 픽셀화된 외계인 이미지로 바꿔 발행함으로써 그의 침략을 돕기도 했다.

검은색 야구 모자에 헤드램프를 쓰고 도로변 덤불 한가운데 선 인베이더가 파이핑 백처럼 생긴 비닐 자루에서 시멘트를 짜 패널 뒷면에 바른다. 그걸 이어받은 미스터 블루는 그 위에 접착제를 얇게 펴 바른다. 인베이더가 사다리에 오르기 시작하자 무게 때문에 사다리가 휘청거렸다. 초기에 그는 사람들 눈높이에 작품을 설치했지만 가능한 한 높은 곳에 설치해야 작품이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높은 곳을 즐겨 찾는다. 사다리의 열한 번째 층계에 자리 잡고 앉은 그가 주머니에서 수평계를 꺼내 기둥에 갖다 댔다. 그런 다음 패널 하나를 꺼내 주먹으로 탕탕 두드려 기둥에 단단히 붙였다. 인베이더의 오랜 친구이자 낮에는 프로그래머로 활약하는 미스터 블루가 그에게 패널 몇 개를 더 건네주었다. 언뜻 집게발 모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인베이더가 사다리 아래로 서둘러 내려왔다. 타일이 약간 비뚤어진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순서대로 잘 맞춰 붙여왔음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놓는 듯했다. 아무리 패널에 번호가 매겨졌다 한들 상공 9m 높이의 사다리 위에서 손바닥 크기의 조각을 순서대로 정갈하게 붙인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서둘러 마무리해야 하는 작업이니 난도는 훌쩍 높아진다. 인베이더와 미스터 블루는 일종의 속임수를 위해 형광색 안전 조끼를 입고 있었고,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온몸은 어느새 접착제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인베이더의 팬들은 그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접착제로 손이 끈적거리는 사람을 찾곤 한다.) 둘은 곧이어 B 패널을 사다리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인베이더는 작업을 마저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사다리에 올랐다. 바로 그때 주위에 내려앉은 어둠이 삽시간에 걷혔다. 우리들의 머리 위 육교에서 뿜어져 나온 불빛 세 개. 인베이더의 얼굴을 향해 쏟아진 경찰들의 손전등이었다.

여름이 막 기지개를 켜던 어느 날, 나는 몇 주간의 설득 끝에 어렵게 인베이더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만나기 하루 전, 그의 파트너이자 매니저 줄리(Julie)로부터 문자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로렌. 내일 바스티유 근처 카페에서 만난 다음, 제가 당신 눈을 가리고 인베이더의 스튜디오로 데려가는 식으로 만남을 주선하려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문자는 계속 이어졌다. “만약 폐소공포증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다음 날 오후, 줄리는 네이비색 원피스에 호피 무늬 안경을 쓴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가리개로 사용할 수면 안대를 건네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불안하시면 제 팔을 잡으셔도 돼요.” 주섬주섬 안대를 집어 든 내게 줄리가 말했다. 그렇게 나는 줄리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눈앞은 깜깜했지만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깜짝 처녀 파티 이벤트처럼 생각했겠지. 앞을 못 본 채로 걷다 보니 금세 어지러워진 나는 이따끔씩 눈을 떠 발치를 응시했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추측하는 일이 아주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인베이더의 익명성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기에 그들 의도대로 따라주기로 했다. 모든 인력을 동원해 그의 정체를 찾아내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5분쯤 지났을까, 줄리와 함께 나는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안대를 벗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자 눈앞에 환한 아틀리에가 펼쳐졌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배경으로 조수 두 명이 조용히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스페이스?” 줄리가 인베이더를 부르는 소리였다. (가끔씩 줄리가 실수로 그의 진짜 이름을 언급했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얼마 후 인베이더가 계단을 가뿐하게 달려 내려왔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등장한 점이 너무나도 의외였다. 그는 물 빠진 검은색 야구 모자에 록 밴드 티셔츠 차림이었다. 사실 줄리와 인베이더 사이에는 자녀가 한 명 있는데(아이는 자기 아빠가 인베이더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인베이더는 매일 아침 학교 근처에서 아이를 통학시키는 흔한 학부모의 모습이었다.

인베이더는 로스앤젤레스 오버 더 인플루언스(Over the Influence) 갤러리에서 지난 11월 열린 개인전을 위해 작업 중이던 모자이크 작품을 보여주었다. 여러 개의 타일이 카무플라주 패턴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가 꾸준히 만들어온 외계인들이 길거리에서뿐 아니라 갤러리와 프레임 안에서도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루빅큐브를 사용해 작업 중인 풍경화 시리즈도 있었는데 3차원적 점묘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작업 방식을 인베이더는 ‘루빅큐비즘’이라 일컬었다. 그는 옛 거장의 명작과 앤디 워홀의 아이코닉한 작품을 루빅큐비즘 버전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축구 선수 킬리안 음바페 역시 그에게 루빅큐브로 제작한 축구 영웅 펠레의 초상화를 의뢰한 적 있다. 작업 초기에 인베이더는 중고 장난감 가게를 이 잡듯이 뒤지며 루빅큐브를 모았지만 이제는 루빅큐브 본사로부터 직접 재료를 받는다. 스튜디오 한쪽에는 열쇠고리 크기의 루빅큐브가 다 합쳐서 3m는 족히 될 정도로 높이 쌓여 있었다. “2만 개 정도는 될걸요.” 인베이더가 웃으며 설명했다. 그러고는 나를 컴퓨터 쪽으로 데려간 다음 포토샵을 열더니 자기가 디자인한 이미지를 사각 모자이크로 변환하는 방법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픽셀에 물리적인 몸집을 부여한다는 점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인들은 알게 모르게 인베이더의 전시장을 거닐고 있다. 플레이어들이 앞다퉈 인베이더의 모자이크 작업을 찾아 사진 찍거나 ‘적발해내는’ 모바일 게임 플래시인베이더에는 약 35만 명이 참여하는 중이다.

