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갱
패밀리와 프렌즈, 그리고 갱, 크루, 패거리 같은 말이 패션 울타리 안에서 요즘처럼 자주 들린 적이 또 있었나. 이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패션 집단 문화라는 또 하나의 콘텐츠를 완성했다.
나이 지긋한 어느 신사분의 입에서 이런 지시가 들린다고 상상해보자. “자, 어서들 모여봐요. 여기 계단으로. 신사분들이 계단에 앉아야 숙녀분들이 뒤에 서면 잘 보이겠죠? 크리스틴, 줄리안 옆에 서봐요. 오, 마담 위페르. 당신은 중앙에 모실게요. 음, 어디 보자. 스텔라! 라라! 우리 슈퍼모델들은 키가 껑충하니 맨 뒤에 서줄 수 있겠지? 그리고 GD. 당신의 새빨간 머리가 금발과 흑발 사이에 유난히 돋보이는군요. 한 명, 두 명, 세명… 열아홉, 스물, 스물한 명. 다들 제자리를 찾은 듯하니 내 위치만 잡으면 되겠군. 나는 여기 릴리 콜린스 옆이 좋겠네. 사진가 양반, 이제 셔터 눌러도 됩니다!” 7월 7일 샤넬 꾸뛰르 쇼 직전에 촬영됐을 한 컷의 사진은 패션쇼 직후 세상에 공개되자마자 실로 어마어마한 반향을 일으켰다. 샤넬 기념 촬영에 동원된 인물들을 보며 “와우!”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옥석을 고르듯 하늘 아래 선별된 ‘샤넬 셀럽’들은 늘 하던 것처럼 또 한 차례의 꾸뛰르 패션쇼를 빛내러 그랑 팔레로 집합한 뒤 명장면을 남긴 게 아니다. 물론 ‘카지노 서프라이즈’를 위해 모인 거지만, 샤넬 가문의 담장 너머로 전달된 소식통에 따르면 비밀스러운 홍보 전술이 하나 더 숨어 있다. 지금껏 선보이지 않았던 1932년 가브리엘 샤넬의 ‘비주 드 디아망(Bijoux de Diamants)’ 컬렉션을 재구성한 뒤 각각의 셀럽들에게 연출한 것. 그렇다고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보석을 착용케 한다는 명분만으로 ‘디아망’처럼 빛나는 셀럽들을 모셔올 샤넬 가문이 아니다. 그 보석으로 치면 10월 13일부터 11월 1일까지 런던 사치 갤러리에서 열릴 ‘마드모아젤 프리베’ 전시의 주제라는 사실! 이렇듯 샤넬 가문은 치밀한 기획 아래 그들만의 고유한 집단 문화를 형성하는 중이다.
우리는 지난 7월호를 통해 패션 생태계에 유행병처럼 퍼지는 집단 문화 현상을 ‘패션 패밀리’라고 압축했다(도나텔라 베르사체가 지방시 광고 모델로 출연한 사진 한 컷에서 시작됐다). 칼 라거펠트 역시 샤넬 꾸뛰르 쇼에 뜬 패션 별들을 가족처럼 애지중지할 것이다. 보시다시피 당대 패션에서 대세는 ‘집단 문화’다. 정말이지 갱, 크루, 프렌즈, 패거리 등등 소속감으로 충만한 단어가 요즘처럼 빈번하게 들린 적도 없다.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끼리끼리 모여 세와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은 하나의 현상을 넘어 이젠 마케팅 수단에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유유상종이란 말처럼 디자이너 곁엔 뮤즈, 스페셜리스트와 고객, 연예인들이 늘 진을 친다. 그들은 패션쇼가 끝난 뒤 애프터 파티에 가서 신나게 놀거나 함께 여행을 떠나며 결국 자신들만의 ‘물 좋은’ 문화를 만든다(그건 디자이너가 아닌 우리들도 다를 게 없다).
이런 분위기를 SNS용 기념사진으로 업로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홍보용으로 적극 활용한 인물이 있으니 지방시의리카르도 티시다. 이태리 출신이라 유난히 가족, 혈연, 지연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한국인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그의 패션 집단 문화엔 ‘나름’ 역사와 전통이 있다. 그건 2010년 미국 <W>의 ‘Tisci’s Tribe’라는 기획을 위해 모이면서부터다. 그때만 해도 시애라(가수), 리브 타일러(배우), 마리아칼라(모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아티스트), 레아 T(트랜스젠더 모델) 등이 현대판 지방시 뮤즈로 선발돼 농구장에서 단체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미국 <보그>2012년 3월호에는 더 강력하고 견고하게 형성된 지방시 패션 집단이 공개됐다. 리브 타일러는 물론, 리야 케베데와 캐롤리나 쿠르코바가 모델로 추가됐고, 무엇보다 플로렌스 웰치를 무릎 위에 앉힌 칸예 웨스트의 모습은 지방시 공식 입성을 알리는 데뷔 무대쯤 됐다(성공의 검증이자 보증 수표쯤 되는 사진가 애니 레보비츠 앞에서).
