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델핀 아르노
디올 CEO로 첫해를 마감하는 델핀 아르노가 기업의 영광을 이어갈 강력한 수호자이며, 파장을 준비하는 리더로서 능력을 입증하고 있다.
델핀 아르노(Delphine Arnault)는 루이 비통 송별회를 마치고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해 2월 1일 아침 파리 크리스챤 디올의 회장 겸 CEO로서 첫 출근을 했다. 세계 최대 부호로 종종 거론되는 베르나르 아르노의 맏이로 외동딸인 그녀는 몇십 년 동안 아버지의 LVMH 계열사에서 패션 비즈니스 실무를 익혀가며 승진을 이어왔다. 델핀은 마흔일곱이 되는 해 마침내 디올이라는 왕관 보석을 손에 쥐었다. 아버지가 매입한 첫 패션 하우스의 경영권을 갖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종종 방문하던 곳이었다. 77년 전 여성의 인생 설계 방식을 바꾸었고, 오늘날에도 직원들에게 무슈 디올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자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크리스챤 디올은 프랑스 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런데 델핀 아르노가 그 디올을 이끌 최초의 여성이 된 것이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에 사는 친구 래리 가고시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래리, 여기 사무실이 널찍한 것은 좋은데 참 외롭군요!” 아르노 가문에서 태어나면 여러 사람과 친해지기 쉽지만, 그렇다고 고립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조용히 살던 아르노 가족이 대중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베르나르가 다섯 자녀에게 각자 지분 20%를 갖는 지주회사를 통해 LVMH의 미래를 위한 의사 결정을 맡기면서부터였다.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나면 실수가 용납되지 않아요. 어떻게든 꼬투리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델핀의 남동생 앙투안의 말이다.
내가 델핀 아르노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디올의 지휘권을 잡은 지 7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의 파리 스튜디오 로비에서였다. 델핀은 남색 디올 트라우저 수트 차림을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를 맞이했다. 그녀의 태도에는 180cm에 가까운 키에 어울리는 신중함과 섬세함이 배어 있었다. 디올 2024 S/S 쇼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스튜디오에서는 검은 가죽 의자 세 개가 네온 핑크 및 노랑 세트 샘플 앞에 놓여 있었다. 모델들이 이리저리 워킹하는 동안 교정이 몇 차례 이뤄졌고, 액세서리를 골랐다. 우리 앞에는 딸기와 산딸기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청바지와 검은 스웨터 차림의 마리아 그라치아가 델핀 옆에 앉더니 작은 그레이 푸들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브랜드의 컬러에 딱 맞는다며 미소를 지었다. “딱 그리 디올이죠.” 마리아 그라치아가 말했다.
크리스챤 디올이 1947년 여성의 삶, 그들의 투쟁, 그들이 그리는 미래를 논했다면, 이제 그의 기업을 지휘하는 최초의 두 여성이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CEO 델핀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는 바쁜 커리어 우먼이자 어머니로서 디올 역사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여성이 입는 것, 그들의 감정, 옷 제작자의 감정을 좌우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패션은 자유로운 감정을 북돋워야 해요.” 마리아 그라치아의 철학이다. 아르노 가족과 가까이 지내며 LVMH 이사회에 13년간 재임해온 마리 조제 크라비스(Marie-Josée Kravis)는 이렇게 평한다. “재능 있는 두 여성이 확고한 철학을 매일같이 실천하고 있어요. 모든 여성의 귀감이죠.”
의상이 등장하자 델핀과 마리아 그라치아가 각자 자기 직원들과 업무를 본다. 델핀은 배우기만 하고 간섭하지는 않는다. 미완성 단계의 컬렉션을 이미 두 차례 감상했다. “볼수록 조금씩 눈이 트이죠.” 블랙 플리츠 스커트에 디올의 1947 뉴 룩이 반영되었으며, 비대칭 흰 셔츠 칼라에서 재해석이 드러났다. 끈이 여러 개 감긴 글래디에이터 부츠에서 키튼 힐, 진주 단추 같은 독특한 감각이 눈에 띈다. 여러 종류의 레이스로 만든 면 드레스가 보이는가 하면, 에펠탑의 흐릿한 모습이 엑스레이처럼 투영된 검은 코트도 있었다. “룩이 몇 벌인가요?” 델핀이 물었다. “지금은 78벌입니다. 라켈레가 5벌을 줄였어요.” 마리아 그라치아가 대답했다. 마리아 그라치아의 스물일곱 살 딸이자 문화실장인 라켈레 레지니(Rachele Regini)가 우리 뒤에서 모델들을 준비시키는 등 리허설을 감독했다. “그 옷을 입기에 모델이 너무 마르지 않았니?” 마리아 그라치아가 모델 한 명을 평하며 소리치고는 델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부분에서 제가 좀 민감해요. 마른 여자를 내보이기 싫거든요. 건강한 친구들이 낫지.”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정말 치열한 일주일이죠. 그렇지 않나요, 델핀?”