인베이더는 1990년대에 소르본 대학과 프랑스의 명문 순수예술 대학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얼마간 회화와 드로잉, 영상 외에도 컴퓨터를 갖고 이런저런 작업을 시도해보던 그는 결국 모자이크를 자신의 주 작업 방식으로 선택했다. “당시 어떤 예술을 하든 이런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어요. ‘네가 지금 뭘 하든, 다른 사람들이 이미 다 한 것이다.’ 하지만 모자이크라면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았죠.” 모자이크 작업의 기본은 규격화된 기하학적 구조를 엄격하게 따르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제약이 인베이더에겐 생산적인 작업 방식처럼 느껴졌다. 르네상스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가 남긴 다음의 말은 그에게 시금석이 되어주었다. “모자이크는 영원을 추구하는 그림이다.” 기를란다요가 교황의 의뢰를 받아 성경 장면을 모자이크로 재현했다면 인베이더는 더 대중적인 디지털 문화를 형성하는 일에 작업의 초점을 맞췄다. 어린 시절 인베이더는 스페이스 인베이더 게임을 즐기며 마틴 에이미스(Martin Amis)가 ‘프롤레타리아적 트리피드(Proletarian Triffids, 트리피드는 SF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식물형 괴수다)’라고 칭하던 ‘레이더, 굉음, 친근한 로봇의 환호성’에 푹 빠져 시간을 보냈다. 1960년대를 휩쓴 TV 연속극 <인베이더(The Invaders)>도 빼놓을 수 없다. 특유의 테크니컬러 그래픽과 죽어가는 행성에서 지구로 넘어온 외계인에 대해 설명하던 성우의 목소리를 그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다 예술가로 거듭난 인베이더는 ‘오타쿠적’ 미학을 도시 영웅 서사와 결합하며 그 세대 아이들에게 각인된 대중문화적 요소를 현대의 길거리로 소환하기 시작했다. “인베이더의 첫 번째 혁신은 문자를 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저명한 갤러리스트 겸 큐레이터 마그다 다니즈(Magda Danysz)의 말이다. “인베이더는 그래피티 예술 방식을 차용했지만, 문자가 아닌 이미지를 남겼어요.”

인베이더는 1998년 한 해에만 187점을 남기며 파리를 점령했다. 그중 몇몇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데 이에나 다리(Pont d’Iéna) 터널 위나 샤틀레(Châtelet) 분수대 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포럼 레 알(Les Halles)의 이노상 분수(Fontaine des Innocents) 근처에 새긴 모자이크가 그의 앱에 가장 많은 인증 샷을 남긴 작품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전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CCTV의 조상 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레퓌블리크(Lépublique) 기념비에서 자애로운 눈길로 학생 시위를 바라보는 자주색 외계인도 이제 사진으로만 회상할 수 있다. “지하철에 작품을 설치하면 루브르에 전시할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제 작품을 보도록 만들 수 있어요.” 인베이더가 키스 해링의 명언을 살짝 비틀어 말했다. (인베이더는 과거 루브르박물관에 작품 10점을 몰래 숨겨둔 뒤, 이로써 자신이 루브르박물관의 전시 작가 중 유일하게 현존한다고 자랑처럼 이야기했다.) 2011년에는 유비소프트 파리 본사 직원들이 창문에 포스트잇을 붙여 스페이스 인베이더 모양을 만들었는데, 이는 훗날 포스트잇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 도시적 비공식 대화의 서막을 열기도 했다.

퐁피두 센터의 로랑 르봉(Laurent Le Bon) 관장은 인베이더를 ‘산책을 즐기는 파리지앵(Promeneur)’의 전형으로 비유한다. “소설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같은 유형이랄까요. 도시를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보여주며 ‘이것 봐, 얼마나 신선하고 흥미로운지!’라고 말하는 듯하죠. 저에게 인베이더는 철학자 기 드보르(Guy Debord)가 제시한 심리 지리학자의 자격 요건을 모두 갖춘 사람으로 느껴져요. ‘인생을 짜릿한 게임으로 바꿔놓는’ 사람 말이죠.”

인베이더의 작품은 랜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리베라시옹>은 그런 인베이더를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도시에서 우리는 인베이더의 작품을 기준으로 지리를 파악한다. 오래된 가로등이나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가 디자인한 파리 지하철 입구처럼 말이다.” 인베이더의 표식을 찾는 일은 파리지앵에게 소소한 삶의 즐거움이 된다. 치과 가는 길, 어느 이름 모를 건축물의 박공에서 교활하게 생긴 괴생명체 그림을 발견할 때처럼. 도시 풍경이 소매를 쓱 걷고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한 문신을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루브르박물관의 관리 의원인 디미트리 살몬(Dimitri Salmon)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인베이더 덕분에 많은 사람이 길동무가 생긴 듯한 반가운 기분을 느낍니다.” 인베이더의 작품은 파리 사람들이 이동하는 방식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어느 팬은 말했다. “파리 곳곳에 ‘침략자들’이 널려 있어요. 길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벽에서 ‘침략자’ 하나가 사라진 걸 보게 되면 머지않아 새로운 것이 또 하나 나타나겠거니 직감하게 되죠.”

인베이더는 수많은 모방 작가를 낳기도 했다. 최근 생토노레(Saint-Honoré) 거리에 거대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모자이크를 남긴 주인공은 인베이더가 아니었다. (같은 벽의 다른 한쪽에 아류작을 무시하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는 인베이더의 진짜 외계인 그림이 있다.) 사람들은 아류작에는 인베이더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그래픽적인 힘과 즉각적으로 인베이더의 작품임을 알 수 있는 묘한 흡인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복사기를 너무 많이 거쳐서 해상도가 떨어진 서류처럼 말이다.

