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김재훈에게 집이란 안식처가 아니다
사진가 김재훈에게 집은 궁극적인 안식처를 향한 여정의 한순간에 불과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노정은 그가 자신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진가 김재훈은 지난해 5월 구 러시아 공사관 근처 정동길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삼면이 통유리인 거실 창밖으로 덕수궁 돌담길과 시청역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건 지난해 말 복원 공사를 완료한 구 러시아 공사관 전망탑이다. 6·25 전쟁 당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된 공사관 터에 오도카니 남은 르네상스 양식의 하얀 탑은 러시아인 사바친(A.I. Sabatin)이 1890년에 설계한 것이다. “저 길은 고종의 길이에요.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과 덕수궁을 오갈 때 다니던 길이죠.” 역사적 과거를 소환하는 로맨틱한 풍경만으로 이 집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김재훈이 이 집을 선택한 건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집 안에서 건물 외벽이 보이고 구조물이 노출돼 있습니다. 보통은 창밖으로 맞은편 집이나 건물이 보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집은 우리 집의 다른 방이 보이거나 옆집 방이 보여요. 구조 자체가 특이해서 공간에 따라 전망이 매우 다양하죠. 그래서 날씨나 계절에 따라 다채로운 풍경을 즐길 수 있고요.”
현관으로 들어가 오른쪽 복도를 따라가면 처음 보이는 건 오른쪽의 널찍한 부엌 공간이다. 대리석 싱크대 위는 조리 도구와 커피 머신, 다구 세트, 인센스 스틱, 위스키병으로 빼곡히 차 있다. “위스키와 보이차를 함께 마시는 걸 좋아해요. 기분 좋은 취기가 잔잔하게 오래 지속되거든요.” 복도 끝에는 삼면이 유리로 된 거실이 있다. “아침이면 통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복도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죠.”
다시 입구로 돌아가 왼쪽 복도를 따라가면 오른쪽에 서재와 자그마한 홈 짐이 나타난다. 이 두 공간 역시 외벽이 통창으로 되어 있어 서재에서는 홈 짐이, 홈 짐에서는 서재가 들여다보인다(“친구가 며칠 머문 적 있는데, 각기 다른 공간에서 서로가 보이니 재미있더라고요”). 왼쪽 복도 끝은 드레스 룸이 딸린 침실로 이어진다. 풍부한 시야각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그림자가 깃든 이곳은 어스름하고 은밀한 오후를 닮았다. 그리고 고요하고 절제된 집주인의 사진과도 비슷하다.
어떻게 이 동네로 이사했는가?
스물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남동과 이태원에만 머물렀다. 그 지역에서만 열 번 정도 이사를 다녔는데 재개발 정비 사업 때문에 이주해야 했다. 당시 자주 방문하던 서촌과 부암동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지인에게 자문을 얻어 이곳으로 이사했다.
인테리어 컨셉이 명확해 보인다.
사실 컨셉을 염두에 둔 적은 없다. 가구에 대한 취향도 이것저것 써보면서 바뀌었다. 기본적으로 금속, 유리, 가죽 소재를 좋아하고 원목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취향이 반영된 게 지금의 인테리어인데 막상 완성하고 보니 집은 좀 편안하고 포근한 맛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거실 바닥이 검정 대리석이라 날씨가 추울 때는 더 썰렁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것들이 모여서 완성된 인테리어인가?
그런 셈이다. 사실 그동안 소파도 네다섯 번 정도 바꿨다. 지인이 미국에서 사용하던 크레이트&배럴(Crate&Barrel) 패브릭 소파를 얻어서 6~7년 정도 쓰다가 천이 다 해져서 산 게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LC2 3인용 소파였다.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제품이었는데, 실제로 사용해보니 등받이가 낮고 불편해서 잘 앉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소파는 팔고, 함께 산 LC2 암체어 그랑 콩포르(Grand Confort)는 계속 쓰면서(정말 편해서 한동안 이 의자에만 앉기도 했다) 폴 키에르홀름(Poul Kjærholm)의 PK22 의자를 두 개 샀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가죽이 좋고 안락해서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의자 세 개로 6개월을 지내다가 그래도 소파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비코 마지스트레티(Vico Magistretti)의 마라룽가를 주문했다. 6개월 만에 집으로 배달된 마라룽가는 안락하긴 했지만 커도 너무 컸고, 결국 2주 만에 작별을 고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이곳으로 이사 와 거실에 LC2 암체어 하나와 PK22 의자 둘, PK61 테이블을 두고 보니 뭔가 부족해 보여서 결국 폴 키에르홀름 PK31 3인용 소파까지 들이게 됐다. 만만치 않은 가격대라 원래는 살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 경험치도 쌓였으니 정착해서 평생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아직도 이 소파를 산 게 잘한 건지 의구심이 가끔 들긴 하지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아 사놓고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인테리어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었나?