부정할 수 없었다. 델핀과 그녀의 동거남 자비에 니엘(Xavier Niel, 둘 사이에는 두 아이가 있다)은 5일 전 영국 찰스 3세 국왕 부부를 위한 베르사유궁 만찬에 참석했다(카밀라 왕비는 디올 차림이었고, 프랑스 영부인 브리지트 마크롱은 루이 비통을 입었다). 델핀은 수놓은 모직 오뜨 꾸뛰르 코트에 레이스와 샴페인색 크러시트 실크로 이뤄진 매우 긴 로브를 착용했다. 다음 날에는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전시장으로부터 불과 몇 계단 떨어진 아래층에서 디올 정상 회의가 열릴 것이고, 그녀는 생애 최초로 대표 600명 앞에서 연설하게 된다. S/S 쇼가 이때 비로소 펼쳐질 것이고, 귀빈들은 그 후 며칠 동안 서로 대화를 나누고, 파티와 만찬에 참석할 것이다. “귀빈들에겐 좋은 일이죠.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델핀이 말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델핀과 큰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몇 블록쯤 걸어 디올 부티크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음 날 심포지엄에 참석할 귀빈들이 환영주를 나누고 있었다. 델핀을 놀라게 한 것은 마리아 그라치아의 평정심이었다. 존 갈리아노나 라프 시몬스라면 런웨이 쇼 전날 밤까지 이것저것 고치느라 허둥지둥했을 텐데, 마리아 그라치아는 그들과 달리 마무리 시간을 딱 지켰다. 나중에 마리아 그라치아가 이렇게 말했다. “나뿐 아니라 저와 일하는 사람 모두가 워라밸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에서 하는 저녁 식사가 소중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스챤 디올은 1947년 몽테뉴가 30번지(약칭 트렁트 몽테뉴)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이곳은 증축 리모델링을 거쳐 2022년 3월 부활을 알리며 재개장했다. 회사의 빠른 확장을 알리는 신호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의 스토어 디렉터가 이곳에 모였다. 델핀이 “회사의 심장이자 정신과도 같다”고 부르는 이들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 갖는 모임이었다. 디올은 그 후 6,600여 개 일자리를 창출했다. 하우스의 상징 같은 레이디 디올 백은 100만 개를 판매했다. 대표들은 이곳에서 장엄함과 새로움이 교차하는 감정을 느끼며, 목표 매출에 집중할 힘을 얻어갈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 40여 개 언어가 오갔다. 델핀은 불과 몇 분 사이 미국, 멕시코, 남부 유럽, 일본 대표단을 찾아가며 인사를 나눴다. 팔리는 물건과 팔리지 않는 물건이 무엇이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유명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경쟁 브랜드를 물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질문도 있었다. 레이디 디올 백의 성적은 어떤지, 레이디 디올 백의 판매가가 전 세계적으로 올랐는데 시장가에 비해 너무 비싸진 것은 아닌지 궁금할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환호성과 함께 셀카를 찍는 무리가 있어 디올 동문회를 방불케 했다. 피터 마리노의 설계로 막 지은 유리 계단에 한국 대표단이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델핀은 함께 찍자는 그들의 요청에 흔쾌히 무리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몇 주 후 나는 델핀과 몽테뉴가 근처 ‘르 스트레사’라는 가족 경영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패션과 영화 애호가들이 선호하는 곳이며, 특히 패션 위크에 모델과 주요 인사로 붐비는 장소다. “여기는 정말 편안해서 좋아.” 델핀이 업무 중인 동생을 반기며 말했다. 우리는 조금 전까지 디올 아카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벼룩시장에서 구출한 빈티지 슈즈, 크리스챤 디올과 이브 생 로랑 스케치 원본으로 가득한 서랍장 앞에서 한숨을 쉬어가며 1시간을 보냈다. 델핀은 가끔씩 그러하듯 운전기사에게 산책하겠다고 말했다. 델핀의 옷차림은 평소와 같이 길고 우아했다. 크림색 부클레 크롭트 재킷 아래로 CD 로고 단추가 달린 검은색 모직 바지와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와 관련된 흰색 글씨의 슬로건 티셔츠가 있었다. 카프레제와 미네스트로네를 주문한 그녀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듯 말 듯한 선을 유지하며 대화를 이었다.