거리 예술 기획자 스티브 라자리데스(Steve Lazarides)는 인베이더를 쉽게 번 돈과 뻔한 개그가 판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순수주의자로 묘사했다. “인베이더는 자신의 자유를 걸고 작업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고소 작업용 크레인을 빌려다가 24m나 되는 ‘망할 놈의 치와와’ 벽화를 그리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죠.” (아이러니 앤 보(Irony and Boe)로 알려진, 런던 동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어느 듀오의 실제 작업을 두고 한 말이다.) 최근 들어 파리에는 인베이더가 새롭게 쓸 만한 벽을 더 이상 찾기 힘들 정도로 그래피티가 넘쳐나고 있다. “완전히 포화 상태예요. 똑같은 작업을 하는 모방 작가들이 못해도 네다섯 명은 되죠.” 인베이더 역시 수긍했다. “대중에게도 공해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인베이더의 아틀리에를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최근 집 근처에 오픈한 장난감 가게 파사드에 자그마한 쥐 모양의 도기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게 공상적이라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플래시인베이더 앱을 켜서 사진을 찍었다. 그랬더니 이런 메시지가 떴다. “진짜 스페이스 인베이더 작품을 찍으면 더 좋습니다.” 인베이더가 처음 작업을 시작한 후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위대한 야망을 키우기까지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999년 그는 처음으로 파리를 넘어 벨기에 앤트워프의 어느 벤치 다리에 노란 외계인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런던, 도쿄, 암스테르담, 로스앤젤레스 등 전 세계 도시를 쏘다니며 작업 무대를 넓혔다. 무려 할리우드 사인에도 그의 모자이크가 새겨졌다.

2000년 인베이더는 제22대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도 ‘침략’했다. 무슨 말이냐고? 한 아트 페어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에게 몰래 다가가 수트에 스티커를 붙인 사건이었다. “현대 그래피티의 기본 전제는 가장 높이 올라간 사람이 승자라는 거예요.” 마그다 다니즈는 말했다. “그런데 인베이더는 프랑스 대통령에게 스티커를 붙인 거죠.” 게다가 인베이더는 우주에도 작품을 쏘아 올렸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첫 번째는 손수 제작한 기상 관측기구를 사용했고, 두 번째는 우주 비행사 사만타 크리스토포레티(Samantha Cristoforetti)와 손잡았다.) 가장 높은 곳의 ‘침략자’는 볼리비아 포토시에 있는 것으로 해수면으로부터 무려 4,300m 높이에 있으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침략자’는 멕시코 칸쿤의 바닷속에 가라앉은 조각상에 붙어 있다(해저 8m로 잠수해 들어가면 찾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인도 바라나시의 통로에도, 뉴욕의 웨이벌리 다이너(Waverly Diner) 간판에도 픽셀화된 치즈 버거 모자이크가 붙어 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경찰서 책상 위에 모자이크를 붙이기도 했다. 남다른 정복력을 지닌 인베이더는 세계지도를 볼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고 고백했다. “이 세상에 인베이더가 없는 곳이 아직 너무 많으니까요.”

본격적인 ‘침략’을 위해서는 대략 20일 정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먼저 구글 지도에서 타깃을 정한 뒤 그에 맞춰 제작한 모자이크를 들고 해당 장소에 가서 하룻밤에 3점 정도씩 설치한다. (하루 최대 기록은 8점이다.) 작품이 완성되면 잊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둔다. “몇 년 지나고 나서 보면 더 멋진 사진도 많아요. 좋은 옷이 시간이 지나면 근사한 빈티지가 되듯이 시간이 흐르며 멋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건물과 장소가 있거든요.”

인베이더는 작품 위치 선정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래픽 노블 작가 니콜라 케라미다스(Nicolas Kéramidas)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쓴 책 <인베이더 헌터: 내 세계관을 바꿔놓은 모자이크(Chasseur d’Invader: Comment des Mosaïques Ont Changé Ma Vision du Monde)>에 따르면 모든 작업 현장에 반드시 “경계에서 애매하게 벗어난 장소가 한두 군데쯤 있다”고 밝혀졌다. 인베이더는 동시에 여러 군데에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최대한 여러 지역을 종횡무진하는 방식을 취한다. “제가 남긴 작은 점들이 도시 전체를 뒤덮길 바랍니다. 그래야 컨셉에 맞거든요. 그런 식으로 진짜 침략이 완성되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침략자’는 볼리비아 포토시에 있는 것으로 무려 해수면으로부터 4,300m 높이에 있으며 가장 낮은 곳을 점령한 ‘침략자’는 멕시코 칸쿤의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 조각상에 붙어 있다.

나는 그에게 그의 작품이 내포하는 식민주의적 함의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지 물었다. “저는 무식한 정복자가 되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시적이고, 장난스럽고, 아름다운 작업을 하고 싶은 거죠.” 인베이더의 이미지는 너무 단순해 보이기도 한다. 뮌헨에 남긴 프레첼과 맥주 그림이라든지, 모로코 라바트에 남긴 마법의 양탄자, 페즈 모자를 쓴 외계인, 요술 램프 속 지니 같은 것 말이다. “구글에서 도시 이름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미지처럼 말이죠.” 모로코 출신의 벽화 예술가 메흐디 안나시(Mehdi Annassi)의 발언이다. “모로코에 대해 잘 모르면서 겉핥기로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사람이 그릴 법한 그림처럼요. 하지만 인베이더의 편을 들자면, 그가 현지인을 위해 그런 작업을 남기는 건 아니라고 봐요. 전 세계 팔로워를 위해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니 더 많은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누가 봐도 쉽게 모로코를 떠올릴 수 있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선택하는 거겠죠.”

드물지만, 사회 문화적으로 민감한 장소는 사전에 작업 허가를 구해야 하는 일도 있다. 튀니지 제르바섬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 메노라(유대교 전통 의식에 사용되는 촛대) 모양 모자이크를 설치하려던 때가 바로 그랬다. 물론 그의 ‘침략’은 때때로 좌절되기도 한다. 2018년 그는 유서 깊은 사원의 벽에 만다라 모양의 모자이크를 설치하기 위해 작품 재료 한 보따리를 싸 들고 부탄으로 향했다. 그리고 완성된 작업 사진을 약 7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사전에 수도원장에게 허락을 받고 완성한 작품이었지만 항의가 빗발쳤다. “작업 도중 어느 미국인이 제게 다가오더니 따지더군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남의 나라에 이렇게 함부로 그래피티를 그려도 되는 건가요? 정말 수치스럽군요’라고요.”