거실에 TV를 두지 않는 것과 오디오 세트의 위치다. 거실에 TV가 있으면 내 시간의 대부분을 TV와 보내게 된다. 여자 친구가 와도, 식사할 때도 TV를 켜둔다. 아마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 생활 패턴이 싫었고, 오디오에 흥미가 있었기에 TV는 침실로 넣고 오디오 세트를 뒀더니 거실이 리스닝 룸이 됐다. 오디오 세트는 스승인 사진가 김현성의 추천을 받아 스피커와 앰프, CD 플레이어와 LP 플레이어를 각기 다른 브랜드 제품으로 조합했고, 금속 받침대는 친구인 공간 디자이너 조현석에게 의뢰해서 제작했다.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면 블루투스를 연결하고, LP판을 올리고, 앰프를 켜고, LP판을 뒤집는 등 온전히 음악을 듣기 위한 행위와 시간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여백의 공간과도 같은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만족한다.
곳곳에 놓인 작품이 공간과 잘 어우러진다.
수납장에 기대어 둔 큰 페인팅은 故 윤형근 화백의 2001년 작품이다. 2018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은 작가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과 흙을 밟고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지인의 집에 그의 작품이 걸린 걸 보고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기회가 되어 저 작품을 소장하게 됐다. 달항아리는 김동준 작가의 작품이다. 권대섭 작가의 제자로 요즘 활발히 활동하는 도예가 중 한 명이다. 달항아리는 실물 작품을 통해 감상할 수 있는 것들이 상당하다. 표면의 질감, 시간의 흐름이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와 표면의 빛반사 등 가변적인 심상은 정말 매력적이다. 두 작품 모두 이 집 거실을 떠올리고 구입했다. 그 외에도 이우환 작가와 이배 작가, 친구인 권철화 작가의 작품 등을 소장하고 있다.
작품도 가구도 위화감이 없어서 전부 오랫동안 갖고 있던 것처럼 보인다.
이사 오면서 새로 산 게 더 많다. 사실 요즘 물건에 관한 생각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물건이란 자신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질 좋은 제품을 선택하는 게 맞다는 걸 깨달았다. 새 제품을 사는 것도 점점 더 회의적이다. 가구든 차든 막 공장에서 나온 새 제품의 느낌도 그렇고, 깨끗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내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다. 빈티지 쪽이 마음도 편하고, 사용감이 멋스럽기도 하니까. 막 포장지에서 꺼낸 새 옷을 입었을 때 지나치게 깨끗하고 빳빳해 새 옷 티가 나면 별로인 것처럼.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 무엇인가?
음… 내가 제일 오래된 것 같다.
집이라는 공간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이 집에 살면서 가치관이 변했다. 혼자 사는 공간이 그렇게 클 필요도, 짐이 많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구, 오디오, 작품 등 이 집으로 이사하면서 소비를 많이 했다. 예전 집보다 넓은 편이라 사고 싶던 것도 사고 공간도 채우느라 그랬는데 막상 더 허한 느낌이다. 채운다고 해서 꽉 차 보이지도, 더 행복하지도 않은 기분이랄까. 작고 따뜻한 집이 더 편하고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물건을 소유하니 그 물건의 무게에 내가 짓눌리는 기분이 든다. 다음에 이사 갈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버거우니 말이다. 그래서 요즘 소비도 줄이고, 갖고 있는 옷 중 필요 없는 건 팔거나 나눠주면서 짐을 줄이고 있다. 몇 년 전에 예술의전당에서 르 코르뷔지에 전시를 본 적 있는데, 그는 생애 마지막을 작은 오두막 별장에서 지냈고 가구는 소박한 나무 상자가 전부였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나도 그 나이가 되면 그럴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고 나면 그런 욕망이 없어질 것 같은 기분? 나중에 또 바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음에는 어떤 곳으로 이사할 생각인가?
다시 한남동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지금까지 주로 빌라에 거주했는데 아파트의 커뮤니티 시설이 꽤 편리하다는 걸 알게 되어 집을 선택하는 기준이 더 까다로워질 것 같다. 이곳은 공용 시설도 사용할 수 있으면서 사람과 마주칠 일도 적으니까. 사람과 부대끼고 싶지 않다고 여기던 차에 얼마 전 건축가 유현준의 유튜브에서 본 내용에 크게 공감했다. 현대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은 앞집에 누가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그 사람도 나에 대해 몰랐으면 좋겠고, 서로 마주치지 않길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 사회이기에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할수록 이상적인 주거 환경이라고 말이다. 직업적으로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낯선 사람들과 불필요한 교류가 버겁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어쨌든 이 집에서 2년은 살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다음에 고민하려고 한다. (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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