리카르도 티시의 뿌리 깊은 패션 가족사는 8월호 일본 <보그> 표지를 통해 절정에 치달았다. 사실 패션지 표지에 디자이너가 직접 나오는건 흔치 않은 일이다(표지는 초특급 여배우나 여가수, 슈퍼모델쯤 돼야 얼굴을 내밀 수 있는 패션 성역이므로). 그러나 의미심장한 가족사진을 찍는 자세로 티시 집단은 <보그> 표지를 한가득 채웠다. 티시는 빨강 머리에 애착을 보이는지, 이번엔 플로렌스 웰치 대신 제시카 차스테인을 멤버로 받아들였다. 흑인 모델도 교체했지만(리야 케베데에서 조안 스몰스로) 칸예 웨스트는 티시 집단의 행동 대장처럼 여전히 늠름하다. 여기에
요즘 뜨는 여자 모델 네 명까지. 그런 뒤 제일 크게 표기된 커버라인은? ‘Fashion Gang’(아울러 표지 설명엔 ‘Gang Members’). 티시는 지방시 집단을 ‘Gang’으로 지칭하길 원한 것이다. 그런 인물이라면 광고에 지방시 갱스터들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올가을만 해도 마리아칼라는 물론, 스테파니 셰이무어의 첫째 아들 등이 티시의 호출 아래 진화된 지방시 집단주의를 구현했다.
이런 현상을 보며 마크 제이콥스는 자신이야말로 패션 집단 문화의 원조라며 손사래 칠지 모른다. 하긴 제이콥스로 치자면 패션 집단 문화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인 패션 프렌즈의 선구적 인물이다. 시그니처 브랜드와 루이 비통을 이끌던 시절부터 패션 뮤즈 개념을 아우르며 자신의 인맥을 캣워크 안팎에서 맘껏 활용했으니까(‘루이 비통 프렌즈’는 패션 업계에서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로 꼽힌다). 비통을 떠나 자기 이름을 건 브랜드에 집중하면서, 그는 보다 악착같이 ‘자기 사람 챙기기’에 나섰다. 마크 제이콥스 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떠오르는 두 이름(소피아 코폴라, 위노나 라이더)을 가을 캠페인에 전격 출연시켰으니까. “나는 늘 런웨이 옷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영감을 주는 인물들과 함께 일하길 좋아한다.” 그에게 집단 구성원들은 영감의 원천인 셈이다.
한편 발맹 군단, 발맹 군대 등 주로 호전적 표현으로 패션 집단주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낸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남들이 친구나 지인들을 소집할 때 친혈육을 캠페인 주제로 택했다. 켄달 제너 자매, 지지 하디드 자매, 조안 스몰스 자매 등이 각각 둘씩 짝지어 발맹 캠페인에 등장한 이유다(조안 스몰스는 지방시와 발맹 가문을 넘나들며 ‘두 집 살림’ 중). 또 여러 패션 집단 문화의 필수 코스인 단체 사진 촬영을 위해 세 쌍의 자매가 얽히고설켜 ‘떼샷’ 촬영까지 마쳤다. 그런가 하면 늘 떠들썩한 대가족 분위기로 설정된 돌체앤가바나 비주얼에는 도메니코와 스테파노가 누이처럼 여기는 여인이 왁자지껄한 상황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 바로 모니카 벨루치! 관능미 철철 넘치는 이 절세미인은 돌체앤가바나라는 패션 마피아의 여자 돈 콜레오네로서 브랜드 파워를 막강하게 보여준다.