그러나 인베이더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솔직히 짜증 났어요. 제 나라가 아닌 곳에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한 그 사람도 그 나라 사람이 아니잖아요.” 곧 그 언쟁은 SNS에서 급속하게 확산됐다. 누군가는 “아주 대단한 나르시시스트 납셨네요”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그렇게 용감무쌍한 예술가라면 다음번엔 라스코 동굴에서도 한번 작업해보지 그러세요”라고 비꼬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탄 정부는 해당 모자이크를 철거했다(이에 관해 수도원장이나 부탄 정부의 입장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인베이더는 여전히 그 일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털어놓았다. “제 경력에 작은 오점이 남은 거죠. 하지만 이 얘기가 나와서 오히려 반가운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잖아요.” 그는 자신에게 딴지를 건 그 미국인을 ‘인류의 구원자인 척하는’ 관광객으로 칭했다. “그 사람은 부탄 국민보다 앞장서서 부탄이 변화하지 않기를 바란 사람이에요. 그는 그저 자신의 꿈과 환상을 투사한 부탄의 모습만 보고 싶었던 거니까요.” 줄리가 촌철살인을 더했다.

인베이더는 특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을 아꼈다. 1969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부모가 자영업에 종사한 중산층의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요약해서 설명했다. 고등학교 때는 펑크, 영화, 사진에 빠져 살았고, 대학 입시에 낙방한 뒤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주변에 대놓고 ‘난 예술가야!’라고 선언하는 건 어쩐지 창피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말이다. 펑크 정신에 맞게 첨단 장비와 비트열을 즐겨 다루고, 공동체 내에서 반항심을 유지하는 것 등은 그가 인베이더로 거듭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기질이었다. 1998년 월드컵의 열기가 프랑스 전역을 점령했을 때, 그는 축구 열풍에 반기를 들며 페탕크(프랑스의 구기 운동), 브라질 전통 춤, ‘소규모 테크노 페스티벌’ 같은 활동을 벌이는 ‘안티 축구’ 연합을 결성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월드컵 개막식 전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당시 월드컵 마스코트였던 푸틱스(Footix) 모형에 바람 빠진 축구공을 던지는 행사를 인베이더가 직접 기획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인베이더는 한동안 VNARC라고 칭한 프로젝트에 몰두하기도 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를 형상화한 컴퓨터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프로젝트로 VNARC는 Vous N’Allez Rien Comprendre(너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의 머리글자다. 1999년 인베이더는 저명한 그래피티 아티스트 제우스(ZEVS)와 함께 ‘@nonymous’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둘은 아방가르드 해체주의자에 영향을 받아 소란을 피우며 재미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Le Détournement’, 즉 기분 전환 거리를 찾아 도시를 헤매고 다니는 예술가가 되기로 작심했다. “우리는 예술을 사랑했지만 그래도 가장 사랑한 것은 반(反)예술이었어요.” 제우스의 증언이다. 둘이 함께 만든 단편영화 속에는 인베이더와 제우스가 소리를 지르며 지하철로 돌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지금 보면 재미있다기보다는 끔찍한 행동이지만, 당시 그들을 목격한 승객들은 그냥 정신이 나갔거나 술에 잔뜩 취한 청년들의 난동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스프레이 페인트 대신 우리 목소리로 파격을 시도한 거죠.” 제우스가 당시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둘은 그때의 행위를 ‘사회에 일종의 기능 장애를 불러일으키고 일상을 무너뜨리는’ 도시의 파괴자 혹은 현대판 해적으로 설명했다.

인베이더는 바스티유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그래피티 아티스트와도 차곡차곡 친분을 쌓았다. “SNS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그런 걸 경험했죠.” 1990년대는 흔히 프랑스 스트리트 아티스트의 호시절로 여겨진다. (초기에 어느 저명한 평론가로부터 “자기 똥을 벽에 처바르는 덜떨어진 놈들”이라며 조롱받던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까스텔바작 컨셉 스토어에서 열린 인베이더의 첫 개인전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모자이크 작품을 15점 정도 준비했는데 사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가 말했다. “단 한 점도 못 팔았죠.” 대중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했다. “사람들은 제 모자이크를 종교 집단의 표식으로 여기거나 ‘이 집은 털렸다’는 도둑들의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저 작업을 반복하며 자신만의 ‘침략’을 계속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에게도 팬이 생겼다. 그의 프로젝트가 품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전문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인베이더는 비디오게임부터 고대 예술의 역사, 심지어 지도학에서 발견되지만 도시 예술에서는 빠져 있는 영역이라는 개념을 작업에 도입해, 자신의 프로젝트를 관념적으로 이끌어가는 동시에 새롭게 정립된 거리 예술 운동이 어떤 형태인지 보여준다.” 마그나 다니즈가 파리 시청에서 열린 전시 <수도: 파리 도시 예술의 60년(Capitale(s): Sixty Years of Urban Art in Paris)>에서 발표한 논문에 실린 말이다(당시 이 전시는 굉장한 인기를 끌며 전시 기간이 몇 개월 더 연장되기도 했다). 인베이더는 1999년에 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를 ‘침략’하며 지도에서 특정 장소에 새겨진 개별 모자이크를 선으로 연결하면 거대한 외계인 이미지가 나타나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기도 했다.

인베이더의 가장 ‘관념적인 침략’은 2012년 여름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당시 그곳은 허리케인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작업 도구가 담긴 짐은 세관을 통과하지 못하는 등 난관이 계속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와중에 인베이더는 영화 <스카페이스>의 그 유명한 ‘전기톱 신’ 촬영지였던 마이애미의 아파트 건물 계단에 모자이크를 설치했다. 며칠 뒤에는 에버글레이즈 습지의 사탕수수밭으로 향했다. 거기서 인베이더를 마주친 <마이애미 헤럴드> 기자의 말에 따르면 “인베이더는 비닐 소재 하얀 방호복에 천 마스크를 쓰고 있어, 유출된 생화학 물질을 청소하는 사람 혹은 영화 <섹스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Everything You Always Wanted to Know About Sex)>에서 정자 복장으로 등장한 우디 앨런처럼 보였다”고 한다.

