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어제를 기억하며 내일을 그리다

2024.02.03

어제를 기억하며 내일을 그리다

김보민 작가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풍경으로 시공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서울을 거닐며 겸재 정선이 반한 산수를 바라본다.

2월 17일까지 열리는 2023 수림미술상 수상 기념 전시에서는 김보민의 대표작과 신작을 모두 볼 수 있다. 그림 속 그림의 구성으로 기차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효과를 노린 ‘낯선 나라’(2022)가 맨 처음 관객을 맞이한다.

김보민 작가에게 과거와 미래는 똑같이 현재진행형이다. 강서구에 거주하는 김보민은 매일 산책하며 양천 현감을 지낸 겸재 정선이 묘사한 풍경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최근에는 방화대교를 산책하며 금덩어리를 주운 형제가 우애를 깨뜨릴까 봐 금을 다시 강에 던져버렸다는 투금탄 설화를 떠올렸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동안에는 스튜디오에서 보이는 서울의 마천루를 작품으로 형상화했고,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할 당시엔 인천 근대 개항장을 상상하며 월미도를 자주 거닐었다. 김보민에게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더욱 풍성하게 감상하도록 도와주는 거울이다.

마침 김보민의 대표작과 신작을 모두 볼 수 있는 2023 수림미술상 수상 기념 전시가 2월 17일까지 열리고 있다. 전시명인 ‘그림자의 강’은 에세이스트 리베카 솔닛의 예술비평 에세이 <그림자의 강>에서 따온 제목이다. 책에서 리베카 솔닛은 캘리포니아의 산업화와 사진의 역사를 조명하며 문명과 기술의 발달로 현대인의 시각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고찰한다. 화가 김보민의 관심과도 맞닿은 구석이 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작품은 ‘니켈로디언’(2022)과 ‘낯선 나라’(2022) 연작입니다. 조선의 모습을 사진으로 처음 기록한 미국 여행가 일라이어스 버튼 홈스(Elias Burton Holmes)의 영상에 매료되어 시작한 시리즈예요. 당시 조선의 모습을 상상하며 마에 먹으로 그렸고, 그림 속 그림의 구성으로 기차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효과를 내려 했죠. 마침 전시장이 영화진흥공사 건물을 개조한 것이기도 해 더욱 재미있는 우연으로 느껴졌습니다.”

보랏빛 하늘과 도시 풍경이 조화를 이루는 김보민의 ‘개화’(2015)는 도시의 차가움을 표현하고, 필선과 차이를 주기 위해 그리기와 붙이기 방식으로 테이프를 사용했다.

아홉 번째 개인전이 펼쳐지는 어두운 공간에서 김보민은 스스로를 ‘산수화가’로 소개했다. 2006년 첫 개인전 <The Settlement>부터 지금까지 전시마다 소재와 형식, 재료와 주제를 바꾸었지만 산수화가로서 바라본 도시 풍경은 한결같이 집중해온 화두였다. 초기에는 주로 산과 들을 표현하다 점차 도시환경으로 대체하면서 산수화가로서 정체성에 더 골몰하게 됐다.

“2021년 산수문화에서 열린 개인전 <섬>에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예전에는 감정을 배제한 채 서울 풍경을 다소 차갑게 표현했지만, 그때부터는 감정을 넣게 되었죠. 당시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린 작품을 여럿 선보였는데요. 근대 풍경을 항공 시점으로 바라보며 현재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이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사실 한국화가로서 크게 주목받는 작가는 많지 않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의 동양화 전공 출신은 김보민이 유일하다. 의외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한국적 표현법과 감수성을 발휘하는 작가가 국제적 전시에 초대되는 경우도 여전히 드물다. 김보민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꾸준히 국내외 전시를 이어가며 무대를 넓히고 있다. 덕분에 스위스 바젤의 아트 바젤에서 선보인 지도 그림을 마이크로소프트 아트 컬렉션이 구입해 소장한 사례도 있었다.

‘탄천’(2007).

