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영이라는 드라마
배우 이보영은 <신의 선물>, <대행사> 등의 작품을 통해 ‘전문직 전문 배우’라는 수식을 얻었다. 현재 중반을 넘어선 <하이드>는 이 찬사가 단지 완벽한 수트 핏 때문만은 아님을 또 한 번 증명한 드라마다. 물론 수트 핏도 훌륭하긴 하다.
<하이드>는 시즌 3까지 제작된 영국 TV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만큼 탄탄한 이야기가 매력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빠른 전개에도 캐릭터의 일관성과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연출도 감각적이지만 과하지 않은 선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 시청률을 떠나 만듦새만 본다면 4월 주말극 가운데 가장 웰메이드다. 무엇보다 호감이 가는 대목은 여느 한국 드라마에서 찾아보기 힘든 합리적인 여주인공 캐릭터다.
주인공 나문영(이보영)은 전직 검사로, 법조계 명문가의 아들 차성재(이무생)와 결혼해 어린 딸을 두고 있다. 명목상으로는 남편과 법률 회사를 공동 운영하지만 실제로는 육아를 위해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성재는 어린 시절 문영이 아버지의 자살로 힘들어할 때 위로해준 친구다. 그만큼 성재를 향한 문영의 신뢰는 두터웠다. 그런데 어느 날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성재가 증발해버린다. 의뢰인과 증인은 성재에게 부정한 비밀이 있음을 암시한다. 알고 보니 법률 회사는 막대한 채무로 도산하기 직전이다. 아들을 애지중지하던 시어머니는 어째서인지 실종 신고를 막는다. 이내 성재가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되고, 사건을 추적하던 문영은 자신이 알던 세계가 완전히 허구였음을 깨닫는다.
<하이드> 초·중반 나문영의 활약은 속이 시원할 정도다. 친구이자 지역 검사로서 그를 공사 양면에서 조력하는 주신화(김국희)는 검사 시절 문영의 별명이 ‘울버린’, ‘칼잡이’였다고 전한다. 일 때문에 바빴음에도 시어머니가 아이를 유치원에서 픽업했다는 말에 버선발로 달려와 조아리는 문영의 모습은 평범한 며느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편 실종 신고를 막으려는 시어머니에게 “성재 씨 제가 찾을 겁니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순간부터 울버린의 칼날이 튀어나온다. 남편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뭔 놈의 일처리 하나 할 때마다 정의다 명분이다 가족이다 사설이 한 보따리거나 능력이 있다 싶으면 필요 이상 표독스러운 여느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들과 대비된다. 그는 아버지와 남편을 같은 방식으로 잃고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어버려요”라고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지도 않는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살아 돌아오자 문영은 역시 가족이 어쩌고 사랑이 어쩌고 하면서 시간을 끄는 대신 즉각 자수를 종용한다. 그 과정에서 존경하던 인권 변호사 시아버지의 욕망과 남편의 비겁함, 비열함이 드러난다.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갈 줄 알았던 성재가 사건 배후에 의해 풀려나고, 그 흑막의 일부인 하연주(이청아)와 성재가 내연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 문영은 충격을 받아 드러눕거나 자기연민에 빠져 눈물 바람을 하는 대신 차를 몰고 그들에게 돌진한다.
나문영 캐릭터의 우아하고 인간적이지만 파워풀한 매력은 배우 이보영의 오라를 통해 극대화된다. 이보영은 완급 조절이 뛰어난 배우다. <하이드> 1화, 급작스레 업무에 투입되어 사무실에 들어간 문영은 직원들에게 여러 지시를 내리며 사태 파악에 나선다. 큰 의미 없는 장면 같지만 오래 입에 붙은 말을 자의식 없이 툭툭 뱉어내는 듯한 이보영의 화법이 캐릭터에 현실성을 더해준다.
이보영은 ‘장르퀸’이라는 또 다른 별명에 걸맞게 힘을 주어야 할 대목에서는 확실히 카리스마를 드러낸다. 악당들의 앞잡이 격인 ‘마강’은 배우 홍서준의 마초적인 이미지 덕에 대단히 위협적인 느낌을 준다. 그는 전직 검사에게 저래도 되나 싶게 고압적인 말투로 문영을 겁박하고 아이까지 해치겠다 으름장을 놓는다. 문영은 차분하고 지적인 언변으로 응대하면서 그를 재판으로 끌고 가 궁지에 몰아넣는다. 남성성과 여성성, 물리력과 지력, 똑같이 위험하지만 둔기와 예기처럼 작동 방식은 다른 두 존재의 대립이 팽팽하게 그려져서 재미있는 조합이다. <하이드> 후반 문영은 새로운 적수를 상대하게 된다. 문영보다 온화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마강보다 위험한 존재인 하연주와의 대립 구도에서 이보영이 어떻게 화면을 장악해갈지가 드라마의 내용 못지않게 궁금한 점이다. <VIP> 이후 젊은 여성 시청자들의 호감이 커졌지만 이상하게도 주연작이 많지 않은 이청아가 인상적인 악역을 포트폴리오에 올리게 될지도 기대를 모은다. 드라마 <하이드>는 쿠팡플레이에서 토·일요일 오후 10시, JTBC에서 토·일요일 오후 10시 30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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