작품을 우주로 보내려는 그의 첫 번째 시도는 대실패였다. 그러나 인베이더는 몇 달간 끈질기게 매달려 헬륨 풍선으로 된 기상 관측기구를 만들었고, 기어이 작품을 우주로 쏘아 올렸다. 풍선이 터지기 전까지 몇 시간 동안 계속 하늘로 치솟은 인베이더의 모자이크 작품은 상당히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 후 인베이더는 자치군 보안관의 허가를 받은 다음 악어와 뱀, 붉은 개미 떼가 득실거리는 땅을 헤집고 다닌 끝에 이 모든 과정이 녹화된 소형 카메라가 달린 모자이크를 되찾았다. 그 결과가 담긴 영상은 인베이더의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는데 놀랍도록 감동적이다. 새파란 하늘 아래 그가 창조한 고독한 생명체가 잔잔한 구름 속으로 떠오르다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인간 세상으로 추락한다. 무서운 기세로 대기층을 통과하다가 푸른 초목 위로 떨어진 ‘침략자’는 드넓은 초원 위에서 외로이 마지막을 맞이한다.

“전 항상 인베이더의 작업이 다소 단순하다고 여겼어요.” 데미안 허스트가 말했다. “하지만 풍선을 사용해 모자이크를 하늘로 날려 보낸 작업을 보고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죠. ‘와, 이 사람 수준이 상당하구나, 하고요.’” 허스트는 이 외에도 인베이더가 사회관계망 플랫폼 디스코드(Discord)를 열심히 쫓아다닌 일이라든지 그의 팬 중에서 파손되거나 사라진 인베이더를 재건하는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리액티베이터스(Reactivators, 재가동시키는 사람들)’의 등장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예술에서는 결과물 그 자체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베이더는 관념이 전부죠.” 허스트가 말을 이었다. “작품이 망가지지 않도록 지키고 나설 정도로 자신의 작품을 열렬히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정말 대단해요.” 리액티베이터들은 전부 독립적으로 활동하지만 보수를 마친 작품을 원래 있던 곳에 설치하기 전, 작품을 인베이더의 아틀리에로 보내 정식으로 검수를 받는다고 한다(그런 다음엔 플래시인베이더에도 다시 등록해둔다). “수호자 같은 사람들이죠.” 다니즈가 설명했다.

몇 년 전쯤 허스트는 인베이더에게 NFT에 관한 연작을 함께 작업할 의향을 묻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인베이더는 이를 거절했다. “설득력 있는 엄청난 아이디어가 필요할 것 같았는데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죠.” 그러나 그날 이후 둘은 친구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늦은 밤 파리 곳곳에 작품을 설치하고 다니면서 제게 이미지를 보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에 대한 제 반응은 ‘그래, 열심히 해라. 난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좋다’ 정도였어요. 참 부지런히도 돌아다니더군요.”

미술 시장 역시 인베이더를 점점 호의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야외에서 무료로 보여주는 용도가 아니라 갤러리에서 판매하려는 목적으로 인베이더 모자이크 작품의 ‘복제본(Aliases)’ 혹은 ‘고유한 대역(Unique Doubles)’을 제작했다. 각각의 복제본에는 신분증이나 진품 보증서가 포함되었는데 모자이크가 담긴 아크릴 상자에 컴퓨터 디스크처럼 밀어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2019년에는 인베이더가 도쿄의 한 보행로 터널 위에 설치한 ‘우주소년 아톰’을 빼닮은 TK_119의 복제본이 소더비 경매장 거래소에서 1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에 판매되기도 했다. 그의 루빅큐비즘 작품 역시 높은 금액대에 거래됐다.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만든 ‘모나리자’는 48만 유로, 약 6억8,000만원대에 판매됐다. 그의 작품 가치가 날로 높아지며 공짜로 그의 작품을 손에 쥐려는 시도도 늘었다. 2017년에는 두 명의 남성이 벌건 대낮에 공무원 행세를 하며 파리 6구의 한 건물 외벽에 붙은 외계인 모자이크를 뜯어간 사건이 있었다. 그 두 남성은 파리 전역을 샅샅이 뒤져 최소 12점의 작품을 훔쳐갔다. 사건 목격자들은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절도를 막기 위해 이들의 사진을 찍어 SNS에 게재했다. 격분한 인베이더는 이들을 ‘욕심 가득한 도둑들’이라 칭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은 기존 맥락을 벗어나면 가치를 상실하는 데다 진품 보증서 없이는 “거기 쓰인 타일값이나 겨우 될까 말까 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주간 잡지 <텔레라마>에 따르면 도둑들은 들고 다닌 사다리가 부서질 때까지 끊임없이 도둑질을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맞선 리액티베이터들은 작품의 진위 여부와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들먹이며 인베이더의 작품이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을 대부분 막아냈다.

인베이더는 사회적인 인정과 보수를 거부하며 “예술을 만드는 손에 돈이 묻으면 사기 행위나 다름없다”고 주장한 뉴욕의 거리 예술가 레브스(Revs)를 자신의 우상으로 꼽는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경력을 이어오며 보수를 받은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와인 라벨과 스니커즈(이 스니커즈를 신고 걸으면 외계인 모양의 발자국이 남는다)를 디자인했으며, 꼼데가르송과 함께 500달러짜리 카디건을 포함한 협업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저는 반 고흐처럼 살았어요. 지금은 피카소 같은 삶을 살고 있죠.” 동시에 허스트의 조언을 따라 작품 수를 늘리는 중이라고 했다. “데미안이 아무래도 제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자꾸 저보고 작업량을 더 늘려야 한다고 부추기거든요.” 잠시 멈칫하던 인베이더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름난 예술가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작을 했더군요.”