델핀 아르노의 대화법에는 독특한 맛이 있다. 다정다감하지만 어딘가 조용한 구석이 있다. 그녀와 대화를 몇 번 나눠봤지만, 나의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에서 오만이나 과묵함의 기미를 발견할 수 없었다. 델핀은 인터뷰하는 내내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세상을 보여주는 데 인색한 것도 아니었다. 본인의 생활사에 초연한 듯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순 없었다. 아마 겸손한 성품 때문일 것이고, 그게 예의로 나타나는 것일지 모른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아르노 가문 사람들이 근면 성실할 뿐 아니라 매너가 매우 좋다는 평판을 들을 수 있었다. “누나의 절도는 제가 봐도 감탄할 정도예요. 누군가는 오만하다고 오해할 겁니다. 누나는 신중함을 타고났는데 교육으로 더 다듬어졌죠.” 앙투안 아르노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델핀의 행동에는 사려가 늘 배어 있다고 한다. “스물다섯에 그러면 수줍음이라 하고, 쉰에는 성숙함이라 말하죠.” 델핀은 남들을 칭찬할 때 가장 활기를 띠었다. 그 대상은 그녀가 소유한 작품의 창작자가 되기도 했고, 디올 매장 어시스턴트로 수십 년 동안 일해오다 최근 발 부상을 입은 직원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존경심도 뒤처지지 않는다. 나와 대화를 나눈 어떤 사람은 “부녀가 서로 깊이 존중한다”고 평했다.
나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속 메이지에게 사촌이 있다면 딱 델핀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메이지는 이혼한 부부의 맏이로 어른들이 무시하는 대상을 진지하게 고찰하는 조숙한 인물이다. 디올에서 델핀의 멘토링을 담당하는 시드니 톨레다노(Sidney Toledano)도 그녀의 절도를 인정했다. 그는 뜻 모를 말도 남겼다. “쉽지 않은 삶이었을 거예요.” 델핀이 열여섯 살에 아버지와 찍은 사진을 보면 둘이 많이 닮았다. 당시 그녀는 이미 아버지와 키가 비슷했음에도 열두 살에 더 가깝게 보이는 귀여운 외모였다. “우리는 베르나르가 LVMH를 건설할 때 델핀이 10대였다는 사실을 망각하죠. 베르나르는 딸에게 훌륭한 스승이었어요. 델핀은 회사와 함께 성장한 거죠.” 크라비스가 말했다.
“저는 반항해본 적이 없어요.” 델핀이 몇 번쯤 들어봤을 질문에 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가족 중에 해리 왕자와 같은 사람이 있는지 묻자 그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라고 말했다. 델핀의 친구들도 그녀가 다른 야망을 품은 모습을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델핀은 아버지를 닮아 팔릴 물건에 대한 본능이 강하다. 이 중 일부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합리적이기만 할 수는 없어요.” 그녀가 털어놓았다. 실은 점심 식사 중 델핀이 업무의 어려움을 한 가지 고백했는데, 이는 사람을 고용할 때 상대에게서 자신과 같은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재능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식탁에 가방 15개를 놓으면, 팔릴 것만 콕 집어내시는 분입니다.” 델핀의 목소리에 감탄이 묻어나왔다.
델핀은 확실히 경청하는 성품을 타고났다. “언제나 귀를 열어두죠.” 한 친구의 평이다. 딱히 부각되지 않는 이런 미덕이야말로 그녀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남성 위주의 LVMH 사회에서 그녀가 특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창의적인 인재 지원에 누구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델핀은 젊은 디자이너를 위한 상을 제정하는 등 인재 발굴의 뜻을 숨김없이 드러내왔다. 디올 하우스에 위기가 온다면, 빛을 잃어가는 창의력이 그 원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델핀의 경영 방침에 독단은 있을 수 없다.
베르나르 아르노는 냉철하고 근면한 경영 습관과 아버지와 같은 단호함으로 ‘캐시미어 늑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2022년에 LVMH 이사회를 설득해 CEO 및 회장의 정년퇴직 연령을 75세에서 80세로 높였다. 따라서 다섯 자녀를 도울 기간이 5년 늘었다. 자녀들은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동의하지 않는 한 향후 30년 동안 회사 지분을 매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후에는 지분이 아르노 직계 자손에게 넘어간다. 남매간은 가식 없이 사이가 좋다는 증언이 지배적이지만, 우애의 잠재적 취약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르노는 기존 오너 일가의 분쟁에 놓였던 회사를 흡수해왔다.
물론 베르나르는 자식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LVMH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최근에는 <뉴욕 타임스>에 “강제된 것도 아니고, 예정된 것도 아님”을 밝혔다). 결국 남매 중 누군가는 그의 자리에 도달할 것이다. 그게 누가 될지에 대해서는 얼마나 그 자리를 원하는지 여부도 고려된다. 아르노는 이를 콕 집어 성직에 비유했다. 아버지이자 현장 지휘자인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몽테뉴가 22번지 LVMH 본사 꼭대기 층에서 자녀들과 함께 90분간 미팅 겸 점심시간을 갖는다. “우리는 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업무를 관찰해왔어요. 회사 전략을 논하면서 거기에 따른 질문을 던지셨죠. 노하우 전수에 늘 진심이셨어요. 매입할 회사를 신중히 고르려면 공이 많이 들어가죠.” 델핀이 말한다.
