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시선과 과학자의 태도로 그려내다, 토마스 루프 개인전
동시대 사진계 거장으로 손꼽히는 토마스 루프(Thomas Ruff)의 한국 개인전이 PKM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2004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별(Sterne)’을 보며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는 작가의 어린 시절 꿈을 상상한 적 있는데요, 벌써 20년 전이라니 믿기지 않는군요. 어쨌든 그가 이렇게 현대 사진 예술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는 특유의 실험적이고도 추상적인 이미지가 사진 예술의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루프의 작품은 언뜻 사진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회화 같기도 하고, 컴퓨터 그래픽인가 싶기도 하죠. 즉 화가가 붓과 캔버스를 주된 도구로 삼듯, 그는 카메라를 도구로 활용할 뿐입니다. 그렇게 혁신적인 주제와 방식으로, 아예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초현실적인 풍경을 펼쳐냅니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 처음 소개된다는 연작 ‘d.o.pe'(2022~)는 토마스 루프가 사진을 철학자의 시선과 과학자의 태도로 탐구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런 그에게 영감을 준 건 올더스 헉슬리의 <지각의 문>입니다. 헉슬리는 이 자전적 에세이에서 인간이 화학적이거나 생체적인 반응으로 의식을 확장하고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고 보았죠. 헉슬리의 철학을 이미지로 펼쳐 보이겠다고 작정한 듯, 루프는 자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도 발견되는 프랙털 구조를 가져와 사이키델릭한 형태로 투사합니다. 그 결과 정말이지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유사하고도 반복적인 유닛이 자그마치 최대 290cm 길이의 거대한 융단 위에서 장관을 이루고, 물리적인 촉감을 강조하는 몽환적인 이미지가 일종의 초월감을 선사합니다. 이쯤 되면 만들어진 현실과 진짜 현실, 자연과 인공, 사진과 사진이 아닌 것 등의 차이는 무의미해지죠.
지난 40여 년 동안 토마스 루프는 ‘Portrait’, ‘Nudes’, ‘Substrate’를 비롯해 약 25점의 굵직한 연작을 발표해왔습니다. 고전적인 초상 사진부터 인터넷에 떠도는 데이터를 수집, 편집한 이미지, 인공위성에서 전송받은 형상, 알고리즘으로 자동 생성된 디지털 이미지까지, 매번 기술과 생각의 한계를 궁금하게 만드는 작업이었죠. 세상의 모든 이미지가 이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진실을 추상적으로 나타내는 듯했습니다. 보는 이를 끝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이 사진을 과연 사진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물론 그는 이미 오래전 아날로그와 디지털, 현실과 비현실의 케케묵은 경계를 뛰어넘은 주인공입니다. 루프의 총천연색 세상을 보고 있으니 그가 특유의 상상력과 기술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시각 혹은 보는 감각 자체를 진화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모든 이미지는 결국 우리의 뇌 속에 있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내내 기억에 남을 만한 강렬한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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