맨 처음 그녀가 한국화에 매료된 데는 어머니인 서예가 최다원의 영향이 크다. 어머니를 따라 김보민은 어릴 때부터 붓글씨 쓰는 것을 즐겼다. 현대인에게 낯선 미술 재료인 지필묵이 지극히 편하고 매력적인 매체로 느껴졌다. 김보민은 먹과 마찬가지로 천년의 역사를 지닌 유화물감을 포함해 그 어떤 매체도 먹처럼 맑고 깊은 효과를 낼 수 없다고 예찬한다. 그녀는 오래된 방식으로 먹을 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상상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활용법을 실험하고 있다. 그 결과 먹은 어떤 바탕과도 잘 어울리고, 잘 붙으며, 자유롭게 혼합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전히 지필묵을 실험하고 있으며, 상상력을 활용해 가능성을 넓히고자 한다. 김보민은 2021년 그룹전 <아으 다롱디리>에서 어머니와의 협업에 도전하기도 했다. 시, 글씨, 그림이 어우러진 시서화는 과거부터 아름다움과 품위를 인정받은 미술이며, 특히 여성의 목소리에 집중한 전시 역시 세 가지 요소를 앞세워 관객에게 조화로운 시간을 선물했다.

김보민이 지필묵에 매혹되어 있다고 해서 언제나 한국적인 정서와 방식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17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유행한 가상의 지도 ‘카르트 드 탕드르(Carte de Tendre)’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당시 여성의 몸을 빌려 사람의 마음에 이르는 길을 그린 지도가 유행이었다. ‘외로움의 습지’ ‘슬픔의 강’ 등 감정을 영토로 표현한 앤티크 지도는 여러 박물관에 전시되어 여전히 수많은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김보민 역시 산수화가 역사, 지리, 감정을 모두 ‘땅’으로 치환해 보여주는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 오래된 지도를 소재로 한 작업은 그녀가 10여 년 전쯤 집중적으로 선보였는데 그녀는 조만간 여왕의 공간을 뜻하는 ‘하트 캐비닛’을 소재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려 한다.

‘독립문’(2006).

“지필묵만 고집해온 것은 아닙니다. 2009년 선보인 ‘가회도’(국립현대미술관 소장)는 지금의 가회동을 고미술 지도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고, 지금의 고층 빌딩이 들어선 모습이죠. 한국화 기법과 더불어 테이프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아주 자세히 봐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먹과 테이프가 조화를 이뤄요. 도시의 차가움을 표현하고, 필선과 차이를 두기 위해 건물을 묘사하는 데 테이프를 사용했고, 그럼으로써 수묵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표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죠. 지난 <섬> 전시에서는 전시장 벽면에 테이프를 활용한 드로잉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현대인에게 익숙한 도시를 산수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것과는 다른 선이 필요했고, 거기에 테이프가 요긴하게 사용됐다. 전통에 반항하는 젊은 작가의 치기 어린 도전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국악 장단을 적극 활용한 방탄소년단의 음악이 떠올랐다. 익숙한 세계에서 새로운 땅을 개척한 선구자가 언제나 훌륭한 아티스트가 되는 법이다.

‘그림자의 강’(2023). 김보민에게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더욱 풍성하게 감상하도록 도와주는 거울이다. 최근 김보민은 겸재가 사랑했던 금강산에 집중하고 있다.

돌고 돌아 김보민은 다시 겸재 정선에 관심을 가지려 한다. 예전부터 그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이어왔으나 이번에는 겸재가 사랑했던 금강산에 집중하고 있다. ‘니켈로디언’과 ‘낯선 나라’ 연작에서 상징적으로 북한을 다룬 적 있는데 금강산으로 향하는 문이 더욱 굳게 닫혀버린 지금, 북한의 풍경을 다룬 그림이 한층 특별하게 느껴질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겸재는 살아생전 금강산 여행을 세 차례나 떠났고,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자료는 풍부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정부가 조선 관광을 홍보할 때 자주 내세운 금강산 관련 자료도 이제는 소중한 기록이다. 이번에도 김보민은 시간과 분단된 공간을 넘나드는 새로운 차원의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작가라면 누구나 예술 기관이 오래오래 소장하고 싶어 하는 타임리스한 마스터피스를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간 너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아 요즘은 호흡을 다듬고 리서치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요.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기도 하죠. 돌아다니다 보면 항상 전시 생각이 나기는 하지만요.”

전통은 박제하고,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발전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식이 팽배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한국화 역시 박제된 전통으로 여겼지만 김보민을 포함한 새로운 한국화 작가들은 오래된 유산을 현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에 기대감이 크다. 우린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며 무언가를 알게 되기도 한다. 김보민은 어제를 기억하면서 내일을 그린다. (VK)

    피처 에디터
    류가영
    이소영
    사진
    김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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