LVMH(루이 비통, 모엣 & 샹동, 헤네시)는 70여 개 브랜드를 보유한 회사이자, 델핀에 따르면 “유럽 시장의 선두 주자”다. 아닌 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명품 기업으로 패션 브랜드뿐 아니라 호텔, 와인 농장, 세계적인 미술관, 이윤을 꽤 많이 창출하는 샴페인 브랜드까지 아우르고 있다. 제국에서 디올이 차지하는 위상은 상징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LVMH 운영의 41.4%를 차지한다. 디올은 과거의 영광뿐 아니라, 국가 홍보대사 역할도 짊어진다. 베르나르는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을 위한 기부금으로 2억 유로를 약속했으며, 올해 파리 올림픽을 위해 무려 1억5,000만 유로를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 경제학자들은 그의 영향력을 국가원수 이상으로 평가한다. 그의 딸 또한 더 조용한 방식으로 프랑스의 학교에 기부한다. “교육과 관련해서 많은 일을 해요.” 내가 델핀의 가치관에 대해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아이들의 재능을 살려주는 학교를 몇 군데 알고 있어요. 머리는 정말 똑똑한데 학비를 낼 수 없는 학생들이 있죠.” 델핀은 좀처럼 이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평등’을 원칙으로 세운 국가에서 아르노 왕조의 부는 종종 적대감의 표적이 되곤 했다. 지난해 4월에는 시위자들이 법적 퇴직 연령에 대한 장기 파업의 일환으로 LVMH 본사에 최루탄을 터뜨렸다. 델핀은 당혹감과 슬픔을 숨기지 않았다. 직원들의 안위부터 걱정했다. “LVMH에 대한 공격은 부당했어요. 시위자들은 철도 직원들이었어요.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쳐들어와서 폭력을 행사했어요. LVMH 본사에 직접 왔다는 게 참 소름 끼치죠. 갇힌 직원들은 최루탄을 들이마셔야 했어요.” 델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셰익스피어 희곡과 같은 베르나르의 삶이 세계인의 흥미를 끌고 있을지 몰라도, 프랑스 법으로 그의 재산 분배 방식은 식상한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자녀들에게 자산을 상속하고 싶지 않더라도 제도적으로 반드시 상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일인 자에 등극할지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지 않는 와중에도, 정작 아르노가 사람들은 가족보다는 국가에 더 큰 관심을 둔다. 누가 프랑스 역사에 이바지할 것인가? 누가 프랑스 경제의 미래를 책임질 것인가?
델핀은 디올 CEO로서 유산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다. 독특한 회색과 백색 조합, 타원형 등받이 의자, 뉴 룩의 오마주, 본사 주변 길거리 지도가 프린트된 원단 등 디올의 모든 것이 제품 하나를 사면 역사의 한 부분을 소유하게 되는 셈이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마리아 그라치아는 디올에 첫 출근하던 7년 전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곳이 생각과 달리 여느 패션 브랜드와 같지 않음을 깨달은 당시를 떠올렸다. “파리에서 디올은 단순한 브랜드가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파리 역사를 넘어 프랑스 역사의 일부니까요. 저는 이탈리아 사람이라 이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패션과 이 정도로 관계를 맺지 않거든요.” 마리아 그라치아가 말했다. 세계를 순회하는 전시 <크리스챤 디올: 꿈의 디자이너>, 그리고 크리스챤 디올의 자서전 <디올 바이 디올>(델핀이 최근 그를 본받기 위해 다시 읽은 책이기도 하다) 재출간이 이를 뒷받침한다. 몽테뉴가 30번지에는 증축으로 디올 갤러리가 추가되었으며, 이곳에는 1950년대 디올 창립 시절의 모델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막 떠난 듯한 피팅 룸이 전시되어 있다. 무슈 디올이 길가에서 주워 부적처럼 여겼던 별 모양 금속 조각도 고대 로마의 유물인 양 유리창 뒤에 전시되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인 이름 하나를 대라면 디올이 거론될 거예요.” 델핀 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일상이 공부와 운동 위주로 돌아갔어요. 건강과 평화를 챙겼죠. 우리는 자주 외출하지 못했어요. 아주 갇혀 지낸 것은 아니지만, 나가더라도 업무 견학이 대부분이었죠.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할아버지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아버지가 토요일 아침 사무실로 나가면 할아버지도 같이 일했어요. 저도 가끔 같이 있었고요.”
