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디자이너들이 만든 가장 아름답고 합리적인 가방
스타일에 어울리는 가방을 들고 싶을 뿐, 특정 브랜드를 과시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대 서울 디자이너들이 만든 가방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세상 사람을 개를 좋아하는 사람(Dog Person)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Cat Person)으로 나누듯이, 가방을 좋아하는 사람(Bag Person)과 신발을 좋아하는 사람(Shoe Person)으로도 나눌 수 있다. 나는 150% 신발을 좋아하는 쪽이다. 얼마 전에 이사를 했는데, 신발장이 아주 커서 그동안 파우치 안에 넣어둔 신발을 전부 꺼낼 수 있었다. 이사를 도와주러 오신 부모님은 “이제 죽을 때까지 신발 살 필요 없겠네”라고 그만 사라는 의사를 완곡하게 전하셨다. 신발을 정리하다가 토 나올 뻔했다는 얘기에 친구는 당연하다는 듯, “팔아버려! 그래야 새로 사지!”라고 말했다. 뭐, 둘 다 괜찮다. 이제부터는 가방을 사면 되니까. 내 남은 인생을 ‘백 퍼슨’으로 살기로 선언한다.
왜 나는 그동안 가방보다 신발을 좋아한 걸까?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오빠(패션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는 현관에 널브러진 발렌티노 컴뱃 부츠와 토템의 뾰족한 플랫 슬링백, 두툼한 고무 밑창의 케이트 샌들과 오래전에 산 알렉산더 맥퀸의 케이지 앵클 부츠를 보고 놀라워했다. “와, 전부 다 다르게 생겼네.” 유레카! 내 신발 컬렉션이 이토록 방대해진 이유는 매 시즌 새로운 디자인과 새로운 디자이너가 내 마음을 자꾸 홀렸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매번 가방을 사려다가도 단념하고 만 이유는 마음에 쏙 드는 것을 찾지 못한 탓이다. 하이엔드 브랜드의 백은 부담스러웠다. 컬러, 형태, 디테일, 브랜드를 드러내는 방식까지 백의 모든 요소가 전형적으로 아주 완벽해서 어떤 옷을 입어도 그 ‘백’만 보일 것 같았다. 난 내 스타일에 어울리는 가방을 들고 싶은 거지, 특정 브랜드를 과시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준지 몬스터 백의 등장은 신선했다. 이 백은 지난여름 파리 남성 패션 위크의 준지 2024 S/S 컬렉션 런웨이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지엘라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얻은 파워 숄더 재킷, 롬퍼를 입은 모델이 손에 든 몬스터 백은 우주 비행사의 육중한 헬멧처럼 보였다. 착 달라붙는 스팽글 톱에 오버사이즈 카고 팬츠를 펄럭이며 등장한 모델이 그 가방을 옆구리에 꼈을 땐 테왁을 든 제주 해녀가 떠올랐다. 둥그스름한 형태는 정면에서 보면 비대칭으로 한쪽이 밀려 올라갔는데, 네스호의 괴물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색다르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이지 않고, 차돌처럼 야무지다. 준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욱준은 몬스터 백 론칭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준지의 정체성이 반영된 액세서리 라인을 원하는 고객은 꾸준히 있었습니다. 그 수요를 반영해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시그니처 백을 내놓게 된 거죠.”
디자이너 최유돈은 2022 F/W 시즌부터 루이까또즈와 협업해 런웨이에 백 컬렉션을 선보여왔다. “유돈 초이는 패턴과 구조가 굉장히 중요한 브랜드죠. 백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제되면서도 눈에 띄는 포인트 요소를 디자인에 담으려고 하죠. 매 시즌 다채로운 컬러를 사용하는 것 또한 강점이고요.” 루이까또즈의 유돈 초이 컬렉션은 요즘 젊은 여자들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선호하는, 부드러운 색감의 우아하고 얌전한 도자기를 닮았다. 뻔한 가방 모양에서 벗어나 곡선과 직선이 교차하는 입체적인 형태는 가방이라기보다 오브제처럼 보인다. “지금 가장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꼽으라면 2023 F/W 아비가일 백입니다. 빈티지 소파에서 영감을 받아 퀼팅 작업으로 완성했죠. 젠더리스 백으로도 손색없어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합니다.” 퇴적층처럼 퀼팅을 가로로 넣은 아비가일 백은 소셜 미디어에서 한창 유행한 토고 소파나 드세데 소파처럼 편안하고 우아하다.
