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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여행법

2024.03.14

한국인의 여행법

나는 동남아 휴양지인 발리에 산다. 이웃은 거의 관광산업 종사자다. 이런 곳에 살다 보니 자연스레 인식되는 한국인만의 특성이 있다. 나를 포함한 얘기다. 물론 여행 방식에는 각자의 성향, 취향, 체력, 언어능력, 생활양식, 인생관, 경제관념, 위기 관리법, 심지어 두려움까지 개입되므로 다양한 예외가 존재한다. 이건 짧은 휴양 여행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 한국인에게서 유독 빈번히 발견되는 특징일 뿐이다. 우리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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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국인은 휴가가 짧다. 이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가서 슬슬 탐색해보고 뭘 할지 결정한다’는 태도는 용납될 수 없다. 특히 발리를 처음 방문한 여행자라면 여행 자체가 휴양이 아닌 답사가 되어버린다. 닷새 여행에 우붓 가서 요가하고 짱구 가서 서핑하고 길리 가서 다이빙하고 누사두아 럭셔리 리조트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려면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빨리빨리 정신과 효율 강박이 결합한다. 그러니 숙소와 프로그램은 모두 예약하는 게 기본이다. 4인 이상 그룹 여행쯤 되면 엑셀 파일이 등장한다. VIP 의전이라도 하듯 시간대별 목적지, 이동 방법, 소요 시간을 상세히 기록해서 공유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평소 혼자 여행 다닐 때는 초반 숙소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현지에 가서 상황을 보고 결정하는 식이지만 지인 3명이 한꺼번에 방문했을 때는 우왕좌왕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1안, 2안 나누어서 엑셀 파일을 만들었다. 이런 점을 보면 ‘극J’가 한국의 국민성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꼼꼼한 준비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존재한다. 여행지에서도 항상 새것처럼 깨끗한 옷을 입고 뽀얀 얼굴로 돌아다니는 게 한국인이다. 그건 좋다. 반면 “와보니 이 동네가 마음에 들어서 더 머물고 싶은데 다음 숙소를 예약해둬서 떠나야 해요”라든가 동선이 틀어져 예약을 취소하느라 고생하는 사람을 자주 볼 때면 안타깝다. 여행을 준비할 때 안구건조증이 올 정도로 자료 조사를 하거나 온갖 디테일을 질문해서 현지 상담원을 피곤하게 만드는 ‘극J’ 인간들은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여기에는 또 다른 중요한 국민성이 개입한다. 규칙을 잘 따른다는 점이다. 어지간하면 “아, 여기 규정은 그렇군요?”, “어쩔 수 없지요”, “철저하게 준비 못한 제 잘못이지요” 하면서 관대하게 넘어간다. 면이 상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돈도 시원시원하게 쓴다. 발리에는 팁 문화가 없는데 희한하게 한국 허니문 정보 커뮤니티에는 정반대 정보가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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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커다란 트렁크에는 높은 확률로 고추장 튜브, 컵라면, 마스크 팩이 들어 있다. 모두 이곳 슈퍼마켓과 약국에서 구할 수 있지만 왜인지 필수 준비물로 소문났다. 한국인의 위생 기준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높다. 속옷 손빨래용 접이식 실리콘 대야, 브리타 정수기를 가져오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의외로 식품 위생 기준은 높지 않아서 거리 음식이나 작은 로컬 식당 음식을 겁 없이 먹다가 ‘발리 밸리’에 걸린다. 한국은 물자가 풍부한 나라다. 게다가 우리는 작은 선물 나누길 좋아한다. 경조사에 현금을 주고받을 정도로 마음이 가면 물질로 표현하는 게 한국인이다. 그들이 스치는 자리마다 헨젤과 그레텔의 빵 부스러기처럼 작은 여행용품, 미용용품, 식료품 등이 남는다. 일부러 선물하려고 짐을 넘치게 가져오기도 한다.

이 사랑스러운 비둘기 같은 인간들에게는 슬픈 특징도 있다. 바로 동족 혐오다. 아니, 그건 너무 비참하니까 예의범절 문제라고 해두자. 한국은 길거리 싸움을 시작하는 신호탄이 “뭘 봐”인 나라다. 타인과의 시선 접촉이 터부시된다. 외국 여행자들이 같은 언어권 출신이면 스스럼 없이 스몰 토크를 하다가 여행 파트너가 되는 것과 달리 한국인끼리는 우연히 마주치면 필사적으로 시선을 외면한다. 사람 많은 대합실이나 카페 같은 곳에 들어서면 다른 한국인들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단체, 1인 여행자, 친구 그룹은 나은데 이성 커플이면 특히 ‘가까이 오지 마. 우리 말 엿듣지도 마’라는 텔레파시가 강하게 발산된다. 그들은 한국의 뒷말, 참견, 평가, 서열 문화에 시달리다가 외국에 와서 모처럼 해방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방해하면 안 된다. 그런데 외국에 오래 살면 한국 예의범절을 깜빡할 때가 있다. 내가 낯선 한국인에게 말을 걸거나 미소를 지으면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이 인간이 뭔 약을 팔려고 그러나’라고 말하는 듯 싸늘한 눈빛, 혹은 그런 눈빛을 받을까 봐 매너를 지키고 있다가 상대의 유형을 식별하고 친절하게 화답하는 사람. 어느 유형이 더 많은지는 모른다. 그걸 탐색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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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국 여행자들은 대체로 서양, 특히 유럽 여행자에 비해 환경 인식이 뒤처진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고 아시아인 전체가 그렇다. 유럽인은 우리보다 큰 탄소 발자국을 남기고 발리에 온다. 그러니까 누구의 여행이 더 환경친화적인가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의식 자체에는 분명한 강약이 존재한다. 특히 발리처럼 환경이 가장 큰 자산인 여행지에서는 차이가 확연히 눈에 띈다. 유럽 여행자들이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보려고 물통을 지참하거나 대용량 생수를 구입해서 들고 다닐 때 한국 여행자들은 망설임 없이 자그마한 생수를 구입한다. 해양 스포츠를 즐기면서 선블록의 ‘리프 프리’라든가 ‘코럴 프리’ 마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한국인은 대개 SPF 지수를 더 중요하게 본다. 요가 동네 우붓에 가보면 스타벅스를 이용하는 외국인 중 대부분이 한국인과 중국인이다. 그곳이 한국인에게 꼭 가봐야 할 명소로 소개된 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붓에서 에어컨을 팡팡 틀어주는 카페가 거기뿐이었기 때문이다. 인공 테마파크나 동물원 고객도 주로 한국인, 로컬, 중국인이다. 물론 여행에는 정답이 없다. 어떤 방식의 여행이든, 나의 사랑스럽고 예의 바른 극J 비둘기 동족이 재밌으면 그걸로 됐다. 곧 봄이다. 올해도 당신에게 여행과 웃음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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