베르나르는 프랑스 북부 루베의 건설업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크리스챤 디올이 뉴 룩을 출시한 해에 결혼했고, 3년 뒤에는 그의 외조부가 아버지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델핀이 태어났을 때 베르나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당시 그의 첫 번째 부인 안 드와브랭(Anne Dewavrin) 역시 프랑스 북부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1970년대 분답게 기다란 스커트와 부츠 차림이었어요. 셀린느 스타일에 가까웠죠.” 델핀이 어릴 적 루베에 살던 시절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크라비스에 따르면 델핀과 그녀의 동생 앙투안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베르나르는 저녁 식사 전에 자녀들의 수학 공부를 도와준 것으로 유명하다. “특권이 많을수록 증명해야 하는 것도 많은 법이에요. 그게 프랑스의 육아법입니다.” 델핀의 친구이자 그녀에게 첫 유화를 팔았던 갤러리스트 알민 레쉬(Almine Rech)의 말이다. 다른 남매가 그렇듯 델핀과 앙투안 사이에는 다툼이 많았다. 다만 델핀은 맏이로서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델프(Delph)’는 학구열이 높았고, 특히 수학과 경제학에 큰 흥미를 보여왔다. 어찌나 품행이 발랐는지 열여섯 살에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울 때, 이를 발견한 앙투안이 놀랄 정도였다. 델핀은 잔머리 쪽으로는 영 젬병이라고 밝혔다. “픽셔너리 게임을 하고 싶어도 아무도 안 놀아줬어요!” 그녀는 테니스도 아주 좋아한다. 성인이 되어서 로저 페더러 부부와도 승부를 겨뤘지만, 그때 한 것은 패들테니스였다. “누나가 노력을 많이 하는 건 사실인데 윌리엄 자매보다 재능이 떨어지는 것은 인정해야죠!” 앙투안이 가볍게 웃었다. 아르노가 자녀들은 승부욕을 배우며 자라왔다.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거죠, 뭐. 물론 언제나 상대방을 최대한 배려하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지만.” 델핀이 말했다. “참 피곤하겠어요”라고 내가 말하자 델핀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피곤해요!”
그녀는 미국 뉴욕주 뉴로셸에 3년 머물던 시기를 각별히 여긴다. 부담에서 자유롭던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버지가 미국에 가족의 부동산 업체 지부를 세우려던 때였다. “프랑스계 미국 학교에 다녔어요. 그러니까 수업의 절반이 프랑스어, 절반이 영어로 진행되었죠. 미국 학교에서는 압박감이 덜했던 것 같아요. 참 즐거웠죠.” 가족은 델핀이 열 살 되던 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때 이미 2개 국어 능통자였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기업 하나를 인수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디올이라는 회사를 계열사로 두고 있는 기업이었다. “아버지의 애착이 남달랐어요.” 델핀이 말했다. “일찌감치 예상하신 거죠. 디올이 전 세계인이 갈망하는 브랜드가 될 거라고. 루이 비통도 함께요!” 그녀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당시 디올의 기존 모기업은 파산을 선고했다. 델핀에 따르면 그때 “디올 매장의 수가 다섯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245개에 이른다. 베르나르는 델핀을 곧장 몽테뉴가 30번지로 데려갔다. “완전히 압도되었죠. 디올 하우스에 도착한 소녀로서 정말 황홀한 기분이 들었어요. 드레스며, 가방이며, 모자며… 꿈을 심어주는 곳이었죠.” 이만했으면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을 듯하다. 이런 나의 의견에 그녀는 재빨리 아르노가 사람다운 겸손함을 발휘하며 선을 그었다. “얘기 안 했어요.”
그때의 디올 방문이 앞으로 길게 이어질 인연의 첫발이었다. 베르나르는 그 후로도 자녀를 토요일마다 매장에 데려갔다. 오늘날 델핀과 다니는 출장의 시초였던 셈이다. “올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와 아시아에 가면 일주일 내내 매장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죠.” 출장은 연예인 투어와도 같다. 아르노는 중국에서 군중에게 둘러싸이기 일쑤다. 델핀은 최근 출장을 떠올리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도시 5곳에서 매장 250개를 방문했어요. 하루 평균 1만5,000보를 걸었죠. 35도 날씨에 16시간을 서 있었어요. 아버지는 쉬는 법이 없어요. 어릴 때는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죠. 업무에 그만큼 열정을 쏟았다는 거잖아요.”