지난 11월 그는 버려진 어느 건물 부지를 내게 보여주며 올해 1월 중으로 그곳에 지금까지 작업한 것 중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베랑제(Béranger) 거리 11번지에 자리한 그 건물은 1987년부터 2015년까지 <리베라시옹> 본사 사무실로 쓰였다. 부지의 새 주인이 인베이더에게 연락해 재건축이 시작되기 전 1,000평이 넘는 공간을 전시장으로 활용해보라고 제안한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촉박한 시간에 비해 부지가 너무 넓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절하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한 공간을 온전히 장악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곳을 인베이더의 우주정거장이라고 부를 거예요. 실제로 그 건물이 우주 항공모함이나 우주선처럼 생기기도 했거든요.” 우리는 경사로를 따라 건물 위로 향했다. 시가를 입에 물고 도시 풍경을 응시하는 유명한 고다르(Godard)의 사진에 등장한 둥근 창문을 지나자 몹시 근사한 옥상 테라스가 나왔다. 인베이더는 과거 <리베라시옹>을 ‘침략’했을 때 시멘트 타일로 덮인 건물 테라스 바닥을 빨강, 흰색, 검은색 페인트로 칠해 하늘에서 자신의 그림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선명하던 페인트칠이 희미해진 지금, 그는 다시 색을 칠할 계획을 품고 있다고 고백했다. 인베이더가 테라스 이곳저곳을 오가며 주변 경치를 살폈다. 그러다 갑자기 끄트머리로 다가가 마레 지구를 내려다보더니 이어서 퐁피두 센터의 튜브와 파이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난간 쪽으로 몸을 더 기울인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 먼 곳을 응시했다. 그가 무엇을 보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리를 뜨기 직전, 그는 자신이 무얼 보고 있었는지 내게 알려줬다. 맞은편 아파트 건물에 새로 설치된 아주 튼튼해 보이는 비계였다.

주변에서 파리에서는 무얼 해야 하는지 물으면 나는 플래시인베이더를 다운로드하라고 말해준다. 인베이더는 2014년 이 게임을 만들었다. 포켓몬 고(Pokémon Go)보다 2년 앞서 만든 이 게임은 점수를 많이 얻을수록 순위가 올라간다. 플래시인베이더의 매력은 충분히 대중문화적인 동시에 마니아적인 구석이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게임을 즐기게 됐지만 여전히 소수만 공유한다는 비밀스러운 느낌이 난다. 내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 게임에 대해 듣고 온 날, 상기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엄마, 이 앱 다운받을 수 있어요?” 대단한 세대 간의 대통합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다른 파리지앵처럼 우리 역시 이 게임을 도시를 새롭게 탐험하는 초대장으로 받아들이며 기꺼이 낯선 여정을 시작했다. (시청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70대로 보이는 어머니와 다 큰 성인 아들이 함께 플래시인베이더 앱을 열고 여기저기를 누비는 모습을 본 일이 기억난다.) 플래시인베이더는 분명 우리 주변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다. 인베이더가 흥미를 느낀 장소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계속 존재하고 있었으나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상점, 학교, 바, 레스토랑, 공원 같은 일상적인 장소까지도. 그러다 ‘침략자’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즉시 도파민이 치솟았다. ‘두두다리두~ 30점을 획득하셨습니다!’ 거리에서 더는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걸을 수 없었다. 눈앞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침략자를 놓치면 안 되니 말이다.

아이들은 게임의 갤러리 메뉴에 들어가 이제껏 발견한 ‘침략자들’이 시간순으로 정렬된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각각의 ‘침략자들’을 발견한 기억을 하나씩 되새기면서. 아이들의 기억력은 나보다 훨씬 훌륭해서 사진만 봐도 그것을 찾아냈을 때의 상황과 기분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쏟아부어서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사실이 정말 고맙게 느껴져.” 내 미국인 친구가 파리 여행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인베이더의 외계인을 추적하며 보낸 뒤 내게 건넨 말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침략자들’을 좇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파리 11구의 들로네(Delaunay) 골목 벽에 붙어 있는 핑크 판다 모자이크 앞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된 두 사람이 그로부터 1년 뒤 결혼을 약속하게 된 사건도 있었다. “딱히 사랑을 찾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인베이더가 우리에게 사랑을 안겨줬군요.” 행운의 당사자가 어느 기자에게 남겼다고 알려진 말이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게임의 특성이 전 세계 팬들의 일상과 그들의 삶에 함께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며칠 전 월요일 점심시간을 앞둔 시각, 어떤 이가 렌(Rennes)에서 해골 머리와 뼈다귀 두 개가 교차된 해적 표식을 한 ‘침략자’를 찍어 업로드했다. 누군가는 로테르담에서 코발트색 문어를 발견해 올렸고, 제르바섬에서는 전통 가옥의 굴뚝에 붙은 물고기 모자이크 사진을 업로드했다. 앱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저마다 다른 세계 곳곳의 날씨를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는 열린 창문을 가진 기분이 들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촬영된 어느 노란색 생명체 사진에는 우연히 그 곁을 지나던 우아한 회색 코트를 입은 엄마와 작고 똘똘해 보이는 아들의 자연스러운 발걸음이 고스란히 포착되어 있었다. 이 모든 사진은 누군가의 소중한 하루가 담긴 아름다운 파편과도 같았다.

아주 열성적인 플레이어들은 이 ‘침략자’ 물색 작전에 집착에 가까운 광기를 드러낸다. 인베이더가 새 모자이크 사진을 올리거나 리액티베이터가 재건 작업을 완료하면, 그들은 점수를 또 따내기 위해 만사를 제쳐두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현재 이 게임의 랭킹 1위에 올라 있는 이는 어느 프랑스 항공사의 기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먼 곳에 있는 ‘침략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방향으로 비행 일정을 짠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광적인 플레이어인 어느 통신사 엔지니어는 네 아이의 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지난해에만 스위스, 호주, 독일, 멕시코, 일본, 한국, 태국, 네팔, 인도, 모로코, 스페인, 벨기에, 미국,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단 두 개의 모자이크를 찾기 위해 24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이스라엘 에일라트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제가 여기에 완전히 미쳐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인생에서 그런 것 하나쯤은 있는 것이 좋지 않나요?” 또 다른 열성 플레이어는 최근 주요 플레이어의 아파트 건물 근처에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모자이크를 설치해 명예의 전당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은퇴한 조산사 일라네오(Illanéo)는 취재를 위해 실제로 만난 플레이어 중 한 명이다. 그는 다른 플레이어가 찍어 올린 사진에서 발견한 단서를 바탕으로 아주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사건을 수사하는 탐정이 된 기분이에요. 하루에도 구글 지도를 몇 시간씩 들여다보곤 하죠.” 일라네오와 그녀의 남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침략자’를 찾은 플레이어 순위 10위와 11위에 각각 올라 있다. 이들은 ‘침략자’를 찾아다니기 전까진 프랑스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죠. 서로 같은 취미를 공유하기 때문에 아무 불만 없이 순전히 이 게임을 위해 해외여행을 계획하게 됐어요.” 일라네오의 인스타그램은 방콕, 스페인 말라가, 볼리비아 포토시 등 전 세계를 배경으로 찍은 부부 사진으로 가득한데 그중에는 일라네오가 남편과 함께 찾아낸 ‘침략자’를 수놓아 만든 스웨터를 입힌 곰 인형도 등장한다.