내친김에 몇 년 전까지 훑어 이 같은 현상을 파헤쳐보면, 여자로 사는 즐거움이 패션 집단 문화로 표현된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스텔라 맥카트니는 일하는 엄마나 전문직 여성 등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보그>에 종종 나와 여자로 사는 즐거움을 몸소 보여줬다. 또 피비 파일로가 디자이너로서 기량이 절정에 오른 작년 봄(회화를 프린트로 활용한 시즌), <T> 매거진은 그녀를 표지에 올리며 ‘셀리니스타’로 호명될 피비의 여인들까지 소집했다. 기획에 의기투합한 여인들(샤넬 셀럽이기도한 이자벨 위베르, 에디 캠벨의 엄마인 건축가 소피 힉스, 모두가 사랑하는 리야 케베데, 갤러리스트 새디 콜스와 폴린 델리, <보그> 패션 에디터 카밀라 니커슨) 모두 셀린 차림으로 각자 흑백 포트레이트를 찍으며 ‘셀리니즘’을 찬양했음은 물론이다. 또 1년 전 랑방 캠페인에는 에디 캠벨을 중심으로 그녀의 남자친구는 물론, 셀린 그룹에도 참여한 엄마 소피 힉스, 아빠, 오빠, 언니, 언니의 남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 그야말로 캠벨 일가가 사진가 팀 워커 앞에 여러 버전으로 짝지어 섰다. 심지어 그녀의 애마 돌리까지. 하긴 패션 집단 문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때 진짜 일가족만 한 것도 없긴 하다.
이렇듯 디자이너들은 저마다 “우리가 가장 짱짱해!” “우리 무리가 제일 잘나가!”라고 외치며 패션 지도에서 고유 영역을 만들고 있다. 물론 예전엔 갈리아노나 맥퀸 같은 몇몇 상징적 인물들이 타고난 천재성으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요즘 디자이너들은 그들만큼의 ‘스타성’과 ‘끼’가 부족한 데다 ‘함께 더불어 행복한 패션 세상’을 추구하다 보니 친구나 가족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고유의 집단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너와 나의 패션 가치가 동일하다는 데서 연대감을 느끼며 패션 집단의식에 사로잡히는 것. “구성원 간에 협조적이다보니 우호적 관계가 형성돼 가족 같은 분위기가 이뤄지며, 구성원 개인 업적보다는 협동의 성과를 중요히 여긴다.” 집단주의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정의한 적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요즘 패션 집단주의는 자기들끼리 몰려 일하고 노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협동의 성과’를 위해 집단 구성원들 그 자체가 마케팅 도구가 된다.
서울에서도 배우 유아인의 창작 집단 ‘스튜디오 콘크리트’에 가면 여러 예술 영역에서 다재다능하고 폼 나는 젊은이들이 모여 일한다. 이 아티스트 그룹은 ‘1 to 10(일명 마라톤 티셔츠)’이라는 기획을 통해 멤버들이 각각의 숫자 티셔츠를 입고 브로슈어 모델로 출연했다(심지어 이곳의 마스코트쯤 되는 강아지 ‘탁구’까지). “막대한 예산 없이 취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놀 듯 재미있게 일하는 것! 일이든 뭐든 함께 즐기는 게 좋아요.” ‘프로덕트 프로젝트’의 첫 번째를 성공시킨(멀티숍 ‘톰 그레이하운드’를 통해 70% 이상이 팔렸다) 스튜디오 콘크리트 차혜영 대표의 얘기다. “원래는 친구들에게 원투텐 티셔츠를 입혀 폴라로이드를 찍어주는 식의 가벼운 론칭 행사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친구들이 자기도 찍어달라고 하는 바람에 지금은 한쪽 벽을 가득 채울 만큼 수많은 사람이 우리 티셔츠를 입고 홍보하게 됐죠.” 덕분에 각자의 SNS를 타고 이 티셔츠는 급속도로 소문이 났다. “아울러 보도 자료용 리플릿을 위해서는 고민 끝에 우리 크루들이 출연하는 게 의미 있다고 여겨 멤버들이 직접 출연하게 됐어요.”
그렇기에 패션 그룹의 집단 문화는 가풍이나 가호처럼 가지각색 천차만별. 브랜드 책임 디자이너의 기질이나 성향을 그대로 반영한다. 세상에 대해 폐쇄적인 에디 슬리먼은 딱 자기 자신처럼 YSL식 집단주의를 보여줬다. 얼마 전 선보인 꾸뛰르 라인(‘생로랑’ 때 내팽개친 ‘이브’를 되살리고 고유의 카산드라 로고를 사용한 ‘이브 생 로랑 꾸뛰르 프리베’)이 좋은 예. “꾸뛰르 프리베는 아주 ‘익스클루시브’한 컨셉으로 운영됩니다.” YSL사람들은 흥분된 듯 신중한 태도로 은밀한 기획에 대해 전했다. “현 단계에서 꾸뛰르 프리베는 이브 생 로랑 가문(3년간 슬리먼에 의해 재건된 생제르맹 ‘Hotel de Senecterre’ 3~4층이 꾸뛰르 프리베 살롱)에서 슬리먼에 의해 선별된 ‘Friends of the House’들만 입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이브생 로랑 친구들’을 위해 제작되는 옷이라! 어쩌면 패션 집단 문화의 새로운 선언인지도 모르겠다.
- 에디터
- 신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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