델핀의 부모는 그녀가 열다섯 되던 해에 이혼했다. 이후 베르나르는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엘렌 메르시에(Hélène Mercier)와 재혼했다(베르나르는 클래식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녀들 또한 피아노를 배우며 자랐다. 다만 델핀은 피아노에 대해서도 영 소질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아르노와 메르시에 사이에 세 아들이 태어났다. 알렉상드르(Alexandre), 프레데릭(Frédéric), 장(Jean)이다. 특히 넷째와 다섯째는 장차 영부인이 될 브리지트 마크롱의 문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델핀은 그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델핀의 자녀들에게 외할머니인 드와브랭은 릴리안 베탕쿠르(Liliane Bettencourt)의 자산 관리인이었던 파트리스 드 메스트르(Patrice de Maistre)와 재혼했다. 앙투안은 델핀을 “이타적이고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어머니와 같다”고 평했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인 특유의 ‘아르 드 비브르(Art de Vivre)’와 가족관을 실천하죠.”
델핀은 런던 경제대와 릴의 경영대로 진학하기 이전인 열일곱에 디올에서 향수 판매를 담당했다. 그녀는 열여덟에 처음으로 루이 비통 ‘노에’ 계통 백을 가져보았다. 델핀은 졸업 후 맥킨지에서 몇 년간 일했지만, 가업의 운명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다. “디올이 천직이었던 셈이죠.” 톨레다노의 평이다.
델핀 아르노의 유머에는 아이러니가 살아 있다. “기발한 위트가 있죠. 그렇다고 상대방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은 아니에요.” 가고시안의 평이다. 델핀은 멀리 내다보는 비전, 섬세한 대화법, 장난기 어린 미소로 오랜 협력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녀는 현대미술 애호가로서 관련 예술가들을 적극 기용해왔다. 델핀은 리스크에 대한 담력이 크면서도, 충동이나 직감에 의존하는 다른 수많은 패션계 종사자와 달리 신중하고 분석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편이다. 그녀의 매끈한 외모 뒤에는 뛰어난 직업 정신과 위트가 숨어 있다. 레쉬는 아르노 가족이 북부 프랑스 출신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니까 그녀 말로는 사실상 영국 스타일 유머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델핀은 2000년에 졸업하고 LVMH 관련 첫 직장에서부터 존 갈리아노와 일했다. 당시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갈리아노는 디올에 근무하는 와중에 파리 11구의 오래된 인형 공장에서 자신만의 JG 브랜드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곳이 델핀의 출발점이었다. 그녀는 당시 브랜드의 시각적 정체성을 검토하던 중 갈리아노에게 그래픽 디자이너, 제조사, 공급사를 소개해주었다. 갈리아노는 그녀가 상대의 필요를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이러니 그 자체였죠. 프랑스에서는 이런 게 늘 통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솔직히 델핀이 데려온 분들이 딱 적임자였어요.” 갈리아노의 잭러셀테리어가 새끼들을 낳자 델핀이 한 마리를 입양했다.
델핀이 이탈리아 와인 재벌 가문의 상속자 알레산드로 발라리노 간치아(Alessandro Vallarino Gancia)와 2005년에 결혼식을 올리자 갈리아노가 그녀를 위해 제작에 1,300시간이 들어가는 동화와도 같은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했다. “재밌었어요. 피팅이 참 요란했죠. 그 많은 사돈들이며, 친어머니며, 그 밖의 어머니며…” 갈리아노가 회고했다. 피로연에는 정계, 재계, 영화계, 패션계 등의 여러 인사를 비롯해 수백 명이 참석했다. <르 몽드>에서 ‘VIP의 올림포스 모임’으로 불리던 그 행사는 델핀의 아버지가 소유한 샤토 디켐(Château d’Yquem)에서 진행되었다. <파리 마치>에서는 표지와 함께 이에 대해 22쪽짜리 기사를 실었다. 결혼 생활은 5년으로 끝났다.
갈리아노가 낯선 사람들에게 반유대적 발언을 해서 퇴출된 2011년 당시 델핀은 디올을 운영하지 않고 있었다. “침실에 있는데 아버지 비서가 들어와서 갈리아노의 체포 소식을 알렸어요. 정말 충격적이었죠. 그는 용납될 수 없는 단어를 사용했어요.” 델핀이 분노보다 슬픔에 가까운 표정으로 회상했다. “하우스 입장에서 참 힘든 시기였어요. 하지만 그런 사건이 있어야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죠.”
델핀이 현재의 동거남 자비에 니엘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그 사건이 있기 1년 전부터였다. ‘프랑스의 스티브 잡스’로 종종 불리는 니엘은 테크 억만장자로 프랑스에 인터넷 서비스를 공급하는 통신사 ‘Free’를 창립한 사업가이자 <르 몽드> 공동 소유주다. 델핀이 아버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 현재 그녀의 인생관에 가장 공감하는 사람은 니엘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수성가한 인물로 새로운 인재 발탁에 투자를 아끼지 않기에 프랑스에서 영웅처럼 대접받고 있다. 니엘이 설립한 비즈니스 인큐베이터 ‘Station F’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스타트업 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세운 에콜42는 학비 없이 다닐 수 있는 혁신적 컴퓨터 과학 교육기관이다.