2000년에는 야외에서 무료로 보여주는 용도가 아니라 갤러리에서 판매하려는 목적으로, 인베이더 모자이크 작품의 ‘복제본’ 혹은 ‘고유한 대역’을 제작했다. 각각의 복제본에는 ‘신분증’이나 진품 보증서가 포함되었는데 모자이크가 담긴 아크릴 상자에 컴퓨터 디스크처럼 밀어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2019년에는 인베이더가 도쿄의 한 보행로 터널 위에 설치한 우주소년 아톰을 빼닮은 TK_119의 복제본이 소더비 경매장 거래소에서 1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에 판매되기도 했다.

플래시인베이더 게임의 규칙은 따로 없다. 승리에 대한 보상도 없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게임이지만 대개 시간이 많고, 부지런하며, 환경보호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에게 유리하다. 윤리적이고 환경보호적인 이유로 채식주의자가 된 인베이더에게 이 게임이 사람들로 하여금 가상의 외계인을 좇아 지구 온난화로 불타는 지구를 더 ‘가열차게’ 여행하게 만든다는 비판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지 물었다. “저도 그 문제에 대해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인베이더는 왕성하게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더 열심히 매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플레이어 순위 목록을 없애는 것도 고려해보았다고 답했다.

2022년 9월 파리지앵 다섯 명이 ‘미친 사람들의 여행’이라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으며, 이들의 여행 계획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영상 제작업 관계자, 의사, 세관 직원, 철도청 직원, 은퇴한 법률 비서로 이루어진 모임은 전 세계 ‘침략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일주일간의 여행을 위해 기획되었다. 총 50여 시간을 운전해 파리에서 발모렐, 스위스 앙제르·베른·로잔, 독일 뮌헨,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보스니아 그루데, 이탈리아 라벤나·로마를 거쳐 다시 프랑스 망통·모나코·니스·에스테렐· 생트막심·칼베르·엑상프로방스를 찍고 돌아오는 어마어마한 여정이었다. 이들의 나이는 28세부터 67세로 기름값을 포함한 이동 경비는 각자 부담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인베이더와 관련된 팟캐스트만 청취했다. 나는 류블랴나에서 이들의 여정에 합류했다. 그들이 도착하기 몇 시간 전에 미리 약속 장소에 가 있었고, 이후 어느 레스토랑의 테라스 자리에 그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요일 밤 자정에 파리에서 출발해 발모렐산에서 일출을 봤어요.” 철도청에서 근무하는 기슬랭(Ghislain)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 월요일 밤 베른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죠.” 여자 셋에 남자가 둘이었으며, 동성끼리 한 방을 썼다. 다음 날 아침에는 8시 30분에 모이기로 합의했다. 목표는 류블랴나에 존재하는 인베이더의 모자이크 40개를 단 6시간 안에 모두 찾아내는 것. 일행은 호텔로 가는 길에 우연히 도시의 상징인 용 모양을 한 LJU_33을 마주쳤다. 용이 뿜어내는 말풍선에 빨간 외계인이 들어 있는 디자인이었다. 이들은 모자이크 앞에 둥글게 모여 이 행운을 다음 날 거둘 대단한 수확을 예견하는 애피타이저로 생각하고 발견의 기쁨을 만끽했다. “다들 준비하시죠!” 영상 제작업계에 몸담고 있는 해롤드(Harold)의 말에 모두 일제히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하나, 둘, 셋!”

다음 날 아침, 우린 커피숍에서 다시 만났다. 그날의 계획은 다소 외진 곳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 모자이크를 먼저 찾은 뒤 도시 중심가로 좁혀 들어가며 남은 모자이크를 수색하는 것이었다. 해롤드는 2년 전 코로나19로 프랑스 전역이 봉쇄됐을 때 이 모든 일을 계획했다고 이야기했다. 마침내 꿈이 현실화된 기쁨 때문인지 해롤드는 여정 내내 의욕이 넘쳐 보였다. “자, 가시죠!” 늦게 합류한 멤버들까지 모두 커피 잔을 내려놓자 그가 무리를 이끌었다.