“웰던? 단순하면서도 디자인이 위트 있어서 마음에 들어요.”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의 백 촬영이 진행 중인 스튜디오 테이블에는 가방이 산처럼 쌓여 있다. 아침 7시부터 화보를 진행하느라 살짝 지쳐 보이는 패션 에디터는 가방 더미를 훑어본 후 결심한 듯 손가락으로 웰던을 가리켰다. 캐미솔 모양의 귀여운 쇼퍼 백은 아주 단순한 구조로, 종이 쇼핑백처럼 각진 형태도 있고 에코 백처럼 부드러운 형태도 있다. 촬영을 보조한 스물여섯 살 어시스턴트도 이것저것 마음껏 담을 수 있다. ‘보부상 가방’이라는 점 또한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로우클래식은 2023 F/W 시즌에 이어 2024 S/S 시즌에도 축 늘어진 오버사이즈 백을 선보였고, 우영미의 문 백은 기차 여행을 할 때 베개로 써도 될 만큼 큼지막하다. 젠지(Gen Z) 어시스턴트는 렉토의 캔버스 라지 버킷 백도 늘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라고 중얼거렸다. 실제로 캔버스 라지 버킷 백은 랑데부 백과 함께 렉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백이다. Z세대의 생생한 의견을 좀 더 들어보자. “매일 똑같은 하이엔드 브랜드 백을 들고 다닐 순 없잖아요. 내일 또 들어도 괜찮을지 고민할 필요 없고, 그렇다고 너무 저렴해 보이지도, 너무 튀지도 않는 게 좋아요.”
렉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백석은 렉토에서 백 라인은 말 그대로 액세서리의 위치임을 강조했다. “TPO에 맞는 애티튜드를 반영하면서 과하지 않게 드러나는 포인트 역할을 하죠. 룩을 세련되게 완성하는 요소입니다.” 최근 렉토의 백 라인에 RC 시그니처 백과 이클립스 백이 추가되었다. “조금 비실용적인(Unpractical) 디자인과 동시대적 무드, 과거의 아카이브를 렉토의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데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제각기 다르면서도 잘난 척하지 않는 가방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결정적 이유는 다름 아닌 가격대다. 예를 들어 내 기준에서 단순히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신용카드를 긁을 수 있는 백의 마지노선은 199만9,000원이다(쉽게 말해 200만원 미만). 하이엔드 브랜드가 경쟁하듯 백 가격을 올리면서 ‘중간 가격대 백(Midrange Bag)’은 새로운 패션 키워드이자 블루오션이 됐다. 요즘 틱톡에서 대박을 치고, 핫한 셀러브리티가 일제히 어깨에 두르고 다니는 백은 전부 이 카테고리에 속한다. 샵밥(Shopbop.com)의 액세서리 팀장 앨리슨 라일리(Allison Reilly)는 중간 가격대 백이 사랑받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유행을 잘 반영할 뿐 아니라, 고가의 하이엔드 백을 샀을 때보다 옷장을 훨씬 더 다양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주니까요.” 촬영장에 모인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백의 가격대는 전부 나의 마지노선을 넘지 않는다. 심지어 잘만 고르면 두 개, 세 개도 살 수 있다. 다음 컷을 촬영할 가방을 고르던 패션 에디터는 큐브 모양으로 접히는 로우클래식의 2024 S/S 시즌 미니 백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말했다. “오리가미 모티브처럼 유행하는 디자인을 선호한다면 로우클래식을 살래요!” 오, 그래? 그렇담 나도! (VK)
- 포토그래퍼
- 장덕화
- 글
- 송보라
- 모델
- 발레리 바스, 원징
- 헤어
- 황희정
- 메이크업
- 이현우
- 세트
- 전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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