니엘은 열아홉 살에 학교를 자퇴하고는 스물네 살에 지극히 프랑스적 방식으로 100만 유로의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랑스 인터넷의 선두 주자였던 미니텔의 사용자를 위한 섹스 채팅 서비스를 개발한 것이다. 스냅의 공동 창립자이자 CEO 에반 스피겔(Evan Spiegel)은 그를 “놀라운 친구이자 멘토”로 여긴다. 스피겔은 20대 초반에 파리에 있는 아르노·니엘 커플의 풀 하우스에 머문 일이 있었다. 그가 니엘과 거리를 거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말을 걸었다. “그가 프랑스를 위해 한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더라고요.” 스피겔과 아내인 미란다 커는 풀 하우스 바로 옆에 주택을 매입했다. 델핀과 자비에에게는 열한 살 난 딸 엘리자와 일곱 살 난 아들 조셉이 있다(니엘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 델핀은 어머니가 되고 시야가 넓어졌다고 말했다. “세상의 연결 고리가 눈에 보이죠.” 레쉬가 내게 한 말이 있다. “어머니로서 굉장히 사려 깊은 분이죠. 아들을 임신했을 때 기뻐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군요. 사무실 출근을 못하는 몇 주 동안에도 학교에서 엘리자를 픽업하는 일은 꼬박꼬박 챙겼죠.”
델핀은 갈리아노가 떠나기 몇 년 전에 디자이너 한 명과 친해지기도 했다. “몰래 여러 차례 만났죠. 지금 생각하니 웃겨요. 파리는 대도시인데 정말 좁거든요.”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회상했다. 그는 발렌시아가 소속이었고 델핀은 디올의 상무였다. 그녀는 시선을 넓혀 인재를 영입하는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제스키에르는 일자리 제안을 받았지만 직장을 옮길 마음이 없었다. 몇 년 후 루이 비통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도 처음에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델핀도 같은 곳으로 이직한다는 점이 알려지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때 마음이 바뀌었어요.” 제스키에르는 델핀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다.
루이 비통 재직 초기에는 수작업이 참 많았다. “시제품을 직접 오리고, 작업장에 가져가고, 새 시제품을 제작했죠. 사람들은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델핀은 저와 늘 함께했어요. 월요일에 모나코 공주와 점심 식사를 하며 루이 비통 프로젝트 얘기를 나누고, 화요일에는 스튜디오 바닥에 주저앉아서 가방 시제품을 오렸죠. 그땐 정말 즐거웠어요.” 제스키에르는 델핀과 함께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던 그 무렵을 기억했다. 제스키에르는 델핀이 소개해준 사람들과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는 그녀가 업무 효율뿐 아니라 “구성원의 심리적 안정감을 고려해 팀을 짜주었다”고 말한다. 델핀이 10년 전 LVMH상을 제정한 것도 그에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인재 헌팅과 지원 능력은 그때도 빛을 발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게 있죠. 바로 미래에 대한 델핀의 비전입니다.” 제스키에르가 말했다.
제스키에르는 델핀의 옷을 코디해주면서 그녀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델핀은 10년 동안 매일같이 그의 옷을 입으며 감상평을 남겼다. 제스키에르는 이에 고무되어 ‘길이, 재료의 질감, 구조 등에 걸쳐 수많은 변화’를 실천했다. 그는 옷이 감정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무력하다는 기분이 들면 보호막을 칠 것이고, 자신감이 넘치면 그런 게 필요 없겠죠.” 이런 점을 십분 이해하는 CEO라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델핀이 여자로서 강점을 갖는 이유다.