오전 9시 30분, 그날의 임무가 시작됐다. 이들은 순식간에 우주 모기처럼 생긴 모자이크를 발견했고, 빠르게 북동쪽으로 진입하며 과거 불법 거주민이 모여 살던 마을과 고등학교 농구장, 양배추와 장미로 가득한 텃밭이 펼쳐진 주거 지역, 인베이더가 과일 모양 모자이크를 남겼다고 알려진 슈퍼마켓 등 레이더망에 걸려든 건물과 주택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유령’을 발견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멤버 모두가 철거용 천막에 싸인 한 건물을 향해 휴대폰을 갖다 댔다. 재건축이 완료되고, 언젠가 그곳에 붙어 있던 모자이크가 다시 활성화됐을 때, 남들보다 한발 앞서 모자이크의 위치를 찾아냈다는 점을 들어 추가 점수를 요구할 요량이었다. “제 딸이 그러더군요. ‘엄마, 이건 미친 짓이야.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랑 보스니아까지 간다고?’” 은퇴한 법률 비서 마르틴(Martine)이 나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했다. “원래는 상위 500위권에 드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걸 이루고 나니 이제는 200위권에 들고 싶더라고요.” 기슬랭이 신발에 들어간 돌을 빼내기 위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먼저들 가요!” 그의 외침에 다른 이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날씨와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런 걸 만끽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이른 오후쯤 되니 휴대폰 만보기에는 벌써 2만5,000보가 찍혀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육체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예술, 몸을 일으켜 실제로 노력해야만 일굴 수 있는 예술이었다. “저기도 하나 있어요!” 해롤드가 올리브색 강물 위로 펼쳐진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류블랴나에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해롤드는 이미 이 도시의 지리에 빠삭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롤드가 가리킨 자리에는 파란 ‘침략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이어 시장 광장 쪽으로 향하려는 찰나, 잔(Jeanne)이 약국에서 뭘 좀 사야겠다고 말하며 무리에서 빠져나갔다. “약간은 놀러 온 기분으로 온 사람도 있겠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롤드가 입을 열었다. “‘침략자’를 찾는 일에 진심인 사람도 있지만요.” 15분 뒤 잔과 그녀를 따라갔던 다른 여자들이 약국에서 돌아왔다. “이제 가시죠!” 해롤드가 다시 무리를 이끌었다.

근방에 LJU_35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지도가 정확하지 않았다. 해롤드가 먼저 자갈길로 달려갔다. “못 찾겠어요!” 그가 소리쳤다. 그러나 누군가 근처 가로등에 붙여놓은 인베이더 스티커를 발견했다. 멀지 않은 곳에 진짜 모자이크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해롤드가 최후의 수단으로 구글 이미지 검색을 시도했다. 그러고는 아치 형태의 입구로 들어서더니 어느 뜰로 우리를 이끌었다. 바로 그곳에 ‘침략자’가 있었다. 얼룩덜룩한 벽 위에 자리 잡은 수줍은 표정의 하얀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가 안 나오도록 찍는 게 좋겠어요.” 말을 마친 기슬랭이 벽 위에 비친 그림자를 손으로 가리며 다른 사람들이 깨끗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기술 좋은데요!” 마르틴이 의기양양하게 호응했다. “갑시다!”

3시가 되자 다들 땀에 절어 있었다. 아이스크림과 아페롤 스프리츠 칵테일을 나눠 마시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세어보니 목표하던 40개 모자이크를 모두 찾은 게 확실했다. 일행은 곧장 차로 돌아가 그루데를 향해 서둘러 출발했다.

새 모자이크 작품을 설치하려는 인베이더와 동행한 그날 밤, 인베이더는 경찰의 손전등 빛이 무섭게 쏟아지는 동안에도 계속 타일을 붙였다. 어차피 처벌받게 된다면 완성이나 하고 경찰서로 끌려가자는 투지가 느껴졌다. 그동안 미스터 블루와 나는 인베이더가 올라탄 사다리 아래 꼼짝없이 서 있었다. 몇 분 후, 칠흑 같은 어둠이 되돌아왔다. 인베이더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잽싸게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검거될 것 같진 않군요.” 이 말을 내뱉는 그의 윗입술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거리 예술을 하는 중이란 걸 이해해준 것 같아요.” 인베이더는 우리를 다음 장소로 안내했다. 그는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는 대신 자신의 작품이 있는 곳을 핀으로 표시한 지도를 꺼내어 보며 행선지를 정했다. “저기, 저 조그만 거 보이세요?” 달리는 차 안에서 그가 말했다. “20년 동안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믿어지세요?” 새벽 2시가 막 지났을 무렵, 우린 오페라 거리와 테레즈 거리 쪽을 배회하다가 다음 작업을 위해 차를 세웠다. 워낙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프랑스 혁명 기념일 연휴를 앞두고 있었기에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저는 여름에 작업하는 걸 선호해요. 파리에 사람들이 없어서 도시가 고요하거든요.” 인베이더가 말했다. 그날 밤, 그가 두 번째로 작업하려고 했던 것은 선글라스를 쓴 채 미소 짓는 이모티콘의 반쪽 얼굴이었다. 반원형의 위쪽 부분이 사라진 신호등 형태에 맞춰서 설치할 생각이었는데 아뿔싸, 이미 우리보다 한발 앞서 그곳을 메운 아티스트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다다른 곳은 평소 그가 선호하는 곳보다 훨씬 개방적인 지점이었고, 그는 계획을 바꿔 그냥 온전한 이모티콘을 새겨 넣기로 했다. “작업을 마치는 데 3분이면 족할 거예요. 하지만 만약 그동안 차가 한 대라도 지나간다면 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겠죠.”

이어 인베이더는 오스만 건축양식의 어느 건물 귀퉁이 높은 곳에도 작품을 설치했다. 그는 빗처럼 생긴 장비를 꺼내 들더니 그걸로 모자이크 뒷면에 시멘트를 펴 발랐다. 그리고 플라스틱 손잡이로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을 달듯 조심스럽게 모자이크를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사다리 위로 올라간 그가 나에게 소리쳤다. “여기 제 아류작이 하나 있어요!” 그가 세모난 턱에 빨간 눈을 한 파란 외계인을 지나쳐 올라가며 말했다. 인베이더는 2층 발코니 정도 되는 높이까지 계속 올라갔다. 보도에서 4.5m 정도 되는 높이였다. 그리고 마침내 벽에 이모티콘 패널을 붙이더니 재빨리 내려왔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붙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죠.” 어느새 새벽 3시, 나는 그가 이쯤 했으면 그날 밤 작업은 마무리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면서 PA_1486와 PA_1487로 지칭될 새 작업 2점을 가지러 아틀리에로 돌아갔다. “오늘 이것까지 다 마무리하고 데이터베이스에 업로드할 거예요. 오전 8시부터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거든요.” 차를 출발하기 전 인베이더는 잠시 차 안에 가만히 앉아 도시의 밤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을 잠잠히 감상했다. “밤이 정말 좋아요. 낮에 보는 것과는 완전히 새로운 도시거든요.” (VK)

    사진
    LOU ESCOBAR, GETTYIMAGESKOREA
    LAUREN COLLIN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