파리 16구에는 델핀 아르노와 자비에 니엘 커플의 저택이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원형 현관 로비를 바로 마주하게 된다. 1층에는 모서리가 둥근 방과 꽃 장식, 정원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유리문 한 쌍이 있다. 이 공간은 곧장 아늑한 기분을 안겨준다. 내가 지난해 가을 어느 날 저녁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직원 한 분이 내 코트를 받자마자 델핀이 응접실에서 종종걸음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녀의 따뜻한 환대에는 위엄과 평정심이 배어 있었다. 델핀은 사무실에 하루 종일 있다 온 뒤였을 텐데도 마리아 그라치아가 디자인한 검은색 플루이드 수트를 입고 있었다. 통 넓은 실크 벨벳 바지, 앞에 벨벳을 덧댄 더블 브레스트 재킷이 허리에 착 달라붙으면서도 잠옷 같은 편안함을 풍겼다. 거기에 하이힐까지 신으니 탑과 같은 키로 손님들을 왜소해 보이게 만들었다. 단 한 명, 세골렌 갈리엔(Ségolène Gallienne)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녀는 활발한 성품으로 다섯 살 때부터 델핀과 친하게 지내왔다. 쌍둥이처럼 닮은 둘은 디올 차림으로 소파에 다가앉았다. 세골렌은 허물없는 친구답게 델핀의 무릎에 양손을 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세골렌과 델핀은 둘이 여름휴가를 보내곤 하는 생트로페에서 같은 수영 수업을 들으며 처음 만났다. 고인이 된 세골렌의 아버지 알베르 프레르(Albert Frère)는 베르나르 아르노와 함께 와인 제조사 샤토 슈발 블랑의 공동 소유주였다. 둘은 가족끼리 어울리던 저녁 모임을 추억했다. 알렉상드르는 나이트클럽에서 디제잉을 했고, 여자들은 테킬라를 마셨으며, 칼 라거펠트는 분위기를 주도했다. “좋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죠.” 가고시안은 델핀의 그런 점을 높이 샀다. 레쉬는 델핀이 자신에게 너무 엄격해 아무리 늦잠을 자더라도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개인 트레이너와 하는 운동을 빼먹지 않는다며 혀를 내둘렀다.
손님들이 가볍게 식전주를 마시는 동안 엄마를 닮아 키가 큰 엘리자가 청바지와 초록 티셔츠 차림으로 응접실을 왔다 갔다 했다. 벽면에는 신디 셔먼, 무라카미 다카시, 헨리 테일러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집 안 곳곳에 생 로랑 시절 디올 하우스의 의뢰로 라란 부부가 제작한 금속공예 가구가 즐비했다. 정원에는 프랭크 게리와 우고 론디노네의 조각상이 있었다(루이 비통 재단이 전시용 미술품을 수집하는 반면, 델핀은 집에 들이고 싶은 작품을 구매한다). 화가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도 집에 자주 놀러오는 손님 중 한 명이다. LA 상공을 표현한 그의 유명한 유화가 만찬 테이블 위로 걸려 있다. “정말 편안한 곳이에요.” 그가 말했다. 정치에 비판적이지만 크게 성공한 브래드포드는 LA 중남부 토박이다. 그는 델핀을 소울푸드 식당에 데려가주겠다며 한바탕 웃었다(“별일 있겠어요!”). 브래드포드는 말을 이었다. “델핀이 명문가 출신이라도, 그 점은 우리끼리 담소를 나누는 데 아무 상관이 없죠. 이들 가족에게는 애정이 가득해요. 보기만 해도 따뜻한 이불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날 저녁에 모인 손님은 11명이었다. 이 중에는 델핀과 협력한 이력이 있는 예술가 에바 조스팽(Eva Jospin)과 장-미셸 오토니엘, 큐레이터이자 가구 디자이너 겸 사진가인 브리지트 라콩브(Brigitte Lacombe)도 있었다. 손님들은 조명이 은은하게 켜진 작은 식당으로 모였다. 중앙에는 보라색 칼라 꽃과 적갈색 잎을 장식해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났다. 유리 접시에는 디올 모티브의 은방울꽃을 표현한 수작업 그림이 있었다. 직원들이 조심스럽게 소금에 절인 생선, 입에서 녹는 스테이크, 캐러멜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구운 사과, 작은 초콜릿으로 쌓은 탑을 내왔다. 훌륭한 파리 미술 전시회로 무엇이 있는지, 자기 고향이 어디인지, 이브 생 로랑의 말년이 어땠는지, 라거펠트가 얼마나 책을 많이 읽었는지, 크리스챤 디올이 코코 샤넬보다 따뜻한 성품을 지녔기에 디올이 여전히 각광받는 것이라든지 등 다양한 주제로 대화가 오갔다.
델핀과 동거남은 서로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는 법이 없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스킨십이 여러 차례 오가기도 했다. “자비에를 누구보다 격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델핀일 것이고, 델핀을 누구보다 격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비에일 겁니다.” 브래드포드가 말했다. 그들은 어느 한쪽이 관심을 독차지하는 다른 커플과 다르다고 한다. “자비에가 얘기할 때 델핀이 미소를 짓고, 델핀이 얘기할 때 자비에가 미소를 지어요. 정신적으로 매우 건전해 보이죠. 둘의 모습에서 딱 표가 나요.” 둘은 복도에 나란히 서서 손님들을 배웅했다. 완전히 작별하는 순간까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손님들은 대문과 경비원들을 지나 파리의 밤거리로 나섰다. (VK)
- 포토그래퍼
- Annie Leibovitz
- 글
- Gaby Wood
- 스타일리스트
- Tonne Goodman
- 헤어
- Braydon Nelson
- 메이크업
- Francelle D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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